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 외9편 / 김운기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6/05 [06:39] | 조회수 : 597

 

▲     © 시인뉴스 Poem



 

봄길

 

무엇이 그리 급하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맨발로 이 길을 달려 가셨습니까

노랗디노란 붉디붉은

저 농염한 치마폭에 취해

낮 가는 줄 밤새는 줄 모르고

아직도 노루목 언덕에

이십년 달 뜨도록 누워계신

아버지

 

 

      

 

한낮, 개심사에서

 

바람이 솔숲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풍경 끝에 달린 물고기 꼬리를 보았지요

구름이 몇 번인가

모였다 흩어집니다

노스님 오수에 든 시간

세심연洗心淵의 수련도 졸고 있습니다

툇마루 밑

적막에 섞인 누렁이가

귀찮은 듯 꼬리를 몇 번 흔들 뿐

 

새물내 나는 빨래처럼 펄럭이는

법어法語를 찾아

일백 여덟 계단을 걸어온 숨소리만

북소리보다 더 크게 울립니다

 

       

 

정선

 

 

마디 굵은 손으로 엮은

시골 아재비의 소쿠리 같다

 

눈길 하나 주지 않아도

필요한 것들만 모여

짧은 해가 가는 겨울 정선장

주먹나물 몇 움큼

종이좌판 위에 놓고

해거름 달려오는 파장 한구석에 핀

할미꽃 한 송이

고향 선산에 앉아있던 그 꽃

피어 있다

 

애기 감 떨어지는 마당가에

다 묻었다고 돌아섰던

배냇 기억들

정선 5일장에 몰려 나왔다

호미처럼 허리 굽은 어머니

새싹 돋는 냉이를 캐고 있을

고향 옛집 텃밭은

저녁노을 내리는

좌판위에 깔려 있다

 

손에 닿는 듯한

마음이 가서 함께 놓이는 듯한

 

 

 

 

 

쓰는 밤

 

어느 밤 불현 듯,

내게로 와서

꽃보다 고운

언어들을 내려놓고

나를 시인이라 부른

시인詩人

    

 

 

 

겨울,부석사*

 

 

도비산 아래 부석사에 가면

아미타부처님 곁

삐딱하게 누운 절집 심검당尋劍堂

물고기 눈을 닮은 경허鏡虛께서 살고 있다

천수만에 만조가 되면

불심 깊은 숭어 떼

그를 만나러 뜬눈으로 몰려오고

입동 재일齋日에는

비목나무에 마지막 남은 잎들도 촛불을 켠다

 

찬비 내리는 오후

운거루 옆 찻집에 앉아

가을걷이 끝낸 간척지 들판에

비 젖은 낙엽처럼 추적추적 내려앉은 가창오리 떼

본다

삶은

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잘 떠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반야의 검

찻상 다포에 선어 한줄 남기고

지혜의 샘물을 길어 올리던 선사禪師는 떠났다

바다 건너 먼 불빛이 보일 때까지

비는 아득하고

 

* 서산 도비산에 있는 절, 경허선사가 수도하던 사찰이다

 

 

 

 

 

그대는 1

 

 

소쩍새 운다 봄밤

뜨거운 영혼이 눈 뜰 때

 

, 만개한

인연

선홍빛 바람에 사무치네

나와 너

피보다 더 짙은

꽃을 바치네

 

막 돋아

저녁 강물에 지는

노을이면 어떠랴

허공에 자진하는

눈발이면 어떠랴

나보다

 

,

도무지

나 같은

 

 

 

 

 

 

그대는2

 

 

청보리 커가는 사월

밤에도 자지 않고

해탈을 꿈꾸던

배추나비

껍질을 벗는 노란 봄날

 

허리 꺾인 파꽃 위로

분분히

은하수별들 파편

날고 있다

속절없는 그리움

산화하고 있다

 

아침안개

종소리처럼 울리다가

눈물이 된

저 헛된 햇살아래

제 그림자 업고 서 있는 표지석標識石

 

푸른 날의

그 유일한 증표

 

 

 

 

 

 

 

새벽기도

 

지혜의 샘물로

때 묻은 생각을 씻고

총명한 언사로

입을 열려고 해도

먼지만 맴도는 혀

선어善語들로 가득

은접시에 담아

그대에게 보내고자 하나

아직 헹구어내지 못한 먼지 입에 가득하여

입술을 열기가 부끄러운 새벽기도

받은 마음으로 은총의 향을 지피고

주는 마음으로 찬미의 촛불을 고쳐 밝혀

내게 주어진 오늘,

첫 시작의 창을 닦아

그대에게 드리는

새벽기도

 

 

 

  

 

가을, 아내에게

 

말갛게 씻긴

가을 하늘이 좋아서

입김불어 창을 닦던

나의 파랑새여

들꽃 핀 자리마다

책갈피 끼우며

가을시를 읽던

아내여

 

여름 나날들,

풀꽃 키우고

달빛 빚어

가을을 준비하던

샘물같이 명징한 사람아

무결한 두 깃을 흔들어

시인의 새벽잠 깨우던

나의아내여

 

가을에 쓰는 편지는

모두 노래되고

그리움 되고

촛불아래

독경讀經이 된다오

 

 

 

 

처음

 

 

처음

너와 나

뜨겁던

눈빛에

심장에

언어가 있었다면

설레임

이라고

하나만

기억해 두자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붉고 붉은

혈관 속

언어가 있다면

그리움

이라고

하나만

선연히 기억해 주자

 

처음의 그 아득한 때

 

 

 

 

 

 

 

 

 

김운기

 

건축가, 시인

전 경기도 검도회장

 

충남 내포생. 서울대(건축), 공주대 대학원(한문학)

시집 그대에게(2001, 청학출판사) 등단

시집 곡부지나며(2013, 발견출판사)

칼럼집 한단지보(2009, 안양광역신문사)

미당서정주문학상 수상 외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동단건축 대표이사

경기도 검도회장 역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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