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 홍계숙 시집『모과의 건축학』

한영제 기자 | 입력 : 2019/02/19 [07:42] | 조회수 : 536

 



 모과, 한 채의 집을 완성하기까지

 

임정일 (시인)

 

독일의 시인, 괴테는 나는 시를 만든 것이 아니다. 시가 나를 만든 것이다.”라고 했다. 시란 무엇이기에 자신을 만들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걸까? ()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때 쓰는 것 이다. 시는 누가 쓰라 해서 쓰고, 쓰지 말라 해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본심에서 우러나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심성을 타고나야 한다. 누구에게나 잠재된 재능이 있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을 발휘하고 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러저러한 이유와 현실적 환경은 갖고 있는 재능을 활짝 펼칠 기회를 놓치거나 잃어버리고, 재능이나 소질과는 전혀 무관한 방법으로 살아가도록 만든다. 홍계숙 시인 역시 소명처럼 타고난 시적 재능을 가슴에 담아둔 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문학적(文學的) 시혼(詩魂) 에스프리(Esprit)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가슴속에서 잠시 휴화산으로 쉬고 있던 시에 대한 욕망과 재능이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창작의 심지에 불을 붙여, 끓어오르는 용암으로 분화구에 뿜어내기 시작했으리라.

 

갈 길이 멀어서 행복합니다 그 길에서 꿈을 주울 수도 있으니까요

서두르지 않으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이미 반만큼 품은 뜻이니

저토록 푸르른 하늘과 이토록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가는 길

물길을 따라, 들길을 따라 나비를 쫓아서 맴을 돌다 돌아와 숲속 올레길을, 산허리 둘레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 중략

꿈인 줄 알고 주웠던 것이 발길에 차이는 한낱 돌멩이인들 내 꿈을 거기에 새겨 넣으면 그만이지요

별인 줄 알고 우러르던 것이 어두운 밤을 어지러이 날던 개똥벌레일지라도 내 꿈을 비추어 준 밝음이었음을

 

갈 길이 멀어도 조급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어차피 미완성이라고

천상으로부터 내리던 비가, 유년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쓸쓸히 피었다 지는 저 들꽃이 너무 바삐 가지 마라 전해 줍니다

길이 멀어서부분

 

홍계숙 시인의 시집 모과의 건축학은 크게 4부로 나눠져 있다. 각 부는 시인이 걸어온 변화의 발자취가 담긴 계단이라 해도 무방하다. 한 계단, 한 계단씩 시간의 간격을 두고 변화해가 는 시인의 시 세계를 함께 거닐며 동화(同化)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녀의 초기 작품으로 짐작되는 길이 멀어서는 시를 대하는 시인의 처음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갈 길이 멀어서, 그 길에서 꿈을 주울 수 있어서라고 말하는 시인은 급할 이유가 없다. 이미 시인에게 시는 행복이며 꿈이기 때문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 이미 반만큼 품은 뜻이니이렇듯 시인은 시작은 어눌하고 서툴지만 이미 시작했으니 굳이, 서두르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어차피 미완성이, 시인은 갈 길이 멀어도 조급히 서두르지 않고 물길을 따라, 들길을 따라 / 나비를 쫓아서 맴을 돌다 돌아와 / 숲속 올레길을, 산허리 둘레길을 / 천천히 걸어간다. 시인이 된 지금에도 변함없이 시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드러난다. 잠깐 시의 매력에 빠졌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얼떨결에 얻어 쓴 시인이라는 감투만 장식처럼 쓰고, 이곳저곳 문학 모임 자리에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때가 있다. 시 쓰기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이기려면 조급해서는 안 된다. 평생을 시와 함께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한철 피었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시인이 아닌, 자신의 꿈을 새긴 돌멩이()들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내일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시인의 변하지 않은 초심이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귀감(龜鑑)으로 다가온다.

