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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최연숙 시집『유다의 하늘에도 달이 뜬다』

한영제 기자 | 입력 : 2018/12/18 [02:46] | 조회수 : 817

 

▲ 최연숙 시인

 

사랑구원모티프

 

 

유한근(문학평론가·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자연인으로서의 시인을 만나지 못하고 시를 접했을 때, 그 시인의 현실적인 삶과 시를 연결시키지 않고 객관적으로 시 속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시편마다 하나의 독립된 존재물로 보고 탐색할 수 있는 점이 그것이다. 단점 또한 없을 수 없다. 시인의 내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무엇, 즉 시인 정신의 핵 혹은 시인 정서의 본체까지 탐색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왜 시인이 이런 시를 써야만 했는가에 대한 탐색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나의 의무고 나의 기쁨이지만, 그것들이 반감되었음을 전제하고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간다. 다분히 도로徒勞할 위험이 있어도 시 속으로 들어가 시의 핵에, 시인의 마음 언저리로 다가가는 일은 사랑구원을 위하는 일이 될 것이다.

 

1. 보여주기방식으로 정서 표출과 기타

 

모든 글의 서술양식은 말하기보여주기로 나눌 수 있다. 시문장의 형태가 운문보다는 산문을 선호하고 있는 하이브리드 시대의 현대시 경우는 더욱 그러한다. 시의 수필화 현상이 극대화되고 있는 작금의 시단 상황에서는 이 두 양식의 서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서사학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관심은 플라톤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관심이다.

이 두 양식을 19세기 말, 영미비평계는 요약summary장면scene혹은 말하기-설명telling보여주기-제시showing라는 새로운 용어를 쓰게 된다. 말하기가 화자의 중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 방식이라고 할 때, 보여주기는 연극처럼 사건이나 대화를 직접 제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말하는 주체는 없어지고 독자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듯한 환상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이야기 방식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하기-보여주기방식은 글의 성질에 따라 양식의 적법성을 판단해야 한다. 또는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다르게 차용되어야 할 것이다. 주네트는 이 두 개의 발화양식이서로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으며 동일한 개념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말하기는 서술 행위narration혹은 서술체이며 보여주기는 묘사행위description혹은 담화로 이루어지는 설명행위라고도 말한다.

이렇게 뜬금없이 서사학에 대한 담론을 시작한 것은 최연숙 시인의 시 전체를 일별하는 동안 느꼈던 것이 문체였기 때문이다. 시를 산문 형태로 쓰기 시작한 것이 어제 일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이러한 현상은 진행되어 와서 이제는 별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최연숙 시의 형태적 특징은 우선 말하기보다는 보여주기 방식의 서술체라는 점이며 산문 문체를 차용해도 시 작법의 최고치인 은유와 상징 구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서정시의 한계를 극복하는 파울 첼란적 비의적秘意的서정시라는 점에서 우선 주목된다.

 

곡예 하던 도리깨가 가을볕을 내리친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햇싸라기 속을

꼬투리를 탈출한 눈이 톡톡, 튀어

마당가 수챗구멍으로 달아난다

지난봄, 종자 한 바가지 콕콕 찍어 삼킨

산비둘기 떼가 굴려온

그득하게 쌓인 까만 눈알들

아부지가 때리는 것은 그림자다

아부지와 아부지가 내리치는 그림자가

덕석에서 복사되어 장깡까지 늘어섰다

-콩 타작전문

 

위의 시 콩 타작은 첫 행곡예 하던 도리깨가 가을볕을 내리친다로 시작된다. 문장형태는 산문이나 은유의 문법적 구조인 ~()~”, “곡예 하던 도리깨등의 패턴으로 구조되어 있다. 이러한 은유적인 구조는 시를 고급화하는데 기여한다. 그리고 보여주기방식으로, 콩 타작 풍경을 한 씬 한 씬 그려주어 시 해석의 여백을 주고 있어 독자의 몫을 강화시켜준다.

