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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 초청 명강의 시모음

서초문인협 가을문학 콘써트 돌아가는 길 나의시의 뮤즈는 누구인가

김현정기자 | 입력 : 2017/09/27 [01:06] | 조회수 : 1,167

▲     © 시인뉴스 초록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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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란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유쾌한 사랑을 위하여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천 도의 불에 연도된 칼이어야 할까?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꽝꽝한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사랑을 보내고 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가을 노트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사람의 가을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첼로처럼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매캐한 담배 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 싶다
기껏해야 줄 몇 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 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찔레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나무 학교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푸른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나무를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우울한 날은 


우울한 날은
우울하게 죽은 자의 무덤에 간다.
구름내와 눈물내가 어둡게 나는
우울의 이마를 짚으러 간다.
권력의 톱으로도 썰지 못하고
시간의 날카로운 이빨로도 못 쓰러뜨린
이 세상의 우울이란 우울
모두 거머쥐고 죽은 자의 무덤
그 곁에 망각처럼 누우러 간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지척이어서
꿈으로 닿는 길도 지척이어서
손씻고 손씻고
아아 나는 가벼워져. 

불의 사랑 

어디에서 이토록 뜨거운 생명을 만나랴
참혹한 추락이 예비되었지만
불이 있어
지상은 늘 아름다웠다.
감히 수천의 날개를 파닥이며
별을 떨어뜨리며
저 무상을 향해 무릎을 펴는
불이여, 네 이름이 아니라면
어찌 영원과 초월을 꿈꾸랴
네 심장으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파멸과 맞서는 사랑을
우리가 감히 떠올릴 수 있으랴

마흔 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남자를 위하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남자를 위하여(민음사) 

농담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칼이어야 할까? 천도의 불에 연도된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언제나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유쾌하게 하루 해를 보내고 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었다

즐거운 밀림의 노래 

백화점마다 모피 세일을 한 후
거리에는 때아닌 짐승들이 밀려나와
소란을 떨었다.

빌딩 사이로 밍크가 재빨리 사라지는가 하면
지하실에는 양 한 마리가 석간신문을 사고 있었다.
오리들은 남의 이불 속까지 숨어들었다지.
아이구 재미있어라, 심지어 악어들조차
젊은 계집애의 겨드랑이에 끼어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뱀들은 요즘엔 주로 살찐 사내들의 허리를 노린다는군.

비야 오지 마라.
이 도시가 무서운 밀림이 되고 말리라.
나이 어린 여우 두 마리가 열렬히 교미를 하며
호텔문을 나서는 것을 보아라.
네거리에 멈춰선 자동차 안에도
신호등을 노려보는 낙타의 검은 눈이 있다.
주름살 수술을 하고 돌아가는 중년여자의
목을 애무하는 살쾡이들.
쥐나 토끼들도 털을 세운 채
택시를 기다리는 청년의 호주머니를
슬슬 덮치고 있다.
그렇잖아도 짐승이 많아 늘 체증이던
이 도시엔 백화점 세일 후 퍼져나온 짐승들로
더욱더 스산해지고 있다. 정글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
아무 의도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
나의 운명과는 상관도 없지만
별!을 나는 좋아한다.

별이라고 말하며 흔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사물보다 말을 더 좋아하는가보다.
혼자 차를 마시면서도
차를 마시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싶고
여행보다
여행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정작 연애보다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어쩌면 별도 사막일지 몰라
결국 지상에는 없는 불타는 지점
하지만 나는 별을 좋아한다.
나의 조국은 별같은 말들이 모여서 세운
시의 나라
나를 키운 고향은 책인지도 몰라

유리창을 닦으며 

누군가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순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목숨의 노래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시집 ; 어린 사랑에게

초여름 숲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엔
푸른 하늘이 흐르고 있듯이
그대와 나 사이엔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신전의 두 기둥처럼 마주보고 서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쓸쓸히 회랑을 만들 수밖에 없다면
오늘 저 초여름 숲처럼
그대를 향해 나는
푸른 숨결을 내뿜을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쑤실 가시도 없이
너무 멀어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 길을 만드는 일도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푸른 하늘처럼

그대와 나 사이
저 초여름 숲처럼
푸른 강 하나 흐르게 하고
기대려 하지 말고, 추워하지 말고,
서로를 그윽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오빠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물을 만드는 여자 


딸아,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채탄 노래 

마음을 파들어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일 모래 저녁답쯤에는 지평선이 보일까.

