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 최영규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5/12 [21:11] | 조회수 : 530

 

▲     © 시인뉴스 Poem



 

부의

 

봉투를 꺼내어
부의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ㅡ 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 움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라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 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 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어머니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 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를 오른다.

 

매일같이 내 속에는 자꾸 산이 생긴다
오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금세 산이 또 하나 쑥 솟아 오른다

 

내 안은 그런 산으로 꽉 차 있다
갈곳산, 육백산, 깃대배기봉, 만월산, 운수봉
그래서 내 안은 비좁다
비좁아져 버린 나를 위해 산을 오른다
나를 오른다
간간이 붙어 있는 표식기를 찾아가며
나의 복숭아 뼈에서
터져나갈 것 같은 장딴지를 거쳐 무릎뼈로


무릎뼈에서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
그리고 어렵게 등뼈를 타고 올라 나의 영혼까지
더 높고 거친 산을 오르고 나면
내 안의 산들은
하나씩 둘씩 작아지며 무너져 버린다
이제 나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다
나를 비울 수 있다.

 

 

 

      

 

아침에게


매일새벽 나의 차는 강물에 실려 달린다
시속 100킬로미터의 급류로 달리기도 하고
정체된 길목에선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강과 강이 만나는 양수리 정류장에서는
눈부신 아침노을을 태우기도 하고
솜덩이처럼 하얗게 뭉쳐있는 물안개를 태우기도 한다
강의 새벽이 가득 실려있는 나의 차는
갈대밭 사이를 가볍게 날아오르는 물새처럼
힘차게 달린다 창문의 틈새를 지나가는
강바람 소리가 새소리보다도 가볍다
창을 활짝 열어버린다 뒷자석에 타고있던 물안개가
차창을 빠져나간다 안개가 빠져나가고 나면
나의 차 안은 붉은 햇살로 가득 찬다
강물이 다시 소용돌이친다
그제서야 나의 차는 용진나루에 아침 햇살을
내려놓는다.

 

 

 

 

      

카주라호에서 눈동자 없는 사내를 만났다

 안데스 29

   1.
   파열이 만든 깊은 간극
   피켈로 얼은 눈을 찍어 저만치 던져본다
   깊은 메아리로 답을 하는 크레바스* , 되돌아온
   두려운 눈빛의 시간
   돌아오지 못한 향기의 시간
 
   장딴지를 툭 건드리는 장님의 작대기
   백년은 넘었을 침목들이 버티고 있는 카주라호**
   건너편 플랫폼
 
   그곳에 그을린 석상처럼 서서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열차, 창에는
   세상에, 감옥처럼 창살이 있다
   그 안쪽 컴컴한 틈새로 빠졌던 시선
   돌아오는 길을 잃고 말았다
 
   눈동자가 없는 눈
   그와 나는 불편한 자리로 마주섰다, 크레바스,
 
   당신은 나를 볼 수 없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
 
   2.
   우리는 지금을 이때였어!”라고 하자
   시간은 눈빛이거나 소리였을까
   생각의 흔적마저 지워가는 것
 
   냄새로 돌아오지 않는 향기
   아름다움은 처음부터 사내 것이 아니었다.
 
   3.
   푸른 구름이 떠내려 와 해를 가린다
   기온이 뚝 떨어진다
   춥다
   누가, 검은 눈동자를 건너는 것일까
 
   지도에도 없는 크레바스
   살아서는 건널 수 없는
   누구나 죽어서야 다시 살아나는, 살아난다.
     

     
   *크레바스(crevasse):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위험한 틈.
   *카주라호역(Khajuraho Railway Station): 뉴델리에서 남동쪽으로 620km 정도 떨어진 인도 중부의 유서 깊은 도시의 철도역.



    

 

 

바람이 되어 그 소리가 되어

  안데스 30




새벽까지도 바람은 텐트를 잡아 흔든다. 정신에 섬뜩 불이 켜지고, 밤새 어둠을 밟고 온 새벽은 칼날처럼 선연하다.
 