영화에서의 은 시에 있어서 이미지라는 개념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영상문학 즉 영화와 문학이 학제 간 연구로 들어가면 복잡해진다. 이 시를 씬으로 나누면 이렇게 된다. 곡예 하듯이 가을볕을 내려치는 도리깨. 햇살은 흩어지고, 콩깍지를 빠져나온 콩알이 마당가 수챗구멍으로 흩어진다. (회상)지난봄, 산비둘기 떼가 몰려와 한 바가지의 콩을 먹어 그득하게 쌓인 눈알들. (여기에서 눈알들콩과 비둘기들의 눈알등 이중적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림자를 때리는 아부지. 그 그림자가 덕석에서 복사되어 장깡까지 늘어섰다등 이렇게 씬으로 나눌 수 있다. 산문형태로 시행이 구조되어 있지만 다분히 은유적이다. 그리고 이 시를 시퀸스로 나누면, ①②, , ④⑤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다섯 개의 씬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씬은 이다. 그것은 그림자라는 시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이미지나 시어들이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아버지 내려친 가을볕, 그 햇싸라기(해와 싸라기의 복합어로 부스러진 쌀알과도 같은 햇살을 의미)가 수챗구멍으로 달아난 그림자이거나 아니면 산비둘기 떼가 찍어 삼킨 까만 눈알들의 허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 둘의 공통분모인 허상, 허무, 실체가 없는 그림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구절은 마지막 행 덕석에서 복사되어 장깡까지 늘어섰다이다. 덕석은 마당에 펴놓는 멍석을 말하는데, 특히 추울 때에 소의 등을 덮어주는 멍석, 소의 겨울옷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장깡은 장독대의 전라도 사투리다. 그렇다면 이 시행은 시인의 아버지와 아버지가 내려치는 콩 타작의 허상, 즉 콩 타작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마당에 펴놓은 멍석에 영상처럼 복사되어 장독대까지 늘어섰다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 콩 타작은 지금도 시인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콩 타작하는 모습을, 시골 가을 이미지와 몽타주 기법으로 오버랩시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시골 가을 풍경의 정취를 그린 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의 또 다른 시는 겨울 억새이다.

 

목 쉰 바람이 흰 길을 낸다

 

데 내쳐진 한 무리 노구老軀

앙상한 몸피가 구푸린 채 부싯돌처럼 맞대고 있다

 

마른 뼛가락 속으로 환청이 여음을 잇던 날

어느 봄 만개한 복사꽃 낯을 꺼내 시린 손을 감싸본다

 

이 빠진 옥수수알 길을 들락거리는 기억의 발음기호,

간간이 실낱같은 오늘이 열리면

나 집이 가 느이들하고 살면 안되것

 

푸석거리는 머리칼 올올이 찬바람에 흩어지는 저물녘

허공에서도 흰머리 뭉치가 휘나리친다

 

발목까지 감고 있던 까끌한 수의가 전신에 휘감겨

삼켜버린 말 마디마디 타는 소리마저 차단된 공간

 

개울가에 옹송거리며 서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

 

가족도 온기도 외면한 초점 잃은 눈들이

인정人情에서 유리된 이름들이 하얀 걸음을 내딛고 있다.

-겨울 억새전문

 

위의 시 겨울 억새의 첫 행은목 쉰 바람이 흰 길을 낸다로 시작된다. 이 한 줄의 시행이 이 시의 제목을 은유하고, 시의 전체적 의미를 함축적으로 함유한다. 목 쉰 바람은 겨울 찬바람에 흔들리며 삭막하고 황폐한 소리를 내는 억새들의 부딪치는 소리를 은유한 문법적 구조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억새밭에 길을 내는 이미지를 흰 길을 낸다고 했다. 이 이미지는 2연의 데 내쳐진 한 무리 노구老軀/ 앙상한 몸피가 구푸린 채 부싯돌처럼 맞대고 있다로 연결된다. 한 무리 노구老軀’,앙상한 몸피는 겨울 억새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구푸린 채 부싯돌처럼 맞대고 있다흰 길을 낸다’,흰머리 뭉치’, ‘까칠한 수의’ ‘하얀 걸음의 백색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이 빠진 옥수수알 길을 들락거리는 기억의 발음”, “나 집이 가 느이들하고 살면 안되것’”라는 말은 고령화 시대의 아픔을 널리 알리고 싶은 최연숙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사랑과 구원의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앞의 시 콩 타작에서 보여준, 이미지를 몽타주 기법으로 오버랩시키는 표현구조와 유사하게, 어느 봄 만개한 복사꽃낯을 꺼내 시린 손을 감싸본다는 행은개울가에 옹송거리며 서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는 행의 이미지와 병치된다. 이 두 개의 이미지 또한 많은 이야기를 행간 속에 숨겨 놓고 있는 구절들이다. 보여주기방식으로 시를 쓰지 않고, 말하기방식으로 쓴다면 이 이야기들은 시의 구조 속에 넣지 못할 것이다. 작은 소설이나 긴 수필로 써야 할 것이다. 특히 시인의 원체험 공간에서의 가족 이야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또한, 추석에서의 디아스포라표/ 송편이 의미하는 바 흩어진 가족이야기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도 보이지만, 최연숙 시인은 한 편의 시 속에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한다. 비의적 서정시의 특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많은 것이란 시인의 사유의 흔적 혹은 사색의 과정과 그 결과물을 말하려 한 점이다. 보여주기방식으로 그려주기만 해도 좋을 것을, 말하기방식으로 자신의 사유한 결과를 전언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은유적인 표현구조로 문장을 만들기 때문에 비의적 서정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 부분이 마지막 연이다. 가족도 온기도 외면한 초점 잃은 눈들이/ 인정人情에서 유리된 이름들이 하얀 걸음을 내딛고 있다.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초점 잃은 눈들은 앞 연의 마지막 행 개울가에 옹송거리며 서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도, 인정人情에서 유리된 이름들이많은 것을 행간 속에 함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혹은 그들의 메마른 마음이나 정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고 마른 겨울 억새처럼 쇠하고 황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초점 없는 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연숙 시인의 시 두 편을 읽으면서 자명해진 것은 그의 시의 특징은 보여주기방식이 주이되, 말하기방식의 은유적 표현을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시인의 원체험 공간 속의 가족에 대한 정서를 이미지로 표현할 때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른 시는 어떨까?