그리움이 끝난 그곳에는
타버린 나무들이
무더기 무더기 쓰러져 있을까.
얼마나 까아만
화산재가 쌓여 있을까.

슬픔의 벼랑마다 누가 서 있어서
밤마다 이토록 시를 쓰게 하는 것일까.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는 이도 많건만

내 마음은 얼마나 깊어
그대 하나 묻기에도
한 생애가 걸리는 것일까.
끝 모를 모래 바람 부는 것일까.


남자를 위하여(민음사) 

축구 


언어가 아닌 것을
주고받으면서
이토록 치열할 수 있을까
침묵과 비명만이
극치의 힘이 되는
운동장에 가득히 쓴 눈부신 시 한 편
90분 동안
이 지상에는 오직 발이라는
이상한 동물들이 살고 있음을 보았다

바다 앞에서 

문득, 미열처럼 흐르는
바람을 따라가서

서해바다
그 서럽고 아픈 일몰을 보았네.

한생애
잠시 타오르던
불꽃은 스러지고
주소도 모른 채
떠날 채비를 하듯
조용히 옷을 벗는 해안선을 보았네.

아, 자연
당신께 드리는 나의 선물은
소슬히 잊는 일뿐

더운 호흡으로 밀려오던
눈과 파도와
비늘 같은 욕망을
잊는 일뿐이었네.

잊는다는 일 하나만
보석으로 닦고 있다
떠나는 날
몸과 함께 땅에 묻는 일이었네. 


새 아리랑 

님은 언제나 떠나고 없고
님은 언제나 오지 않으니
사방엔 텅 빈 바람
텅 빈 항아리뿐
비어서 더욱 뜨거운 이 몸을
누가 알랴

그 위에 소금 뿌려
한세월 곰삭은
이 노래를 누가 알랴

기를 쓰고 피어나는 이 땅의 풀들
저 눈 밝은 것들은 알랴

떠나는 발자국이 님인 것을
돌아오지 않는 것이 님인 것을
그래서 더 보고 싶은 것이
우리 님인 것을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 님을 기다리며
밭고랑처럼 길고 긴 생애를 사느니

세상에는 없는
고무신 같은
된장국 같은
백자 항아리 같은
기막힌 이 사랑을 누가 알랴

냉수 한 사발의 사랑이
폭풍보다 더 무서운 힘인 것을

너무 울어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이 살갗이
지진보다 더 무서운 힘인 것을

님과 나 사이에는
꽃이라고 할까
새라고 할까
청산처럼 숨쉬는
아름다운 생명이 있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온몸으로 흔들리는 노래를 부르며
이 땅에는 사시사철 기다림이 피어나느니

곁에 있는 것은 님이 아니리
안을 수 있는 것은 님이 아니리
결혼한 것은 님이 아니리

멀리 있는 것
그래서 두 눈이 아리도록 그리운 것만
우리 님이리
아리랑이리

홀로 푸른 하늘 바라보면서
푸른 하늘 굽이굽이 새겨둔 설움
바라만 보아도 말갛게 차오르는 눈물

질경이 같은
엉겅퀴 같은
뙤약볕 같은
어지럽고 슬픈 살냄새
허리 구부리고 울던 흰옷들의
쓰라린 사랑이여

천굽이로 살아나는
아리랑이여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네루다 풍으로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구절을
이 나이에 무슨 사랑?
이 나이에 아직도 사랑?
하지만 사랑이 나이를 못 알아보는구나
사랑이 아무것도 못 보는구나
겁도 없이 나를 물어뜯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열 손가락에 불붙여
사랑의 눈과 코를 더듬는다
사랑을 갈비처럼 뜯어먹는다
모든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숨막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 

먼 길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정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2004. 2 

시(詩)가 나무에게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걸어 나와라
피 흘려라
푸른 심장을 꺼내 보여다오
해마다 도로 젊어지는 비밀을
나처럼 언어로 노래해 봐
네 노래는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너무 아름답고 무성해
나의 시 속에 숨어 있는 슬픔보다
더 찬란해
땅속 깊은 곳에서 홀로
수액을 끌어올리며 부르던 그 노래를
오늘은 걸어 나와
나에게 좀 들려다오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2004. 5 