당신에게 벽이 느껴질 때 그 벽 아래에 백화등 꽃씨를 심겠어요 흰 꽃 빛깔 고요히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벽을 향해 부딪는 바람결에 바람개비 하얀 꽃잎 향기라도 은은하게 퍼지면 벽의 등만 가만히 쓸어 줄래요

벽을 위하여부분

 

보통은 벽창호 같은 사람을 만나면 피하거나 무시한다. 그도 안 되면 철저히 외면한다. 가급적 부딪치지 않아야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채득(採得)했기 때문이다. 벽을 위하여는 평소 사람을 대하는 시인의 심성(心性)이 잘 드러나 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마주하면 외면하거나 허물려 하 지 않고 두터운 상처로 생겼을 당신의 벽에 기대어 토닥이며, 마음의 벽을 허물 꽃씨를 심는 시인의 따듯한 심성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우리는 간혹 시답지 않은 넋두리를 시()라 바득바득 우기 며 어찌어찌하여 얻어 쓴 시인 감투를 으스대며 뽐내는 자칭 시인을 만날 때가 있다. 이때는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上策)이다. 또는, 시는 좋은데 심성은 좋지 않은 시인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런 시인을 만나면, 그가 쓴 시에서 느꼈던 감흥은 사라지고 평소 시인에 대해 존중(尊重)했던 마음마저 사라지고 만다. 내가 만나 본 홍계숙 시인은 시도 좋지만 심성은 더 따듯한 시인이다.

시인과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쯤 양 갈래로 짧게 묶은 소녀의 외모만큼 통통 튀는 시를 몇 편 읽고 나서 부터로 기억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우연한 기회에 그녀와 만나 시에 대해 진중한 대화를 나눌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때 나는 긍정적 사고와 넓은 포용력의 바다 같은 그녀의 심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편견 없이 열려 있는 시적(詩的) 호기심과 자신이 서 있는 위치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짙은 안개 속에서도 시 세계로 향하는 입구를 찾아 헤매고 있는 지독하고 간절한 열망(熱望)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시가 어디, 열망하거나 갈망(渴望)한다 하여 쉽게 얻어지는 것인가. 시는 열려 있는 마음에서부터 출발 한다. 거름도 되지 못하는 자기 고백적 낙서임에도 자기 딴에는 수백 편을 쓴 시인이라고 자기도취(自己陶醉) 되어 두 귀를 닫아 버리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에게 시의 문()은 요원(遙遠)하다. 좋은 토양이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 그동안 내가 보아온 홍 시인은 두 귀를 열어 채찍을 밑거름으로 삼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그녀는 학구적(學究的) 자세로 시에 대해 궁금한 것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기어이 알아내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스펀지 같은 흡수력 강한 시인이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좋은 땅은 물이 고이지 않는다. 홍 시인이 그렇다.

 

첫 꽃잎에

 

당신 손을 잡는 순간 솜털 끝으로 뿌리까지 찌릿찌릿 전류가 흘러

 

풀잎 마디마디

 

푸른 알전구 환하게 불이 켜지고 세상이 일제히 눈을 떴다

 

풀꽃 위로 바람 분 날

첫사랑전문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가? C.D. 루이스는 시 는 그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며, 시를 쓴다거나 감상한다는 것 은 유쾌한 경험이다.”라고 말했다. 시를 읽고 쓰는 그 자체가 유쾌한 경험인 것이다. 홍 시인의 시는 꽃을 소재로 한 시들이 많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심성이 나쁜 사람 못 봤다.’는 뻔한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사랑을 사랑이라 쓰지 않고 꽃이라 썼을 때 비로소 시가 된다.”라는 시의 기본에 대한 말을 하고자 함이다. 그 기본에 충실한 그녀의 초기 작품인 첫사랑은 그녀 가 오매불망(寤寐不忘) 사랑하고 있는 시에 대한 사랑 고백이다. 어렵지 않은 문장으로 독자(讀者)의 눈높이에서 쓴 첫사랑은 그 첫사랑의 대상을 시가 아닌 사랑이어도 나쁘지 않다.