 

 

2. 시적 대상에 대한 인식과 언어 트릭 혹은 거리

 

시적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을 어떤 구조로 표현하는가를 탐색하는 일은 그 시인의 관심과 그 시인의 인식논리 및 감성논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시인의 안과 밖에 산재되어 있는 많은 대상 중에 그 시인이 무엇에 시각을 머무는가는 그 대상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공감대가 성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 우선 사과가 사과에게를 보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얼굴을 붉힌 사과가 입을 삐죽 내민다

식탁 위에도 반쪽 난 사과가 있고

컴퓨터 옆 은쟁반에도 놓여 있다

 

사과는 줄곧 내 시선의

꼬리를 잡으며 말을 건넨다

반쪽 난 사과를 한 입 베어 무니

어제와 다른 소태 씹은 맛이다

 

사과는 왜 사과와 동음이의어인지

사과를 좋아하는 나는

사과를 맛있게 먹기 위해

그이에게 사과謝過를 해야 했다.

-사과가 사과에게전문

 

이 시 사과가 사과에게는 쉽게 이해된다. 해설이 필요 없는 시이다. 읽으면 그대로 의미가 전달되는 시이다. 과일인 사과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의미인 사과謝過와의 언어 트릭을 통해 시인의 메시지를 전언하는 시이다.

냉장고 속, 식탁 위, 컴퓨터 옆 은쟁반에 놓여 있는 사과, 그 사과들은 시인이 먹다가 남긴 방치된 사과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인의 눈길을 갈망하고 말을 건다. 그래서 시인은 그 사과를 먹지만 소태 씹는 맛을 낸다. 그러자 시인은 사과를 맛있게 먹기 위해 그이에게 사과謝過를 해야 했다고 토로한다. 이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시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단순한 언어 트릭일까, 아니면 유희인가? 먹다가 방치해버려 산화되어 맛이 간 사과, 그 사과에게 다시는 방치하지 않겠다고 용서를 빈다는 행위에 대한 묘사가 시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이 부분에서 독자는 머리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가볍고 명쾌하고 유쾌하기는 하다. 그러나 시인이 함의하는 미학 이상의 무엇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를 해결해줄 수 있는 시행은 사과는 줄곧 내 시선의/ 꼬리를 잡으며 말을 건넨다이다.

