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외 / 안명옥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5/29 [07:51] | 조회수 : 407

 

▲     © 시인뉴스 Poem



 

자작나무 숲

안명옥

 

 

 

어둠은 포근해서 좋다

먼 길을 걸어왔지만

뜨거운 짐승처럼웅크린

자작나무 숲이어서 오래 걷는다

 

추운 곳에서 자라는 습성을 가진 자작나무

젖어서 더 활활타 오른다지

축축해진 길바닥에 눕는 달

 

어둠의 자식들일수록 눈빛이 살아 있다

 

 

 

 

 

양파

안명옥

 

 

 

여자만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양파 몸을 벗길때마다

양파는 나 대신 운다

 

미끌미끌한 것은 양파의 유머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양파의 자유다

 

양파는 칼날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수많은 실핏줄을 감추고

 

몸 속 깊이 자궁을 숨기며

파란 싹을 피워내고 있다

 

양파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해맑은 표정 속

매운 향기가 쟁여있다

 

연애 한번 하자고 옷을 벗기다가

내 속을 들여다보고

당신은 자꾸 울었다

 

 

 

모과

안명옥

 

 

땅의 살이 굳어지면

길이 된다

 

많이 밟힐수록

좋은 길이 된다

 

어머닌 굳은 손으로

뜨거운 냄비를 덥석 집어 올리나

난 아직 뜨거운 밥그릇 하나 들지 못한다

 

굳는다는 건

수많은 길들이 내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것

 

책상 위 모과가 굳어가면서

향기가 더 진해지고 있다

 

 

   흔적

 

   안명옥

 

 

 

자동차가 제 생의 속도로

길을 질주한다

속도는 자동차를 앞지르다

자동차를 버린다

 

자동차는

길을 버리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삶을 원해

구름 속으로 다가가

집이 된다

 

집이 느리게 걸어간다

생의 최고의 시간을 보내며

다음 생엔 빗물로 태어나고 싶다는

저 집

 

조바심 나는 희망 같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들을 내려놓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집

 

저 집 창문엔 풀벌레 소리 들리고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인

누군가 찍어놓은

붉고 푸른 지문 몇 개 얼룩져있다

 

 

 

놓쳐버리다

 

안명옥

 

 

 

 

여학생들은 생기 발랄 당당하고

꿈으로 치마를 채운다

나는 그 여학생을 놓치고

스물다섯에 결혼을 하고 시집살이 하는 동안 신혼을 놓쳐버리고

엄마로만 사는 동안 여자를 놓쳐버리고 나를 놓쳐버리고

웃어야 할 때를 놓쳐버리고

 

남자들은 그 좋은 시절 그 일을 했더라면 한다는데

여자들은 그때 그 남자를 놓쳐버린 것을 후회 한다나

법대생을 놓쳐버리고 항공학과 생을 놓쳐버리고

놓아야 할 것들만 남아

100세를 살게 되나보다

어쩌자고 그때 사범대를 가지 않아 연금을 놓쳐버려

헐렁해진 치마에 바람이 분다

 

모처럼 뒤풀이에 참석하다가 막차를 놓치고

문학 강의 하러 가는 아침 버스를 놓치고

놓칠 건 놓쳐도 놓쳐선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새해마다 엄마를 보러 가는 것을 일순위로 잡고도

놓치거나 미루며 살고

나는 그 무엇인가가 놓친 잉여로 남았다

 

엄마의 장 담그는 법을 놓치고

미역국 먹어라 엄마 전화가 끊어지자 내 생일날을 놓치다가

페이스북 이력을 보고 친구들이 챙겨주는 생일

나는 음력을 쇠는데 이참에 생일을 바꿀까

봄맞이꽃이 피었다 져도 심장 두근거리는 것을 놓치고

놓칠 게 나밖에 없다

 

놓치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을 찾아 눈을 부릅뜨는데

문득 내 시집을 내주고 밥 한 번 먹자 약속해놓고

느닷없이 봄날 세상을 떠난 사람이 생각난다

약속을 놓쳐버린 사이,

그가 놓친 이 봄에 꽃은 핀다

나는 무엇을 그 무엇은 또 나를 놓치는가

 

 

 

 

발칸산맥의 장미

 

안명옥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 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

 

자정에서 새벽 2시 사이에 딴

장미로부터

 

장미가 최고 향을 뿜어내는 시간은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

 

내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스스로 위대해졌다

 

 

 

   기대다

 

   안명옥

 

 

 

한때는 바람에 기대어 살며 흔들리던

우리 집 베란다 화초가

오래 버려둔 시간

망각에 기대어 살며시 꽃을 피운다

 

나는 어렸을 때 서해에 기대어 살고

열아홉에 독립했을 때는 나이에 기대어 살았다

봄담에 기대어 살며 노란 꽃을 피우던 개나리처럼

스물넷에 준비 안 된 결혼을 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신발을 따라 교회에 가거나

절에 간다 옛사랑은 입산을 하고

 