지는 꽃을 위하여 

잘 가거라, 이 가을날
우리에게 더이상 잃어버릴 게 무어람
아무 것도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 다 버리고 집 떠나
고승이 되었다가
고승마저 버린 사람도 있느니
가을꽃 소슬히 땅에 떨어지는
쓸쓸한 사랑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른 봄 파릇한 새 옷
하루하루 황금옷으로 만들었다가
그조차도 훌훌 벗어버리고
초목들도 해탈을 하는
이 숭고한 가을날
잘 가거라, 나 떠나고
빈들에 선 너는
그대로 한 그루 고승이구나

2004. 3 

나무가 바람에게 

어느 나무가
바람에게 하는 말은
똑같은가 봐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바람불면 몸을 흔들다가
봄이면 똑같이 초록이 되고
가을이면 조용히 단풍드나봐

겨울 사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비의 사랑 

몸 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
물이고 싶다.
물보다 더 부드러운 향기로
그만 스미고 싶다.

당신의 어둠의 뿌리
가시의 끝의 끝까지
적시고 싶다.

그대 잠속에
안겨
지상의 것들을
말갛게 씻어내고 싶다.

눈 틔우고 싶다.

시집: 어린 사랑에게

대못 

떠나올 때
눈먼 어머니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왔어요.

비바람 그치지 않는
정든 골목에서
여름에도 추워하는 내 친구들은
벙어리인 채
손만 흔들었어요.

한 줄 꿈도 없이
목메이는 기도도 없이

길이 너무 많아
길이 없는
이 나라는 내겐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그냥 뛰어요
눈멀고 입다문 그 모습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 안고서 

시집 ; 어린 사랑에게

땅에서 나온 사랑 

아들아, 너를 어이 땅에 묻으리
꽝꽝한 땅에다 네 맑은 눈을
아침 햇살 빛나던 은구슬 치아를
벌써 책장 넘기던 의젓한 일곱 살
아까운 내 보배를 어이 묻으리
하늘이 가라앉고
땅 위의 모든 온기가 사라졌도다
이 목숨 끊어지는 날까지
다시는 입을 일 없는 아비의 비단 도포
언 땅에 깔고
올올이 애통한 어미의 속저고리 벗어
너를 싸노니
너 죽인 병도 여기까진 따라오지 못하리
어미 아비 검은 숯이 되어
천 길 절벽 굴러 떨어질 때
해와 달도 함께 꺼져버렸으니
시간이 어디 있어
내 아들을 범접할까

* 경기도 양주 윤씨 분묘에서 비단으로 싼 350년 전의 어린이 미라가
발견되었다. 

콧수염 달린 남자가 

콧수염 달린 남자가
키스를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까
구두솔처럼 날카로운 수염이
입술을 뚫고 들어와
갑자기 내 인생을 쓱쓱 문질러준다면
놀랄 일이야
보수주의와 위선으로 무성한
은사시나무를 뿌리째 흔들며
바람 부는 날
그의 눈이 수말의 눈처럼 껌벅거리다가
내 어깨에다 뜨거운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린다면
그의 겨드랑이에서 풍겨나는
쉰내가 나의 삶의 코를 틀어막는다면
그렇게 화해에 이르고 말까
언젠가 무주구천동에서 보았던
열녀비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버릴까


축복의 노래 


사랑의 이름으로 반지 만들고
영혼의 향기로 촛불 밝혔네

저 멀리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 하나
둘이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리라

오늘은 새 길을 떠나는 축복의 날
내딛는 발자국마다 햇살이 내리어
그대의 맑은 눈 빛 이슬 매쳤네

둘이서 하나되어 행복의 문을 열면
비바람인들 어이 눈부시지 않으리
추위인들 어이 따스하지 않으리

아아 오늘은 아름다운 약속의 날
사랑의 이름으로 축복하리라

커피 가는 시간 

아직도 쓸데없는 것만 사랑하고 있어요
가령 노래라든가 그리움 같은 것
상처와 빗방울을
그리고 가을을 사랑하고 있어요, 어머니
아직도 시를 쓰고 있어요
밥보다 시커먼 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
몇 권의 책을 끼고 잠들며
직업보다 떠돌기를 더 좋아하고 있어요
바람 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
홀로 가는 별과 사막을
미친 폭풍우를 사랑하고 있어요

전쟁터나 하수구에 돈이 있다는 것쯤 알긴 하지만
그래서 친구 중엔 도회로 떠나
하수구에 손을 넣고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단 한 구절의 성경도
단 한 소절의 반야심경도 못 외는 사람들이
성자처럼 흰옷을 입고
땅 파며 살고 있는 고향 같은 나라를 그리며
오늘도 마른 흙을 갈고 있어요, 어머니