고요한 함성, 명치끝 어디쯤에 뭉쳐 있던 불꽃인가. 저기, 라마제* 때 걸은 불경(佛經) 빼곡히 적은 깃발들의 끝자락에 매달려 바람은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렇게 온몸을 뒤척이던 바람은 나를 흔들어 세우고 낭파라를, 갸브락 빙하를, 끝없는 티베트의 설원을 간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여기 이 땅의 끝 초오유*의 정상 너머로까지 뜨거운 갈기를 세운다.
 
, 거대한 빙하와 속을 알 수 없는 높고 거친 설산들. 그들 앞에 팽개쳐진 듯 나는 혼자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러나 가고 싶은 그곳으로 바람이 되어, 그 바람의 소리가 되어.



*라마제: 일반적으로 원정대들이 등반의 성공과 무사귀환을 산신에게 기원하는 전통적인 티베트의 불교의식이다.
초오유(Cho Oyu):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 중 6번째의 높이를 갖고 있는 봉우리(8,201m)로 에베레스트(Everest 8,848m)로부터 북서쪽으로 2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Cho)신성 또는 정령이란 뜻이고, (O)는 여성의 어미(語尾), ‘초오女神이란 뜻이 되며, (Yu)는 터키옥() 즉 보석을 뜻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초오유를 터키옥의 여신을 뜻한다고 말하지만, ‘신의 머리’ ‘강력한 ()머리’ ‘강한 통치자’ ‘큰 산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서티베트 지역의 라마승들은 거대한 머리를 뜻한다고 얘기한다.



 

  

해빙(解氷)

 안데스 31



판대빙폭*
혹한(酷寒)을 잡아들고
봄비 속으로 사라진다.
 
몸마저 풀어, 찢어지면서
아랑곳없는 깊이
제 얼굴 강바닥으로 떨구며
겨울을 떠나고 있다.
 
먹먹한 빗발 속에서 격막에 갇혀
몸을 여는 저 굉음의 밖,
우리가 찬 손등을 포갤 때
그것은
투명했던 시간의 심장이
천둥 같은 음악으로 되돌아오는,
처음 그때로 돌아가는
마지막
한 판 춤,
 

, 눈부셨던 경직(硬直). 
     
 

    

 

 

살아서 건널 수 없는

 

푸른 구름이 떠내려 와 해를 가린다

기온이 뚝 떨어진다

춥다

 

누가, 검은 눈동자를 건너는 것일까

 

지도에도 없는

크레바스

 

살아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누구나 죽어서야 다시 살아나는

 

 

 

      

 

미리 온 봄볕

 

시퍼런 칼날의 끝

 

찌르듯 마주친

 

, 새순

 

땅을

 

뚫고 올라오는

 

하늘의 계시

 

 

      

 

 

잡초

 

한 움큼

흙을 집어 들었다

흙이 아니었다

한 움큼의 씨앗이었다

생명이었다

 

장맛비가 그치자

텃밭의

원래 주인이

찾아왔다

 

잡초였다

 

 

 

 

       

심정(心旌)

 

피가 섞인 콧물이 흐른다

침을 삼키려면 터져버릴 것 같은 목울대,

온몸을 웅크린 오소리 꼴이 되어서는 주위를 살핀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핏덩이 섞인 가래를 한 움큼씩 뱉어낸다

허기로 숨 쉴 기력조차 없지만

막상 밥알은 단 한 톨도 목구멍 속으로 삼킬 수 없다

누가 내 머릿속에서 맷돌질을 하는가

틈 없이 덤벼드는 두통

, 모든 게 자근자근 나를 무두질해대며

하산! 그만 하산하라고,

후들거리는 허벅지로 겨우 버티고 서 있는 나를 밀어

바람 앞에 세운다

 

오후 4, 한낮도 훨씬 지났는데 햇살은 여전하다

저 기세라면 어제 내린 폭설도 농담처럼 가볍게 녹이고,

바람은 다시 구름을 불러 모아

하늘을 잘게 부숴놓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반복되는 폭설 그리고 오한

 

오늘이 며칠이더라,

환각처럼 보이는 저 멀리, 빙하 아래쪽으로

소용돌이치며 흩어지는 내가 보인다

 

 

 

 

  

 

강원 강릉 출생. 1996조선일보신춘문예 등단.

시집 아침시집』 『나를 오른다』 『그레바스등이 있음.

서사시문학동인.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역임.

한국시문학상〉 〈경기문학상〉 〈바움작품상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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