술에 기대어 살던 선배가 하는 말,

아내는 흰머리 나면 검은머리 뽑아주고

애인은 흰머리 나면 얼른 흰머리 뽑아준다는데

 

나는 사람에게 기대지 않으면서

평화가 오고

평화는 차츰 불편에 기대어 사는 법을 터득한다

불편은 생각에 제 몸을 기댄다

 

핸드폰은 늘 무음을 좋아하여 약속을 만들지 않고

소리는 변두리에 사는 동안

자연 속에서 비로소 자유에 몸을 기댄다

 

귀뚜라미가 달에 기대어 밤을 견딜 때

취업 안 된 제자, 악기에 기대어 산다는 안부가 온다

 

 

 

 

 

 ( )에 대하여

 

  안명옥

 

 

개구리가 교미하는 계절에 받은 편지 한 통

뜯어보니

봉긋한 쌍 산봉우리 사이로

계곡물이 흐르는 편지지에

 

( )에 잘 빠지는 당신께

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읽는다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 )를 만들며 산 것 같아

 

나는 자꾸 ( )를 채우고 싶어

분위기, 열정, 연애, 일중독, 상상, 불행

아무리 넣어 봐도

채워지지 않고 휩쓸려 내려가는 모래알 같아

 

산바람이 들어와 ( )를 가득 채우고

( ) 안에서 물 흐르는 소리

( ) 안에서 막막해 하다가

초목들이 서로 교미하는 모습 바라보고 서 있다가

문득, 나는 ( ) 속에 나를 디밀어 본다

 

 

 

 

기념일이 나를 식물로 재배하고 있다

 

안명옥

 

 

아내의 날 결혼기념일 부부의 날 생일날

기념일마다 나는 홀로

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식도에서 소장까지 꼭꼭 씹어 천천히 먹는다

뜨거운 입술을 기념하고

신경성 위염을 앓던 위를 기념하고

쓸개를 기념하고 뭐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

어제까지 처녀였던 나에게

결혼은 아내, 어머니로 만들어주는데

 

기념일에는 기념할 외로움이 있다

기념일에는 기념할 절망이 있다

기념일에는 기념할 불행이 있다

기념일에는 기념할 꽃이 있는 법

 

4월은 일 년 중 달()이 가장 큰 달이라니

나의 결혼기념일과 내가 태어난 날이 있다

4월에 나는 아들을 낳았다 4월에 태어난 사내 사이에

 

마야코프스키는 414일에 죽었다

카프카는 마흔에 죽었는데

4월에 나는 연희문학촌 독방에 앉아 기념일마다

난 너무 오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비 한방에

사라지는 벚꽃들을 기념하고 있다

 

사람은 역경을 거치면서 현명해진다는데

난 날마다 자본주의 속에서 바보가 되어간다

기념일이 날 식물로 재배했다

도망갈 수 있는 동물과 다르게

도망갈 수 없는 식물은 독을 지니게 되었다

 

이번 생의 바다에선 유행 같다

누군가 자꾸 기념일을 만들고 있다

용산을 지나다가 용산 전쟁기념관을 보면서

전쟁을 다 기념해야 하냐고 돌에게 묻고 싶었다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안명옥

 

 

술을 마시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간다 참지 못할 만큼 오줌이 마려워

걸음이 평소보다 급하다 오줌 마려운 것이,

나를 이렇게 집 쪽으로 다급하게 몰고 가는 힘이라니!

오줌이 마렵지 않았다면 밤 풍경을 어루만지며

낮엔 느낄 수 없는 밤의 물컹한 살을 한 움큼

움켜쥐며 걸었을 것을 아니 내 눈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저편, 그 너머까지

탐색했을지도 모를 것을

지나가는 사람들 없는 사이

무릎까지 바지를 끌어내리고 오줌을 눈다

오줌을 누는 것은 대지와의 정사 혹은

내 속의 어둠을 함께 쏟아내는 일,

다시 오줌이 마려워오는 순간이 오기까지

내 속이 잠시나마 환해지는 일

우두커니 서 있던

나무가 부르르 떤다

놀라워라,

일탈의 쾌감이 내()를 이뤄

이렇듯 밤의 대지를 뜨겁게 적실 수 있다니,

어둠 속에서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달이 된 엉덩이가 공중으로 둥둥 떠올랐다

 

 

 

 

 

 

 

 

안 명 옥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 졸업. 한양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수학

2002시와시학1회 전국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으로 뜨거운 자작나무숲달콤한 호흡출간.

서사시집 소서노, 장편 서사시집 ,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출간.

창작동화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동화 금방울전』 『파한집과 보한집,

역사동화 고려사출간.

성균문학상, 바움문학상 작품상, 만해 시인상 우수상, 김구용문학상 수상.

베스트 멘토상 수상.

시집 5권 모두 한국문화예술 위원회, 문학나눔 우수도서로 선정되었음.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진흥기금 받았음.

문학나눔 우수문학 도서 선정 위원. 2019년병영도서 추천선정위원

) 10년간 고양예고 문예창작학과 전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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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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