테라스의 여자 

마지막 화살을 쏘아버린 퀭한 눈을 하고
긴 손톱으로 담배를 피우는 여자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칼
주름 진 입술에 붉은 술을 붓는 여자

쉬운 결혼들, 그보다 더 쉬웠던 이혼들
그러나 모든 게 좋아
가끔 외롭지만 그것도 좋아
그 많은 상처와 그 많은 고백들은
무슨 꽃이라 부르는지 몰라도 좋아
덧없는 포용, 바람처럼 사라진 심장 소리
말하자면 통속이지만
그 아픔이 모여 인생이 되지
도깨비 비늘처럼 달라붙을까 봐
날렵한 농담으로 피해가는 뒷모습들을 바라보며
홀로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테라스의 여자
생전 처음 만났는데
어디선가 많이도 보았던
수많은 저 여자

이상한 쨈 

빵 한쪽에 쨈 발라먹고 나와
지금 쨈 속에 있습니다
시간은 벌써 쨍쨍한 대낮
여기는 강남 사거리
나는 내 살을 만져봅니다
끈끈한 쨈이 묻어 납니다
이름은 사거리이지만
어디로도 길이 막힌
내 생의 한가운데
문득 꿀벌처럼 교통경찰이
쨈 속을 붕붕거리고 다닙니다
희망을 가져보지만
푸른 등은 오래 켜지지 않고
붉은 신호 앞에 꼼짝없이 멈춰선 대낮
정지된 인생들이
거기 그렇게
뜻없이 생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몸이 큰 여자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 엎어
해마다 튼튼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같은 남자와 씨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무엇을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벌려 상치쌈을 먹는
야성의 꿈과 푸른 핏줄 선명히 골 패인
배가죽 속의 고향노래를
늘어진 젖가슴에 뽀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치 무게를 달고
설익은 나이의 수치를 내세우며
규격 줄자 앞에 한줄로 줄을 서는
도시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탐스럽고 비옥한 밭의
무한한 사랑과 왕성한 산욕(産慾)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馬)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상품이 된 시인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위해
채찍질을 하며 뜻없이 시들어가는 오늘
나날이 오염되고 황폐화 되어가는
저 아름다웠던 우리들의 대지에
나는 한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풍성한 천연의 대지를 깨우고싶다.


* 클라리사 P 에스테스 : 미국 심리 분석 학자

노래 

나와 가장 가까운 그대 슬픔이
저 강물의 흐름이라 한들

내 하얀 기도가 햇빛 타고 와
그대 귓전 맴도는 바람이라 한들

나 그대 꿈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대 또한 내 꿈을 열 수 없으니

우리 힘껏 서로가 사랑한다 한들.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새떼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피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도 모르게
번쩍이는 길이 되어
떠나감 되어.

끝까지 잠 안든 시간을
조금씩 얼굴에 묻혀가지고
빛으로 포효(咆哮)하며
오르는 사랑아.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울 이유도 없이
하늘로 하늘로 가고 있나니.


새떼(민학사, 1975) 

비망록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딸아 미안하다 

딸아, 미안하다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무능한 나라의 치욕과
적국을 향한 분노로 소리 지르다 말고
나는 목젖을 떨며 깊이 울어야 한다
기실 나는 민족을 잘 모른다
그 민족의 주체가 남성인 것도 모른다
다만 오늘 네 앞에 꿇어 엎드려
울음 우는 것은
나의 외면과 나의 망각을 다시 꺼내놓고
사죄하는 것은
네 존엄과 네 인격을 전리품으로 가져간
일본군보다 더 깊게
나의 무지와 독선이 슬프기 때문이다.
심청을 팔고, 홍도를 팔고 살아난 아비와 오빠
기생과 놀며 풍류를 더하고
그녀들을 화류로 내던진 이 땅의 강물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결국 강압과 사기로 세계에도 유래 없는 성 노예 집단인
적국 군대의 종군 위안부로 보내진 내 딸아
민족보다도, 그 민족의 주체인 남성의 소유물이
상처를 입은 그 어떤 수치심보다도
내 딸의 존엄과 내 딸의 인격이 전리품으로 능욕당한
그 앞에 나는 무릎 꿇어 사죄한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딸아


* 매주 수요일 정오, 서울 안국동 일본 대사관 앞에는 흰옷 입고 종군
위안부 여성들이 모인다. 

