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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고백 / 강재남 시인

한영제 기자 | 입력 : 2019/02/20 [08:04] | 조회수 : 1,137

 

표류하는 고백

 

 

 

저녁이 늦게 와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고 저녁이 늦게 와서 저녁 곁에서 훌쩍 커버릴 것 같았다 담장에 기댄 해바라기는 비밀스러웠다 입술을 깨물어도 터져 나오는 씨앗의 저녁, 해바라기의 말을 삼킨 나는 담장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물기 없이 늙고 싶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내 말은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이 무거웠다 생의 촉수는 무거운 침묵으로 뿌리 내리고 내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등을 쓸어안아야 했다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눈동자에서 글썽이는 걸 알았다면 어떤 죄책감도 담아두지 마라 할 걸, 말이 말이 아닌 게 되어 돌아왔을 때 여전히 침묵하지 마라 할 걸, 저녁은 저녁에게 총구를 겨누고 저녁의 총구에서 검은 꽃이 핀다는 걸 저녁이 늦게 와서 알지 못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놀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은하를 건너간 젊었던 아버지 등을 떠올렸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나비가 만든 지문을 해독할 수 없었다 핏줄 불거진 손가락에서 누설되지 않은 어둠을 끝내 당기지 못했다

 

 

 

 

 

 

시작메모

 

많은 날을 속절없이 보내고,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아서 좋은 날이다. 어제는 아버지 제사상에 절을 하고 술잔 대신 커피를 올리고, 정말 아무렇지 않아서 좋은 날이다. 아침이 올 때까지 불면인줄 모르고 볕살이 좀 더 퍼지기를 기다리다가, 그대로 저녁이어도 좋을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 사이 몇 번의 계절이 지났다. 매번 다른 표정으로 다녀가는 시간이 나를 위로한다. 나는 지금 슬픈 겁니까? 눈물이 가슴까지 차오를 때는 나는 내가 아니기를 거부한다. 덜 슬퍼서 눈물이 난다는 걸, 누구에게 들었다거나 어느 책에서 봤다거나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나를 내 가족은 독한 딸이라고 책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흘을 병실에서 죽은 듯 깨어나지 못한 나를 뜨겁게 안아주던 엄마. 얼마큼의 시간이 흘러야 아무렇지 않아 좋은 날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아서 좋은 날을 건너고 있다. 그래야 하니까. 꼭 그래야 한다고 아버지가 말했으니까.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싼다. 따뜻한 온기가 심장을 데운다. 진하고 고소한 커피향 기별이 저승까지 당도했겠다.

 

 

 

 

 

 

강재남 시인

경남 통영에서 출생

2010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이상하고 아름다운(서정시학, 2017)이 있음

2017년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 2017년 한국문화예술유망작가창작지원금 수혜

6회 한국동서문학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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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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