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꽃 외 9편 / 김광기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5/14 [07:29] | 조회수 : 765

 

▲     © 시인뉴스 Poem



불멸의 꽃9

 

김광기

 

 

시드는 태양빛을 내가 먼저 게우고 있다.

짙은 안개 속처럼 희미한 시간의 늪,

빛은 아직 투사되고 있지만 온기는

사라지고 편안하던 숨도 가빠온다.

마지막 시간의 틈을 메우는 데에 온 신경이 쏠려 있다.

모두 제()하고 다음 세상의 문을 열어야 한다.

선인들은 나무들이 시간을 정해 놓고

꽃을 피우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어느 시간의 꿀이 가장 단 것인지

격풍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도 꿈속의 유언 같은 말을 전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불멸의 꽃을 통째로 가로채려 했다.

열매가 열리는 시간을 재면서

고치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크레바스 속으로 몸이 떨어지고

꽃은 제 잎을 오므려 나를 흡수한 것이다.

아마도 정신줄부터 먼저 놓았을 것이다.

생존과 먹이의 등식이 수레바퀴처럼 시간을 밀듯

빛이 바닥으로 깔리며 문이 닫히고 있다.

 

 

 

 

커피와 고갱과 나

 

 

 

때 절은 소매가 푸른 나뭇잎을 스치며

태양 빛깔의 검붉은 열매를 따낸다.

쌉싸름한 아침 커피의 떫은 향내에서

이국소녀의 달착지근한 입내가 배어 나온다.

붉은 미소 속에서 옹알거리던 씨알을

뜨건 화로에서 볶아낸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한여름에도 커피는

뜨겁게 마셔야 제맛을 음미할 수가 있다.

몽상에 젖은 아침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다가

입안을 채우다가 옹알이처럼 구르고 있다.

오래 전에 마셨던 다방커피도 그렇고

소소한 기억들을 재생시키고 소멸시키는 요즘의 아메리카노,

마시고 또 마셔도 욕망의 불기운을 다 삼킬 수는 없지만

고갱의 태양빛 그림 속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한 순간 한 순간을 펼쳐놓으며, 우리는

좋은 시간마다 만나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오래 만난 것 같은 사람, 맑은 영혼을 가진

당신의 웃음에서 커피향이 나고

함께 머문 시간 속에서 세상의 욕심들이 삭는다.

아메리카 신화가 된 이국소녀의 숨결이

탁자 사이를 오가며 혼을 사르고 있다.

 

 

 

 

바퀴

 

 

 

질기고 질긴 역동성에 숨이 차 있다.

한여름 뜨거운 목숨, 질겨 보이는 타이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길가에 자빠져 있지만

바퀴는 죽어 있어야 바퀴다.

혼자 굴러가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함께 혼을 살라 비로소 둥근 생명을 굴리지만

저것이 움직일 때 바퀴는 바퀴가 아니다.

제 몸이 빠져 있어야 바퀴는 바퀴가 된다.

돈도 둥글고 세상사도 둥글고

둥글둥글 굴리는 바퀴

바퀴들의 세상, 굴러가야 바퀴가 되는 것처럼

질긴 목숨 다하여 세상을 굴린다.

바퀴를 잊을 수는 있지만

욕망을 싣고 달리는 바퀴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퀴는 지쳐서, 죽어 있어야 바퀴이다.

 

 

 

 

꽃차를 마시다

 

 

 

꽃의 절정을 꺾어 말리고 덖고 우려

입이 데일까 싶어 입안이 뜨거울까 싶어

혹시는 꽃의 화기에 몸이 데지는 않을까 싶어

후후 불면서 차를 마신다.

꽃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마시고 있다.

가끔씩 꽃차의 효능에 대해 듣고 있을 때는

채 발화하지 못한 일그러진 꽃의 형상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형상 너머의 것을 보는 듯

더 아름답게 환생한 꽃을 내어놓듯

제 몸을 우려 내어준 꽃에 경배하듯

이렇게 귀한 시간에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는 차를 대접하며

당신은 누누이 꽃차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당신의 환한 모습이 꽃차보다

그 이전의 꽃보다 더 아름다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따라주는 대로 얼른 꽃차를 비우지만

당신은 고상하고 품위 있게 차를 마시고 있다.

꽃차의 의미보다 솔솔 피우는 꽃차향보다

차를 마시고 있는 그 모습에 취한다.

꽃을 거두면서 꽃잎을 말리고 덖고

오늘 이 시간을 위해 하나하나 담아두면서

무수히 꽃과 마음을 나누었을

당신의 지난 시간은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떤 꽃의 소멸은

이 시간의 기슭에서 만난

우리 만남을 더 삶답게 우려내고 있다.

 

 

 

 

빛살무늬 풍경

 

 

 

스무 해 전의 산이 보이고

두어 겹은 더 겹쳐진

아득했던 시절의 망망대해 보인다.

거센 산줄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짙푸른 바다 앞에서 이제는

수평적으로 흐르기를 기대하지만

냉랭한 반응 속으로 모든 경치들이 삭아 들어간다.

기류는 언제나 수직적이지만

그래도 빛은 내리쬐고, 바람은 분다.

