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갑사 바람꽃 / 류병구 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5/09 [21:22] | 조회수 : 645

 

 

▲     © 시인뉴스 Poem



무갑사 바람꽃

 

류병구

 

 

 

무갑사 뒷 골짝,

 

그늘볕을 쬐던 어린 꽃

가는 바람 지나가자

여린 목을 연신 꾸벅댄다

 

전등선원 동명스님은

깜박 졸음도 수행이라 했다

 

꽃도

절밥을 하도 먹어

그 정도는 알아 듣는다

 

요새

무갑산엔

허물 벗은 봄이 바람이고

바람이 꽃이다

 

    

 

경칩 이후

   

 

겨울이 흰 수건을 던졌다

 

TV도 끄고 내처 잤는데도

밤이 남았다

가용 포인트로 바꿔 쟁여두고

스르르 낮잠 들 때 빼다 쓸 요량이다

경칩날 꼭두새벽,

이르게 몸을 푼 서귀포 백목련이

밤새 달려온 조간신문 갈피에서

선잠으로 뒤척인다

 

기혈의 흐름이 심상찮은 사이

덜컥 불거진 꽃망울들

 

봄비가 내린다

살얼음 박힌 봄을 쪼개며 녹아 흐른다

경칩맞이 산개구리들이

삼월의 칠부능선을 서둘러 넘어간다

 

 

    

 

쇠꽃이 필 때

 

      

허름한 임종이었다

 

곡기를 놓자 장기까지 죄 적출 당한

폐차들의 집단 묘원

삼우제도 다 지나고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소임 다하고 웅크린 위태로운 능선

주검으로 겹쌓은 비장한 철산은

되레 농도의 고름새가 살아 있는 패턴

질감과 형형 색감이 장악한

죽어서 되 핀 쇠꽃 동산이었구나

 

물큰한 쇳내가 자욱한 유택

 

참새들이

짓눌린 더미 위에 앉아

꿈틀대는 적막을 쪼고 있다

 

      

 

하지감자꽃

 

      

육법전서에도 없는

꽃모가지 끊는 천형

진한 보랏 눈물

···

 

죄목도 모르는 못다핀 꽃들에게

판관은 알듯말듯한 경전 한 구절을 들이민다

 

살신성인

 

한 입 꽉 찬 감자톨이 증거로 제시 되고

토실한 벌거숭이들도 주렁주렁 매달린 채

2증거물로 채택되었다

 

기꺼이 잘리우는 순명

죽어야 불끈 솟는 씨톨

 

해가 뉘엿해진 경포가

아린 바닷바람을 대관령 쪽으로

연신 밀어 올린다

 

 

      

애기사과나무 분재

 

 

무슨 죄를 얻었는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다

 

다 큰 것 데려다가 철사로 결박한 채

주리를 틀어대던 남정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아렴풋 스쳐갔을 뿐

 

생살 파열하는 아픔에도

통성痛聲할 기력도 없었다

 

골수에 맺힌 통한 다 묻어버리고

가슴 풀어젖힌 채

고분고분 체념한지도 오래···

 

설늙은이 그럭저럭

비석팔자로 살다 마는 건데

 

그래도

삼신할미가 애처롭게 여겨

염소똥 같은 새끼들을

올망졸망 달아 주었다

 

후터분한 바람 맞으며

저들끼리 한여름을 깨문다

 

비석팔자 : 생전에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아내 묘비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북촌에서

 

 

 

맑은 개천 웃동네

ㅁ자 한옥마을

 

궁한 샌님들 남촌 보다

꽤 대궐인 줄 알았더니

 

옹색한 여염집 안방에

콩댐 비릿한 장판내가 물큰하고

 

막사발 엎어

초배바닥 수도 없이 문지르던

젊었을 적 어머니를 거기서 뵈었더라

 

완자 문살 미닫이,

 

당신 입에다 물 불룩하게 담아

~ 푸 뿜어 팽팽해진 문창호지...

 

그 속에

손수 말려 깔았던 단풍잎 서너 이파리에

문뜩 가슴이 저리더라

 

조막만한 아랫뜰에

채송화, 백일홍이 한창인데

 

맞배지붕 날렵한 곡선 휘감아

백악 산줄기 저 쪽

서촌으로 번지는 노을도

 

그 꽃빛이더라

 

 

곰배령 각시붓꽃

 

 

 

단옷날 며칠 뒤였지

아마,

 

곰배령 새각시가

자줏기 도는 배를 내놓고

아침 햇살을 쬐고 있더라고

 

홑고쟁이 비집고 얼비치는

조마조마한 아랫살

 

눈을 돌리고

불온한 맘을 감추고

 

코 쓱 비비며

길게 질러보는 헛기침에

점봉산 들꽃들이 자지러지더라고

 

 

      

 

입동 무렵

문방사우 상봉기

 

 

 

상강도 지난

어중간한 늦가을

 

숫먹물듬뿍 묻힌

누런 족제비가

진다리필방에서 들여온 화선지에

수묵 산수를 친다

민가슴 살짝 파인 남포벼루,

쭈볏이 코를 쏘는 태화먹 향내 맡은

토끼, 다람쥐, 염소들이

먹똥 반꼬집**씩 개평을 떼어 간다

 

화제는

어약조비魚躍鳥飛

 

적성강 새벽 은어가 물안개를 걷어차고

옥정호 쌍기러기 높은 하늘을 가른다

 

들어 올린 낚시 어망 속

씨알 굵은 가을이

그물코에 걸려 파닥인다

 

 

 

 

숫먹 : 송연묵의 다른 이름.

**꼬집 : 엄지와 검지로 집어 올린 조금의 최소 단위.

 

 

 

 

 

시룻번 떨어지듯

 

 

언덕배기 오름길이

좀 되다고 생각했다

오래잖아 사라질 달맞이 벽화마을

 

진 빠진 늦담쟁이가

고샅바람 한자락에 쓸려

담벼락을 붙들고 가쁜 숨을 쉰다

쇠대문 삐거덕 소리에 놀라

쪽마당서 졸던 괭이 입에

혓바늘이 돋았다

 

퍽 오랜 정분을

포개 묻은 밤골

 

철거’‘

멋대로 갈긴 스프레이 붉은 칠은

다 해진 적막을 지키는 부적들

 

떡시루 시룻번 떨어지듯

포클레인 굉음에

떨리는 고압 물줄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서럽게 부서졌다

 

늙은 가지에 매달린 긴장한 홍시도

물땀을 흘린다

 

꽃술에 곤드라진 얼룩나비에 채 잡혀

밤골상회 언저리서 반나절을 탕진한

양녕로 34

 

 

 

 

 

뜨거운 발원

화엄사 홍매화 앞에서

   

 

이른 아침부터 경내가 어지러웠다

겨우내 홀쳐맸던 소캐옷

부처님 앞에서 훌훌 말아던진

홍매화 보살

자홍 적삼 속, 접힌 가슴이 아슬하다

계율도 감내 못하는 빛깔 부신 춤사위

뒷산 자락이 눈을 비비고

각황전에 매달린 풍경도 소리를 고른다

 

이맘때면 어김 없이 도지는 저 당찬 발원

지리산 봄이 이 보살을 보러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약력

 

류병구

 

충북 청주 출생

한국외국어대와 성균관대에서

불문학과 유교철학 전공. 철학박사

전 가천대 교수

<월간문학> 시부문 등단

시집달빛 한 줌』『쇠꽃이 필 때』『낮은 음역의 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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