이 시에서 사과는 이 시의 시적 대상이며 모티프이다. 시인이 시적자아일 때, 사과는 시인의 관심 대상이 되는 타자이다. 시인의 이 타자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소통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다. 대상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소통이나 인식도 없게 된다. 먹는 사과뿐만 아니라, 관념이고 행위인 사과謝過에 대한 관심이나 인식이 없을 때, 그것은 자아의 것이 되지 않고 타자로만 남아 있게 되어 자아와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

사랑이라는 언어, 그 대상에 대한 관심이나 인식이 없을 때, 그것이 내 것이 되지 않는 것처럼 자아와 타자와의 소통과 교섭은 우리의 삶 혹은 인식에 있어서 중요함을 이 시는 환기해 주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간혹 바다가 홍해처럼

길을 연다면

내 가고 싶은 섬 주위에는

고흐의 붓꽃이 남보라빛으로

모닥모닥 피어나고

깊고 푸른 눈동자의 그는

흰 모래 고운 결 위에

검정 약콩을 콩콩 심으며

영문 이니셜을 새길 것이다

 

야자나무 우듬지를 떠났던

극쇠 갈매기 콕콕콕 콩 주워

먹으며 이름자를 지우면

뜸부기 같은 눈을 끔벅거리던 그는

바다를 등진 모아이의

끝없는 뒷모습과 마주하다가

돌아가곤 할 것이다

 

파도가 그 섬에 다녀올 때마다

몸집을 부풀리는 그리움의 간극

-그리움의 간극전문

 

개인적인 나의 취향이지만, 그리움의 간극이라는 시의 제목이 우선 흥미를 느낀다. 그리움의 정체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우선 그 간극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가 궁금해서이다. 이 시의 마지막 연 파도가 그 섬에 다녀올 때마다/ 몸집을 부풀리는 그리움의 간극에서 그리움의 간극이라는 시어가 나오기는 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이 연의 의미만을 생각하면 쉬워진다. 시는 시어와 이미지, 그리고 행과 연, 시행들의 유기적 구조를 통해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시의 경우에도 시행에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그것을 토대로 하여 이 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이해하는데 걸림이 되는 것은 고흐’ ‘그리고 모아이이다. 이 시의 2내 가고 싶은 섬 주위에는/ 고흐의 붓꽃이 남보라빛으로/ 모닥모닥 피어나고/ 깊고 푸른 눈동자의 그는에서 고흐가 바다를 모티프로 해서 그린 그림은 생트 마리 바다 위의 보트가 대표적인 작품인데, 앞 뒤 시행의 연결로 보았을 때 이 시의 경우에서는 다만 바다와 파도 그리고 섬의 이미지를 고흐의 그림에서 남청색, 남보라색 이미지를 끌어오기 위한 장치로 보여진다. 풍경에게 답함이라는 시에서 고흐의 붓질이 멈춘 지점에서/ 난바다의 성근 다리 뒤로 해쓱한 아침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깊고 푸른 눈동자의 그에서의 는 고흐 혹은 다른 특정한 인물일 수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뜸부기 같은 눈을 끔벅거리던 그는/ 바다를 등진 모아이에서의 모아이라는 시어는 이스터 섬에 있는, 사람 얼굴 모양의 조각상인 모아이moai가 아닐까 싶다. 바다를 등지고 장승처럼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모아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 시는 에 대한 그리움의 간극을 그린 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간격은 시적 자아와 섬과의 간격, 그리움의 몸집을 부풀리게 하는 파도의 간격일 것이다.

간격이라는 언어와 같이 주목되는 시어는 사이. 이 때문에 주목되는 시가 사이를 훔쳐보는 눈 사이이다. 간격과 사이는 대상과 다른 대상과의 공간적 거리를 말한다. 그러나 이 시의 사이는 간격보다는이라는 공간적 의미로 보여진다.그러나 사이는 공간적 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거리도 있다.

 

도시의 풍경을 밀치고 들어선 사이 기장쌀밥을 가지에 매단 남산의 노란 봄 몇 송이 히죽이는 사이 봄이 겨울을 젖히고 건너오는 사이 공중에 제 길 매단 채 동면중인 케이블카 사이 푸른 캔버스 새하얀 물방울을 쏘아 올릴 분수대를 청소하는 사이 엎드려 목을 축이는 비둘기의 목을 힘껏 끌어당기는 물관 사이

도시의 풍경을 밀치고 들어선 사이 기장쌀밥을 가지에 매단 남산의 노란 봄 몇 송이 히죽이는 사이 봄이 겨울을 젖히고 건너오는 사이 공중에 제 길 매단 채 동면중인 케이블카 사이 푸른 캔버스 새하얀 물방울을 쏘아 올릴 분수대를 청소하는 사이 엎드려 목을 축이는 비둘기의 목을 힘껏 끌어당기는 물관 사이

 

연두 물 한껏 밀어 올린 배경이 된 나뭇가지 사이 렌즈 안에서 한 조각 김치와 치즈를 먹는 사이 입술을 훔쳐보는 눈 사이

 