터키석 반지


사랑에 은퇴하고
가을 하늘처럼 투명해지면
터기석 반지 사러
터키에 가고 싶다.

어느 슬픔의 바다에서 건져 올렸던가,
천년 햇살에도 마르지 않는
깊은 눈을 가진 여자
푸른 물 소리 출렁이는
터키석 속에서 만나고 싶다.

비둘기떼 쏟아지는
위스크다르 항구에 닿고 싶다.
실크로드 그 끝자락에는
동양과 서양의 온갖 보석들이
짧은 지상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겠지

흙에도 귀가 달린 나라
터키에 가서
내가 나를 위해
터키석 반지 하나 사고 싶다.

사랑에 은퇴하고
가을 하늘처럼 투명해지면

햇살 

당신이 사방에 서서
눈이 부신 오후가 되면

나는 머리를 자르고 싶어요

지난 가을 찬바람 불 때
낙엽과 함께 묻어버린 눈빛

그때부터 나의 동면은 시작되었건만
오늘 당신 앞에 다시 살아나

헝크러진 머리채 잘라버리고

처음인 듯 조용히 기대어
울고 싶은 건
무슨 일인가요

사랑이란 장애를 만났을 때
더욱 무성히 자라는 법이지만

오늘 긴 머리채를 잘라버리고
다시 불같이 사랑하고 싶은 것은
이 무슨 찬란한 망발인가요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다른 데는 말고
내 가슴으로 들어와
부질없는 나뭇잎들
한쪽으로 쓱쓱 치워주세요
언뜻 보면 아까워 보이지만
습관뿐인 저 거실의 꽃병
먼지 앉는 의자를 치워주세요
추억만을 되감는 시계가
다시 새 비둘기를 낳을 수 있도록
태엽에도 숨결을 불어놓어 주세요
당신의 손에 빗자루가 있다면
깊고 쓸쓸한 뒷모습들
쓸어내 버리고
눈부신 새 물길을 내어주세요

그대 만난 이후 


날 흔들지 마세요
사랑은 노동 중에서도 중노동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
그 참혹한 소모를 아시잖아요
나도 이제 세상 사람들처럼
공기를 마시며 살고 싶어요
그대 만난 이후
내가 마신 건 공기가 아니었어요
숨쉬기가 너무 아팠어요
끝없는 고통을 끝없이 기뻐하는
참혹한 상승과 몰락이 거기 있었어요

수련 앞에서 


새로 핀 수련 앞에서 무슨 말을 하랴
그래도 이 눈부신 것들을
가만히 두는 것은
시인의 수치
만져도 안 되고
입술 닿아도 안 되고
껶으면 더욱 안 되니
두 눈에 이슬 맺히도록
푸른 하늘이 쩡쩡 흔들리도록
나도 찬란한 한 송이 미소가 되어
활짝! 대결하는 수밖에

악어를 잡으며 

공사중>이 꽂혀 있는 비포장 길
버섯꽃처럼 피어난 웅덩이 속에
처박힌 하늘 한쪽을 본다
하늘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잠시 즐거운 지옥을 떠올려본다
그 속에 푸른 악어들이 살고 있구나
꿈틀거리는 싱싱한 비명
기어나오기 전에
재빨리 구둣발로 밟아야 한다
돌연히 하늘이 뒤집히고
검은 나무와 집들과 그대의 얼굴이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본다
무자비한 폭력, 가학의 떨림,
힘을 쓰고 나니
바지 가랭이에 달라붙는 축축한 아첨배들.
참 재미있구나, 악어를 잡는 재미.
비오는 날. 흙냄새 자욱한 비포장길에서
폭군처럼 두려움도 없이 구둣발로
푸른 하늘을 밟는다
악어들을 잡는다

우울증 

겨울 안개 길고 긴 터널
모든 것이 무사해서 미친 중년의 오후
전조등 하나 없는 회색 속을 걸어간다
가방에는 몇 개의 열쇠가 들어 있지만
진실로 갖고 싶은 열쇠는 없다
기적이란 신의 소유만은 아니었구나
지나온 하루하루가 모두 기적이었다
돌아보니 텅 빈 무대 아래
반수면 상태로 끝없이 삐걱이는 의자들
저기가 진정 내가 지나온 봄의 정원이었던가