퇴근길 전철 안, 북소리가 몰고 온 구름이 빽빽하다 종착지가 구름을 흩어놓을 때까지 선점한 자리의 무릎 위에서 두 손으로 감싸 쥔 세상이 둥둥거린다 수정체 위에 복사되는 네 각의 감정들이 자음과 모음을 팽팽히 당긴다 튕겨지는 북의 음성, 손바닥 북새통 안에서 성난 문장들이 철썩인다 거짓과 겨루는 종이 갑옷의 반딧불이들 숫자는 광장을 읽는다 동공 깊숙이 스며든 액정 속 세상을 향해 엄지와 검지 채로 두드리는 허허로운 외침 덜컹이며 선로를 내달리는 묵직한 철제북채 몇 냥, 새떼의 줄에 이끌려 어둠이 지상으로 날아오른다 액정 밑, 저녁의 체온이 달아오른다 보이는 것의 뒷면이 보이지 않는 것의 정면과 부딪치면 잠든 깃발이 바람을 깨운다

네모난 북소리전문

 

현대인에게 핸드폰이 필수 품목이 된 지는 한참 됐다. 핸드폰 은 단순한 일대일 통화(通話)의 영역(領域)에서 벗어나 오래 기 억하고 싶은 것들을 이미지로 저장해두는 공간,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과 소통하는 커다란 광장(廣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W.워즈워드는 시란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 속에서 이끌어 내는 정서에 그 바탕을 둔다.”고 했다. 또한 시는 무엇을 사실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더욱 리얼하게 느껴지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T.S 엘리엇은 일렀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서정적 과거로 회귀(回歸)는 추억을 회상(回想)하여 다시금 자신 을 뒤돌아보게 하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한다. 그러나 폭넓은 공감대(共感帶)를 형성(形成)하기엔 시대를 공유(共有)하는 폭이 좁다. 시 속에 시대정신(時代精神)을 담고 현재를 이야기할 때 독자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으며 이럴 때 소통의 폭은 더 넓고 깊게 퍼져나간다. 사람들 손에 하나씩은 들려져 있어 낯설 지 않은 소재인 핸드폰은 시대를 관통하는 변화의 강력한 무기다. 그녀의 북소리는 핸드폰을 북삼아 유랑하고 있는 디지털 유목민들에게 살포시 다가와 크게 울림을 주고 있다. 지면 부족으로 언급하진 못했지만, 디지털 유목민스마트폰네모난 북소리와는 다른 시각(視覺)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수작(秀作)이라 하겠다.

그녀는 대장장이다

누군가 대장간을 본 적 있냐고 물었을 때 밤하늘에 떠 있는 십자가를 떠올렸다

모두들 도시에서 대장간은 사라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날선 새벽을 딛고

날마다 대장간으로 들어선다

어둠에 잠긴 한 자루 화덕에 불을 지피고 모루 위에 무릎을 꿇고 녹슨 가슴을 내려놓는다

순간 화덕에 불꽃은 타오르고 벌겋게 달아오른 절망을 담금질한다 날을 갈고 두들기기를 수차례, 기도는 무쇠처럼 단단해진다

그녀가 침묵을 두드려 하늘의 문을 여는 시간은 대장장이가 쇠를 연마하는 시간,

불이 시들기 전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 대장간에 건목은 없다

천 도의 불길을 견디고 피어난 아침이 환하다

도시의 대장간전문

 