식물원이 발을 달고 사라졌다고 끌끌 혀를 차는 사이 왜 그리운 것들은 발이 생기는지 모르겠다고 궁리하는 사이 오래 전 절뚝이는 발로 돌아올 수 없는 히말라야까지 가버린 그를 생각하는 사이 발 달린 것들이 언제나 문제였다고 투덜거리는 사이 훔쳐보는 눈 사이 계단을 내려오며 다시 도시의 중심에 선 사이

-사이를 훔쳐보는 눈 사이전문

 

사이를 훔쳐보는 눈 사이1연은 도시의 풍경을 밀치고 들어선 사이로 시작해서 엎드려 목을 축이는 비둘기의 목을 힘껏 끌어당기는 물관 사이로 끝나는데, 이 예시된 구절로 볼 때 사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연의 연두 물 한껏 밀어 올린 배경이 된 나뭇가지 사이는 공간적인 틈을, 렌즈 안에서 한 조각 김치와 치즈를 먹는 사이는 시간적 틈을, 입술을 훔쳐보는 눈 사이는 시간과 공간적인 간격을 의미한다고 할 때, 이 시에서의 사이는 관념의 간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좋을 것이다. 3연 서두 식물원이 발을 달고 사라졌다고 끌끌 혀를 차는 사이 왜 그리운 것들은 발이 생기는지 모르겠다고 궁리하는 사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부분 훔쳐보는 눈 사이 계단을 내려오며 다시 도시의 중심에 선 사이가 시간적 거리와 공간적 거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 구절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되새길 때, 시적 자아의 존재가 도시의 중심에 있다는 의식의 저변에 있는 자신의 정체성 탐색의 간격, 그 간격의 절망감을 자동기술법으로 쓴 시로 이해된다. 이는 시인과 독자가 공유하는 예술의 한 장르를 시라고 볼 때 독자를 사고하게 하는 시인의 독자 존중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3. 사랑구원이라는 모티프

 

나는 이 시평의 서두에서 시 콩 타작그림자를 허상, 허무, 실체가 없는 그림자로 보았다. 그러나 무엇인가 흡족함을 느낄 수가 없어 시 그림자의 말을 보려한다. 한 편의 시에서 풀리지 않은 문제는 그 시인의 다른 시에서 그것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인적이 끊긴 공원 산책로

잔바람에 두런두런 잎손들

나누는 이야기를

나뭇잎 그림자가 들려준다

베트남 외가에 가버린 은혜가

몇 달째 산책로에 오지 않는다고

어디 간 거냐고

나와 은비에게 따지듯 묻는다

순영이 할아버지도 종태 할머니도

어김없이 지나며

자식들 안부며

퇴행성관절염 치료를 받고 온 것이며

어제는 뼈만 앙상한 준희 할머니가

링거를 맞고 겨우 몇 발자국 떼셨다고

언제 우리와 이별일지 걱정이라며

자식들은 어디에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성토를 하다가

동환이 할머니도 슬그머니 일어나

혼자 사는 지하방으로 걸음을 옮기셨다고,

하루의 문을 닫아야 할 시간

바람의 추임새를 들으며

일상을 마무리는 나뭇잎 그림자

-그림자의 말전문

 

위의 그림자의 말에서의 그림자는 마지막 행의 나뭇잎 그림자이다. 하루의 문을 닫아야 할 시간/ 바람의 추임새를 들으며/ 일상을 마무리는 나뭇잎 그림자이다. 그림자의 사전 의미는 물체가 빛을 가려서 그 물체의 뒷면에 드리워지는 검은 그늘을 일반적으로 의미하지만, 사람의 자취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예컨대 발 그림자라는 말이 사람이 찾아가거나 찾아오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을 마무리는 나뭇잎 그림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뭇잎을 자연물의 표상적인 사물로 볼 때 나뭇잎 그림자자연 그림자이다. 이는 자연그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고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할 때 그림자의 말은 자연의 말, 인간의 말이다.

이 시 그림자의 말은 이번 시집에서 드물게 보게 되는 리얼리즘 시이다. 공원 산책로의 이야기, 베트남 외가에 가버린 은혜, 나와 은비, 순영이 할아버지와 종태 할머니, 뼈만 앙상한 준희 할머니, 동환이 할머니 등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인 그림자는 자연이며 사람이며 시인 자신이다. 자연과 시인을 등가치로 놓고, 시인은 시각을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외부세계로 돌린다. 그리고 자연 속의 자신과 타자를 하나로 인식한다. 그러다가 시인의 시각은 초월인 존재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시가 유다의 하늘에도 달이 뜬다이다.