딸의 소식 

아버지, 저 여기 살아 있어요
그날 제 품에 숨긴 칼로 낙랑의 북을 찢을 때
제가 찢은 것은
적이 오면 저절로 운다는 자명고가 아니었어요
제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손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찢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선명합니다
두려움과 죄의식으로 후들거리며
맹목 속에 온몸을 던진
저는 그때 미친 바람이었어요
호동은 달처럼 수려한 사내
하지만 북을 찢고 제가 따른 건 호동이 아니었습니다
제 사랑은 전쟁의 아찔한 절벽에 핀 꽃, 세상에
파멸밖에 보여줄 수 없는 사랑이 있다니요
검은 보자기 홀로 뒤집어쓰고
손에 쥔 칼 높이 들어 북을 찢을 때
하늘의 별들 우르르 떨던
그 캄캄한 절망만이
온전히 제 것이었습니다

* 낙랑에는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우는 자명고라는 레이더가 있었다.
낙랑의 왕 최리의 딸은 북국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 호동을 사랑
하여 북을 찢었고, 호동은 낙랑을 쳐들어왔다.(<삼국사기> 제 14권) 


눈물 흘리기 


항아리에 받았더라면
열두 번 머리를 감고
열두 번 목욕을 하고도 남았을
나의 눈물을
오늘은 키 큰 나무 무성한 잎에다
알알이 매달아 두리
바람 불면 후두둑 떨어져
풀들의 발가락 하얗게 씻어주리
그 힘으로 풀들이 일어서고
땅속 깊이 새로 강이 태어나고
지난해던가 떠나버린 봄도 돌아오리

지상에 세운 누구의 집이
풀잎 아닌 것이 있으랴
이 절벽이 끝나고 너 떠날 때
헛발 딛지 않도록
나의 눈물을 키 큰 나무 무성한 잎에다
알알이 매달아 두고
바람 불면 후두둑 허공을 두드리리
지상에 초록길이 열리게 하리

아들에게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어린 사랑에게(미래사) 

나의 장미 

시인은 아름다운가
시간 위에 장미를 피우려고
피를 돌리는 존재
그는 생명인가, 언어인가
그의 감옥에는
홀로 앉아 시를 쓰는 손만 보일 뿐
그는 소경인지도 모른다
시 속에서만 부엉이처럼 눈을 뜨고 사니
현실은 늘 저주
사랑은 언제나 이별
그의 독방에는
그가 풀어놓은 말들이 저희끼리
서로 연애를 하여
결국 까만 알을 낳는다
시는 언어의 딸이 아니라
침묵의 딸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랑을 말한 적도 없다
시 쓰다 보면 거기 사랑이 있을 뿐
숨 쉬는 장미 같은........ 

연인에게 


연인아, 여름이 오면
손잡이가 빨간 가위 하나 들고 와
함부로 뻗친 가지 척척 잘라다오
부질없는 내 열망을 잘라다오
수북이 땅 위에 나뭇가지 쌓이면
그 가지로 허공에다 새집 한 채를 지어다오
바람 불 때마다 흔들리며
노래를 알처럼 까는
새 한 마리 키우리라

새우와의 만남 

손에 쥔 칼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에게 선뜻 칼을 댈 수가 없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 기내식 속에
그는 분홍 반달로 누워 있었다
땅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그대와
하늘 한가운데 3만 5000피트
짙푸른 은하수 안에서 만난 것은
오늘이 칠월 칠석이어서가 아니다
그대의 그리움과 나의 간절함이
사람의 눈에는 잘 안보이는
구름 같은 인연의 실들을 풀고 풀어서
드디어 이렇게 만난 것이다
나는 끝내 칼과 삼지창을 대지 못하고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부드럽고 뜨거운
나의 입술을 그대의 알몸에 갖다 대었다
내 사랑 견우여

토요일 오후 

신촌문고에 가서 책 일곱 권을 사 들고 오니
세상이 온통 내 손안에 있는 것 같다
책 속에 길이 있다지만 길은커녕
백 원짜리 동전 하나 보이지 않는 책을 사 들고 오며
밥 먹지 않아도 괜히 배부르다
김장 담그신 후
항아리를 쓰다듬던 어머니의 뿌듯한 손이 된다
이제 지구는 구석구석 다 시장이 되어 있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다 가격표를 붙여놓았다
그리고 가장 가볍게 가장 간단히 쓰고 버리는 것에다
정신없이 돈을 지불한다
그래서 책은 더욱 쓸모없고
보이지 않는 것만 유독 강조하지만
토요일 오후
무겁고 복잡하기만 한 책을 사 들고 오며
세상이 모처럼 아기 숨소리처럼
새근새근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이 뭉클함으로 깨를 볶으며
며칠을 살 궁리를 한다
전기밥솥 스위치를 누르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서둘러 차를 끓인다
책상 위 스탠드의 불을 환히 밝힌다 
 