인류가 처음 시를 읊기 시작한 것도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그 소리를 입 밖으로 내기 시작한 것이었으니,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시의 생명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다. 헨리 데이비드소로(철학자, 문필가)“‘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야 진정한 의 존재 가치가 빛난다.”고 했 다. 시인은 자신이 화자(話者)가 되어 독자들에게 사유를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창작자다. 도시의 대장간에서 화자는 도시에서 사라진 대장간의 대장장이를 자처하며 날선 새벽을 딛고 날마다 식어들지 않는 그녀의 화덕에 불을 지피어 발화점을 기다리는 에스프리를 담금질한다. ‘침묵을 두드려 하늘의 문을 여는 시간은 온전히 그녀의 시간이다. ‘불이 시들기 전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그녀에게 건목이란 있을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첫 새벽과 마주하며 벌겋게 달아오른 절망을 담금질했을까? 언어의 뿌리는 사유에 있고 사유는 체험의 너른 땅에서 자란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견제, 연륜에 비유되는 체험에서 얻어진 사유가 차곡차곡 쌓여 더는 가슴에 담아두기 힘들 때 비로소 시로 승화 되어 활화산처럼 세상 밖으로 분출되는 것이다. 그녀가 날마다 첫새벽에 대장간으로 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봄이 푸른 모닥불을 지피면 잎새 사이 타닥타닥 피어나는 분홍 꽃잎들 이때쯤 나무는 허공의 각도를 측량하고 집짓기를 서두른다 설계 도면을 펼쳐 시작되는 공사 봄이 낙화한 자리에 풋열매로 주춧돌을 놓고 나뭇가지 사이사이 창을 내고 따가운 햇살을 넉넉히 들여놓는다 천둥과 비바람의 외장재, 속으로 삭힌 시고 떫은 시간들과 기나긴 장마를 말려 빚은 내장재로 둥근 집을 완성하는 모과나무 건축가 가장 먼저인 것은 내부의 견고함이다 내벽에 조밀한 향기를 바를 때쯤 건축감리사인 가을이 다녀간다

예리한 눈길을 통과한 둥근 집 꼿꼿이 받아낸 고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노란 벽에 배어난 땀방울 진득하다 계절의 모닥불이 사위어가면 찬바람이 바삐 가지를 드나들고 모과는 집 한 채 완성하고 쿵, 나무를 떠나간다

모과의 건축학전문

 

위의 시는 홍계숙 시인의 시와반시등단작인 모과의 건축학전문이다. 독자로서 시인의 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시인의 내밀(內密)한 내면적 세계라든지 일상생활 속에서 얻어진 다양한 현실 그리고 가족 사랑에 대한 소박한 단면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홍계숙 시인의 시 세계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따듯한 심성에서 나오는 서정적 관조(觀 照)에 있다. 시에 드러나는 서정적 관조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에서부터 사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적 스펙트럼(spectrum) 으로 사물과 인간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 또한, 시인의 언어는 남과 다른 시각으로 사물과 현상을 사유하여 유행에 영합 하지 않고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새로운 시각으로 관조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창작 행위를 벗어나 삶을 바라보는 성숙된 의식을 바탕으로 승화된 결과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서정적 관조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인은 단순한 사물의 움직임 을 사유(思惟)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물이 전하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 그녀는 변화(變化)에 능하다. 익숙함에 안주(安住)하지 않고 변태(變態)되는 그녀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녀의 힘은 융통성 있게 쉼 없이 변화하는 카멜레온 (chameleon)적 기질과 타고난 시적 감각 그리고 빠른 적응력(適應 力)에 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 시인의 변화(變化)는 모과나무가 시고 떫은 시간들과 / 기나긴 장마를 견디어냈듯, 자신과의 싸움에서 변곡점(變曲點)이 될 집 한 채를 완성해 냈다. 등단은 완성이 아닌 시작이다. 에스프리의 끈을 바짝 움켜쥐고 있는 시인의 변화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새벽마다 대장간으로 스며들어 화덕에 불을 지피어 무른 쇠를 두드리고 담금질하여 단단한 무쇠로 연금하는 대장장이, 홍계숙 시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말없이 수행하고 있다, 이름 이 알려지지 않아도, 읽어주는 이 없어도, 가슴속에 쏟아내지 못 한 이야기가 가득해 배설하지 않으면 살아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천형(天刑)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묵묵히 천형을 수행하고 있는 시인. 그렇다. 그의 힘은 기다림에 있다. 때를 알고 기다릴 줄 아는 그녀이기에 시를 쓰는 고통의 시간조차 마냥 행복한 시간일 것이다. 현재에 만족하거나 머물지 않고 늘 변화를 모색하는 시인의 다음 시편(詩篇)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맑디맑은 영혼을 가진 심안으로 창작 활동을 해오던 홍계숙 시인이 그동안 틈틈이 써 놓았던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모과의 건축학이라는 이름으로 상재한다. 시집의 편, 편마다 사랑과 인생이 함께 여울져 강물처럼 흐르고, 삶과 고통이 질곡을 이룬다. 따듯한 심성으로 낮은 자세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시인이기에 그녀의 도전은 분명 큰 결실을 얻으리라. 시집 상재를 축하한다.