 

깊숙한 밤이 시야를 가리면

붉은 십자가 허공을 밝힌다

지구 저편 발 달린 이야기를 싣고

구름을 뚫고 온 비행기가 이제 막

달과 십자가 직각의 지점에

의 발을 꺼내 다리를 놓는다

지상엔 지구 밖 언어들의 유희가

한바탕 전차바퀴처럼 구르다가

달의 정거장을 거쳐 화성에도 가고

뿔이 달린 소리들은 공중에서 떨어져

유다의 위선과 거짓의 십자가를 지고

파멸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달빛에 불기둥을 세운 십자가 아래서

베드로가 맨땅에 그물을 드리운다

죄의 무게에 눌려 진리에 굶주린

눈들이 그물코 사이에서 번쩍거린다

다 이루신 그분 디베라 바닷가에서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유다의 하늘에도 달이 뜬다전문

 

위의 시 유다의 하늘에도 달이 뜬다는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대로 성경 이야기를 차용해서 쓴 시다. 예수가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인 후 다시 나타난 곳은 갈릴리 북쪽의 디베라 바닷가이다. 여기에서 모습을 보인 것으로 예수가 부활했음을 다시 보여 주자 제자들은 믿게 된다.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불신을 각성케 하고, 믿음에 대한 회의를 불식시키게 된다.

이러한 성경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여 쓴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구 저편 발 달린 이야기를 싣고/ 구름을 뚫고 온 비행기가 이제 막/ 달과 십자가 직각의 지점에/ 의 발을 꺼내 다리를 놓는다에서의 의 발에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시행들 지상엔 지구 밖 언어들의 유희가/ 한바탕 전차바퀴처럼 구르다가에서의 지구 밖 언어. 이는 하늘의 언어다. 의 발은 허공을 밝히고, 유다의 위선과 거짓의 십자가를 지고/ 파멸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한다. 베드로의 그물코 사이에서 번쩍거리며, 죄의 무게에 눌려 진리에 굶주린/ 눈들에게 빛을 주는 말이다. 그 말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의 말이다.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이 시는 사랑이라는 언어를 종교의 신앙적 상상력으로 인식하는 시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종교적이란 이유로 거슬림이 없다.

시인으로서의 최연숙의 신앙이 기독교인지 그 여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상상력을 시에서 어떻게 승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신앙 고백적인 시라 하더라도 문학적 형상화에서 신앙적 요소를 어떻게 미학적으로 표현했는가가 그것이다. 유다의 하늘에도 달이 뜬다달빛에 불기둥을 세운 십자가 아래서/ 베드로가 맨땅에 그물을 드리운다에서 십자가’ ‘베드로그물이라는 기독교와 직접 관련된 시어들이 나오지만, 이 시가 미학적 측면에서, 타 종교인이라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은 달빛이라는 시어의 형상화 때문이다. 십자가 아래에서 불기둥을 세운 달빛은 성경 말씀을 은유하는 표현이다. 내가 과문해서인지는 몰라도 신앙고백적인 시 혹은 기독교 시에서 성경 말씀을 달빛으로 비유한 시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으로만 표현되고 그것은 곧 광명, 즉 햇빛을 의미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우리의 백제가요 정읍가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하늘의 신비로운 빛, 사랑이나 자비를 달빛으로 은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우리 문학의 제재전통을 계승한 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시 유다의 하늘에도 달이 뜬다에서, 맨 땅에 드리운 베드로의 그물은 성경 말씀인 사랑의 그물이며 말의 구원을 은유한 표상물이다. 이러한 은유구조는 선교적 국면을 뛰어 넘는다. 맨땅에 드리운 그물, 그것은 무엇인가를 낚는 그물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려하는 그물이다. 죄의 무게에 눌려 진리에 굶주린/ 을 가진 사람들이 그물코 사이에서 번쩍거린다는 다음 행의 표현으로 볼 때 그것을 알 수 있다.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사랑구원의 말이다. 그렇다. 시가 존재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는 사랑과 구원의 말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일 때문이다. 일각에서 문학 의 폐기처분 문제를 걱정하는 하이브리드시대에 있어서 시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그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라 큰 일일지도 모른다. 사랑구원이라는 모티프는. 그 큰 모티프를 최연숙 시인은 그림자의 말, 의 발을 꺼내 다리를 놓는다그리고 자신의 시 전체에 관통시킨다. 시라는 영혼의 세계를 통하여 독자들의 가슴에 향기를 전하는 일은 더없이 거룩한 일이다. 이번 시집 유다의 하늘에도 달이 뜬다는 진정한 구원의 메시지가 아닐까. 특히 독일의 현대시에서 간과할 수 없는 궤적을 남긴 비의적 서정시인인 파울 첼란의 시와 대비 연구의 시각으로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시집: 유다의 하늘에도 달이 뜬다 ]해설 전문