세월이 더 쌓이다 보면 오랜 기운을 받아서

언젠가는 다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들 틈으로 들어오는 풍경들,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돌고 도는 듯도 하니

주섬주섬 모아다가 머리맡에 두고

이번에도 다시 길만 보고 가자.

풍경 속에 비친 세월의 두께가 보인다.

한 쪽 끝을 꼭 잡아 넘기면

겹과 겹 사이에 펼쳐지는 세상,

지금도 보이는 게 다는 아닐 것이다.

 

 

 

 

소금쟁이의 바다

 

 

 

지금, 여기까지는 가능했을 것이다.

여름과 겨울이 서로 섞일 수 없듯이

접점에 있는 시간이 그 경계를 사뿐히 스쳐갈 뿐,

하늘을 나는 새들의 날갯짓이나

사념 없는 몸을 길게 누이고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있는 새털구름 같은 것,

어정쩡하게 하늘에 다리를 꽂고서

어디로 입수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잠수부,

저 깊은 속을 온전히 믿어야

바다는 제 품을 투명하게 비춰줄 것이지만

색색의 산호와 조개들이 입을 열고

해초와 불가사리마저 자신들의 세상을 보여줄 것이지만

공간과 시간조차 분별하지 못한 생애는

비극적으로 놀라운 연민을 낳기도 하거니와

심해의 컴컴한 어둠만을 두 눈에 담고

온 생애를 추종하며 두려워하고만 있는데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소금쟁이,

헛발을 디디고 헛꿈을 꾸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분명, 여기까지는 가능했을 것이다.

시공간이 혼합되는 가끔씩은

짙은 빛깔이 물들어 있기도 하겠다.

 

 

 

 

곡선 흔적

 

 

 

곧게 가고 싶은 충동과

진행하고자 하는 궁극적 의지가

부딪치고 굴절되어 휘어지던 것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기에 버티는 힘이라도 되었던 것

다시 잇지 않으면 안 되는 곡절을

잇고 또 잇고,

스스로 선이 된 것이 아니라

너덜너덜 휘어진 길을 만지고 쓰다듬다가

그나마 펴기도 하고

접을 수 있는 힘이 생겼던 것

그냥 두는 것이 차라리

지난 흔적 같은 의미라도 된다는 것을,

누구도 쉽게는 흉내 낼 수 없는

궤적이 유연하다 하고

부드럽기도 하다면서

살아낸 만큼의 길이를

너와 잇고 싶었던 것이다.

 

 

 

 

애기동백

 

 

 

제주 꽃 동백, 광치기의 꽃

그 길목에서 더 곱디고운 꽃

아프고 아린 전설이 있었어라.

동백은 애기동백을 낳고

애기동백은 너를 낳았어라.

붉은 가슴속 아리고 아린 꽃술

서늘한 바람이 지나면

목을 끊어 추락하는 슬픈 낙화,

아비의 한을 수놓으며

꽃잎 분분히 날리는 제의의 몸짓,

춤추는 소매 깃에 바람이 머물러라.

찬바람에도 살랑여라.

애기 웃음처럼 살랑여라.

싱그러운 바람 속, 붉은 웃음

내일도 모레도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약속,

땅을 건너고 바다를 넘어서

저 세상 끝까지 흘러가라.

 

 

 

 

나무 신공

 

 

 

나무들이 피를 토하더라.

붉은 피, 뇌란 피,

더러는 거무튀튀하게 응어리진 피를

각혈하듯 토하더라.

흥건하게 고인 핏물 속으로

이 계절이 다 지고 있더라.

깊어진 가을에 비는 내렸다지만

상록수 아래에도 핏물이 고이더라.

오랫동안 옹알거리던

말 한 마디를

끝내 토해내지 못하는 이 가슴팍에도

나뭇잎이 떨어지더라,

핏물처럼 엉겨 있더라.

 

 

 

 

붉은 입술

 

 

 

횟집 앞을 지나다가

붉은 입술의 생선을 보고 발을 멈췄다.

주둥이로 유리벽을 치다가

나를 빤히 보고 있는

방어의 눈이 바다를 닮았다.

날렵하게 뻗은 꼬리지느러미를 휘두르며

창해를 누볐을 고기 한 마리,

좁은 수족관에서 유리벽에 부딪쳐

퉁퉁 부은 빨간 입술 내밀고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벽을 느끼지 못하는 애달프고도 슬픈 유혹,

언젠가 보았던 유리벽 속에 진열된

붉은 입술의 기원 같은 풍경이 비친다.

바다도 하늘도 유리벽 같은 세상,

섬으로 귀양 온 것 같다고 했더니

팔자 좋은 휴양이라고 코웃음 치는 뭍사람들처럼

함께 놀아보자 농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뻐끔뻐끔 숨을 피우며 종말을 예고하는

유리벽이 입조차 막는다.

파도소리만 새기고 있는 부둣가,

비릿한 길목의 물빛 속으로

노을이 스며들고 있다.

 

 

 

 

*김광기 :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내고 작품 활동 시작.

이후 시집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등과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등 출간.

1998년 수원예술대상 및 2011년 한국시학상 수상. 현재 계간 󰡔문학과 사람󰡕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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