 

 

시집 속 시 7편

 

 

 

길이 멀어서

 

 

갈 길이 멀어서 행복합니다

그 길에서 꿈을 주울 수도 있으니까요

 

서두르지 않으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이미 반만큼 품은 뜻이니

 

저토록 푸르른 하늘과

이토록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가는 길

 

물길을 따라, 들길을 따라

나비를 쫓아서 맴을 돌다 돌아와

숲속 올레길을, 산허리 둘레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갈 길이 멀어서 다행입니다

그 길에서 별을 만나

함께 갈 수 있으니까요

 

바람에 떠밀려 달리다가

비를 맞으며 고개 숙여 걷다가

이따금 온 길을 되돌아봐도

괜찮겠습니다

 

꿈인 줄 알고 주웠던 것이

발길에 차이는 한낱 돌멩이인들

내 꿈을 거기에 새겨 넣으면 그만이지요

 

별인 줄 알고 우러르던 것이

어두운 밤을 어지러이 날던 개똥벌레일지라도

내 꿈을 비추어 준 밝음이었음을

 

갈 길이 멀어도 조급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어차피 미완성이라고

 

천상으로부터 내리던 비가, 유년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쓸쓸히 피었다 지는 저 들꽃이

너무 바삐 가지 마라 전해 줍니다 

 

 

 

 

 

 

 

벽을 위하여

 

 

당신에게서 벽을 느낄 때

나는 그것을 허물려고

하지 않겠어요

틈 날 때마다 한 번씩

그 벽을 찾아가 기대어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길래요

단단한 그 어딘가에

틈이라도 찾을 생각 추호도 없어요

벽 너머의 소리를

엿들으려고도 하지 않겠어요

 

당신에게서 벽이 느껴질 때

나는 그 벽 아래에

백화등 꽃씨를 심겠어요

흰 꽃 빛깔 고요히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벽을 향해 부딪는 바람결에

바람개비 하얀 꽃잎 향기라도

은은하게 퍼지면

벽의 등만 가만히 쓸어 줄래요

 

당신의 벽도

당신의 두터운 상처일까 봐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꽃의 뿌리만 꼭꼭 눌러주고 올래요

 

 

 

 

 

 

 

 

첫사랑

 

 

첫 꽃잎에

 

당신 손을 잡는 순간

솜털 끝으로

뿌리까지 찌릿찌릿 전류가 흘러

 

풀잎 마디마디

 

푸른 알전구 환하게 불이 켜지고

세상이 일제히 눈을 떴다

 

풀꽃 위로 바람 분 날

 

 

 

 

 

 

 

 

 

네모난 북소리

 

 