 

 

 

 

시집속 시 7편

 

 

 

 

 

겨울 억새

 

 

 

목 쉰 바람이 흰 길을 낸다

 

데 내쳐진 한 무리 노구老軀

앙상한 몸피가 구푸린 채 부싯돌처럼 맞대고 있다

 

마른 뼛가락 속으로 환청이 여음을 잇던 날

어느 봄 만개한 복사꽃낯을 꺼내 시린 손을 감싸본다

 

이 빠진 옥수수알 길을 들락거리는 기억의 발음기호,

간간이 실낱같은 오늘이 열리면

 

'나 집이 가 느이들하고 살면 안되것.....'

 

푸석거리는 머리칼 올올이 찬바람에 흩어지는 저물녘

허공에서도 흰머리 뭉치가 휘나리친다

 

발목까지 감고 있던 까끌한 수의가 전신에 휘감겨

삼켜버린 말 마디마디 타는 소리마저 차단된 공간

 

개울가에 옹송거리며 서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

 

가족도 온기도 외면한 초점 잃은 눈들이

인정人情에서 유리된 이름들이 하얀 걸음을 내딛고 있다.

 

 

 

 

 

 

 

 

 

 

풍금소리

 

 

 

바람의 모서리가 옆구리를 스치면

 

풍금, 풍금, 짧은 선율이 일었다

 

여선생 뒷머리에 앉은 청나비는

 

곡선의 리듬을 궁그려 음표를 날리고

 

흰장미 한 송이 창 안으로 고개를 디밀다

 

네모틀 안 부동의 자세로 걸렸다

 

서풍에 부풀린 입이 큰 가방에서

 

이국의 기호들이 풍금 위로 쏟아졌다

 

풍금과 애플주스, 영자와 모국어의 혼돈

 

가시와 비가시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음악실 여선생은 한 달째 결근이다

 

허연 서리를 뒤집어 쓴 장미대궁

 

창문이 바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어도 풍금소리 들리지 않았다

 

풍금이 끌고 나간 푸른 전설을

 

찌그러진 양은도시락을 껴안은 녹슨

 

난로가 보초를 서며 기다리고 있다

 

 

 

 

 

 

 

 

 

 

쓰나미

 

 

하이드의 검은 망또가 하늘을 절반이나 가려요

늪에 빠진 한 발을 친친 감아버리는 수초 

여자의 얼굴이 뭉크의 절규로 변해요 

세상의 대열에서 좌초되고 부서진 마음들이

그린란드 스마트섬 안으로 휘몰려가요

사람과 사람 사이 길을 지워버린 물너울은

이성을 차단시킨 월드 웹문을 열고 두 눈을 

꿀꺽 삼켰어요 암호를 대도 문 열리지 않아요 

고둥의 꼭지 안에서 카마이라를 닮은

기형의 무뇌충들 꿈틀꿈틀 자라는데요

로리콘 아바타를 키운 마왕의 

그로데스크한 탈춤이, 신라 천년 

욕망이 거세된 내시들의 혼령을 불러내요 

 잠에서 깨인 가슴이 해체된 로봇들이

갓 맺힌 꽃봉오리를 뿌리째 뽑아서 끌고 가요 

눈망울이 순한 황소 한 마리

문명의 반대쪽으로 우회전하네요.