황진이의 노래 

나는 바람인가 봐요.
담도 높은 대궐 안엔
문도 많은데
문마다 모두 열어 젖히고 싶어요.

닿는 것마다
흔들고 싶어요

지체있는 뭇별들을
죄다 따고 싶어요
아니어요

작은 햇살에도 얼굴 부끄러운
풀꽃 깉은
사랑 하나로

높은 벽에 온몸 무딪고
스러지고 싶어요. 

사과를 먹듯이 

가령 사과를 먹듯이
시간을 그렇게 먹다 보면
1년 내내 땅이 보호하고
햇살이 길러낸
한 알의 붉은 사과를 먹듯이
그렇게 조금씩 향기를 먹다 보면

그 향기로 사랑을 시작하고
그 빛깔로 사랑을 껴안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처럼
푸르게 다시 태어날 수도 있으리

또한 그 힘으로
지상의 우울을 조금씩 치유하고
고즈넉한 웃음들을 만들기도 하리

가령 한 알의 사과를 먹듯이
그렇게 조금씩 향기를 먹다 보면
한 권의 책을 먹다 보면
열다섯 해쯤 그렇게 맛있게 먹다 보면

러브호텔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를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들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4월에는

4월에는
비로소 용서하고
가슴을 여는
날개의 몸짓으로
가득하다.
4월에는
어두운 골목에 빛을 뿌리고
침몰한 배에 못질을 치던
젊은 이마가 때리는
종소리로 가득하다.
그 후
4월에는
기도처럼 하얀 내 가슴에
뜨겁게 진
그 님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겨울 노래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등불 

네가 처음 외박한 밤엔
모든 피들이 털 끝에 매달려
뜨거운 커어튼을 찢었고

네가 두 번째 외박한 밤엔
바람 헤매이는 언덕을
백지장처럼 홀로 넘었다.

네가 세 번째 외박한 밤엔
가늘게 파닥이는 나래로
긴 긴 이슬을 손에 받았는데

오늘 네가 들어오지 않아도
그래? 괜찮다!
노란 목소리로
기분좋게 추운 옷깃을 여며 내린다.


어린 사랑에게(미래사) 

눈물 

네가 울고 있다.

오랫동안 걸어 둔 빗장
스르르 열고
너는 조용히 하늘을 보고 있다.

네 작은 몸 속 어디에 숨어 있던
이 많은 강물
끝도 없이 흐르는 도끼 소리에
산의 어깨도 무너지고 있다.


꿈꾸는 눈썹 / 신원문화사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벌레를 꿈꾸며 

한번쯤 벌레를 꿈꾼 적이 있다면
이제 책벌레보다 애벌레가 되고 싶네
검은 활자를 갉아먹고
홀로 꿈틀거리며
집 한 채도 짓지 못하는 책벌레보다
휘청거리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초록 잎을 뗏목 삼아
하늘을 기어가는 애벌레가 되고 싶네
돈벌레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겁이 나고
열매란 열매는 죄다 먹어치우고
모든 곳에 구멍을 뚫어놓는
식욕도 두려워
한번쯤 벌레를 꿈꾼 적이 있다면
이제 애벌레가 되고 싶네
결국 사랑하는 이의 심장 속에 사는
작고 아름다운 각시별 같은


시집 ;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 민음사.2004.5 

나 떠난 후에도 


나 떠난 후에도 저 술들은 남아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사람들을 서서히 죽이겠지
나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술에 취해
몸은 땅에 가장 가까이 닿고
마음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닿아
허공 속을 몽롱하게 출렁이겠지
혀끝에 타오르는 불로
아무렇게나 사랑을 고백하고
술 깨고 난 후의 쓸쓸함으로
시를 쓰겠지,나 떠난 후에도
꿀 같은 죄와 악마들은 남아
거리를 비틀거리며
오늘 나처럼 돌아다니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 2004,동서문학,여름호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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