퇴근길 전철 안,

북소리가 몰고 온 구름이 빽빽하다

종착지가 구름을 흩어놓을 때까지

선점한 자리의 무릎 위에서

두 손으로 감싸 쥔 세상이 둥둥거린다

수정체 위에 복사되는 네 각의 감정들이

자음과 모음을 팽팽히 당긴다

튕겨지는 북의 음성,

손바닥 북새통 안에서 성난 문장들이 철썩인다

거짓과 겨루는 종이 갑옷의 반딧불이들

숫자는 광장을 읽는다

동공 깊숙이 스며든 액정 속 세상을 향해

엄지와 검지 채로 두드리는 허허로운 외침

덜컹이며 선로를 내달리는

묵직한 철제북채 몇 냥, 새떼의 줄에 이끌려

어둠이 지상으로 날아오른다

액정 밑, 저녁의 체온이 달아오른다

보이는 것의 뒷면이

보이지 않는 것의 정면과 부딪치면

잠든 깃발이 바람을 깨운다

 

 

 

 

 

 

 

 

디지털 유목민

 

 

그들의 고향은 빛,

주소지는 바람 속이다

 

광활한 대지의 전원을 켜면 아득히 뻗치는 빛,

그 위를 달리는 속도의 숭배자들

변화는 강력한 무기다

 

달려드는 빛 온몸으로 받아내며

뛰어든 제로섬 게임의 땅

 

적의 꿈으로 바람의 방정식을 만들어

살아남은 자만이 바람이 된다

 

유목과 정주 사이 돛과 닻의 거리는 짧다

뿌리와 날개를 깃발로 펄럭이며

눈과 귀를 바람에 접속한다

 

가진 자는 여가를 위해,

주린 자는 사냥을 위해 부유하는 바다

고이면 썩고, 흐르면 쌓이지 않는다

 

송이송이 낭만 유저들

꿈의 해상도를 한껏 높이지만

 

딸깍,

전원을 끄면 초원은 사라진다

 

 

 

 

 

 

 

 

 

 

도시의 대장간

 

 

그녀는 대장장이다

 

누군가 대장간을 본 적 있냐고 물었을 때

밤하늘에 떠 있는 십자가를 떠올렸다

 

모두들 도시에서 대장간은 사라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날선 새벽을 딛고

날마다 대장간으로 들어선다

 

어둠에 잠긴 한 자루 화덕에 불을 지피고

모루 위에 무릎을 꿇고 녹슨 가슴을 내려놓는다

 

순간 화덕에 불꽃은 타오르고

벌겋게 달아오른 절망을 담금질한다

날을 갈고 두들기기를 수차례, 기도는 무쇠처럼

단단해진다

 

그녀가 침묵을 두드려 하늘의 문을 여는 시간은

대장장이가 쇠를 연마하는 시간,

 

불이 시들기 전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

대장간에 건목은 없다

 

천도의 불길을 견디고 피어난 아침이 환하다

 

 

 

 

 

 

 

 

 

 

모과의 건축학

 

 

봄이 푸른 모닥불을 지피면

잎새 사이 타닥타닥 피어나는 분홍꽃잎들

이때쯤 나무는 허공의 각도를 측량하고

집짓기를 서두른다

설계도면을 펼쳐 시작되는 공사

봄이 낙화한 자리에 풋 열매로 주춧돌을 놓고

나뭇가지 사이사이 창을 내고

따가운 햇살을 넉넉히 들여놓는다

천둥과 비바람의 외장재,

속으로 삭힌 시고 떫은 시간들과

기나긴 장마를 말려 빚은 내장재로

둥근 집을 완성하는 모과나무 건축가

가장 먼저인 것은 내부의 견고함이다

내벽에 조밀한 향기를 바를 때쯤

건축감리사인 가을이 다녀간다

예리한 눈길을 통과한 둥근 집

꼿꼿이 받아낸 고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노란 벽에 배어난 땀방울 진득하다

계절의 모닥불이 사위어가면

찬바람이 바삐 가지를 드나들고

모과는 집 한 채 완성하고

, 나무를 떠나간다 

 

 

 

 

 

 

 

홍계숙 시인
ㆍ강원 삼척 출생, 경기 일산 거주

2017시와 반시등단

시집 모과의 건축학(책나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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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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