 

 

로리콘: 어린 소녀에게 품는 비정상적인 성욕을 가리키는 '롤리타 컴플렉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롤리타(Lolita)의 제목에서 유래

 

 

 

 

 

 

 

 

 

 

매미 구케의원

 

 

밤낮으로 고마 시끄러죽겠는기라
저것들 고만 울면 그칠랑가 작작좀 하기라
고마 더 더버 죽겠다카이
지들은 세금 덜 낼라꼬 끔수 부렸다 안카나
월급재이가 봉이가?
둘째아 한숨이 늘어졌는기라
언제 짤릴지도 모르는동

방 두 칸으로 옮기긴 글렀다 안카나

쌔빠지게 일해도 그 타령 아닌가베
나야 좀 살다 죽으먼 되지만

즈그 식구들이 걱정이라
고마 지들 뽑아준 국민들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는기라

올여름 같은 더위는 첨이라카이

 

은행나무 그늘 아래  할머니

이마에 기러기 몇 마리 더 앉았다

 

 

 

 

 

 

 

 

 

그림자의 말

 

 

인적이 끊긴 공원 산책로

잔바람에 두런두런 잎손들

나누는 이야기를

나뭇잎 그림자가 들려준다

베트남 외가에 가버린 은혜가

몇 달째 산책로에 오지 않는다고

어디 간거냐고 

나와 은비에게 따지듯 묻는다

순영이 할아버지도 종태 할머니도

어김없이 지나며

자식들 안부며

퇴행성 관절염 치료를 받고 온 것이며

어제는 뼈만 앙상한 준희 할머니가

링거를 맞고 겨우 몇 발자욱 떼셨다고

언제 우리와 이별일지 걱정이라며

자식들은 어디에 있길래

코빼기도 안보이냐고

성토를 하다가

동환이 할머니도 슬그머니 일어나

혼자 사는 지하방으로 걸음을 옮기셨다고,

하루의 문을 닫아야 할 시간

바람의 추임새를 들으며

일상을 마무리는 나뭇잎 그림자

 

 

 

 

 

 

 

 

 

 

사이프러스 숲의 생각은 늘 푸르다

 

 

 

남은 한 잎마저 밟히다 이슥히 외딴 골목을 배회하고

침묵으로 흐르다 오지가 된 영혼은

거친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등 너머로 아득했어

젖은 마음이 기울어가는 방향으로 항시 그가 있었지

시청 앞 광장이었지 아마

천막 아래선 색깔이 다른 행사알림 글씨가 눈처럼 휘날리고

송이 눈 사이를 짙은 회갈색 코트 깃을 올리고 누군가 지나갔어

섬광처럼 스치며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공기 속 온 전류가 찌릿하게 온 몸을 통과했어

세상의 모든 책들 지식이란 이름으로 모여든 문고 앞

아마 좁은 골목 끝 한옥 집이었을 거야

마당에 두레박이 걸린 우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

한 영혼이 또 한 영혼을 만나 우주를 비행하게 된 시초

그 해 겨울 리비도에서 초자아까지 비문祕文을 적기도 했어

고흐가 없는 사이프러스 숲에서 또 한 번 길을 잃었을 때였지

어둑발 내린 사위 밤빛에 얼비친 나무그림자에 간담이 서늘해

눈에 장등이라도 켠 사나운 짐승이 나타날 기세였는데

어둠속에서 누가 내 손을 획 낚아채는 거였어

검은 손에 붙들린 채 수풀 속을 마구 내달렸지

위기일발의 순간에 나타난 건 바로 그였어

미성처럼 다가와 생명을 구원하는 용사와도 같이

마법에 걸린 정지 된 오랜 시간의 정거장을 건너와

생각의 숲에서 날마다 더 푸르러지는 상록수 같은 그

 

 

콩 타작

 

곡예하던 도리깨가 가을볕을 내리친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햇싸라기 속을

꼬투리를 탈출한 눈이 톡톡, 튀어 

마당가 수챗구멍으로 달아난다 

지난 봄, 종자 한 바가지 콕콕 찍어 삼킨 

산비둘기떼가 굴려온 

그득하게 쌓인 까만 눈알들  

아부지가 때리는 것은 그림자다

아부지와 아부지가 내리치는 그림자가

덕석에서 복사되어 장깡까지 늘어섰다

 

 

 

 

 

 

 

 

 

최연숙 시인

 

전남 영암 출생

2001. 한국크리스천문학수필부 당선.

2004. 문학마을시부 당선.

2006. 코스모스문예소설부 당선

시집기억의 울타리엔 경계가 없다, 유다의 하늘에도 달이 뜬다

수상 · 문예춘추 알베르 카뮈상 현대시 부문 최우수상 · 월간 한올문학시 부문 본상 · 경기예총회장 문학공로상 · 과천예총회장상, 과천시노인복지관 문예창작 강사.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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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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