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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절 외9편 / 권월자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6/27 [08:36] | 조회수 : 480

 

▲     © 시인뉴스 Poem



침묵의 시절

 

 

 

그날 우리들의 마당에는 쪼개진 대나무같은 바람이 불었다. 식어버린 흰죽처럼 웃으며 남동생은 마을 어귀를 넘어갔다. 어쩌자고 바람은 자꾸 불고 시장가신 어머니는 소식이 없는 것일까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하루종일 나는 책상에 턱을 괴고 지붕 위에서 해금인 듯 울고 있는 양철조각 소리를 끌어다 책갈피에 넣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구두 한 짝인 나. 가만히 신발장을 열어 본다. 순간 우루루 쏟아져나오는 낡은 슬픔들. 모래바람에 눈을 비비고,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늘어진 메리야스를 본다. 땅에 떨어진 인절미처럼 구르는 그것,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 눈 크게 뜨고 가늠해보았다. 흐린 하늘에서 전신주를 연결하는 수천 개의 전깃줄 같은 주삿바늘. 아버지는 오늘도 견딘다. 그러다 땅강아지 두어 마리어치의 저녁을 데리고 남동생이 온다. 돼지코에 그을음 가득한 얼굴로 온다.

씨 여문 해바라기같이 한 쪽으로 기울어져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것이다.

식어버린 커피처럼 쏟아지는 어둠, 검정도화지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집. 이 뾰족한 느낌은 무엇일까. 나는 홑이불같은 배를 접으며 대문밖으로 나섰다. 베어진 대나무 밑둥 사이로 한참을 걸어갔을 때 나는 뼈다귀만 남은 내 오른손가락 끝에서 파란 불빛을 보았다. 벌판에 수천 장 이불호청을 찢어 날리는 짐승같은 바람이여. 이제야 나는 알겠다. 불만투성이의 바람에 대꾸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나의 어머니가 왜 그토록 촛불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는지를.

 

 

 

 

 

 

 

지켜준다는 말

 

 

오후 네 시에 결혼하기는 마뜩잖다 논둑에서 밀려나 논 안으로 들어온 삶

백로, 왜가리, 뱀은 최고의 순간을 기다리고 나의 어둠은 아직 멀리 있다

소심하고, 자극에 대한 반응이 느린 나여서 해진 뒤 노래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에 금속성 울음보가 터진다 보름달 같은 주머니에는 내 이름이 토끼풀처럼 가득하다

 

수원청개구리

 

전통인 듯, 어린 벼를 붙들고 청혼가를 부른다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지켜준다는 약속이다 애벌레, 곤충, 거미, 지렁이, 절지동물, 풀무치들이 내는 비명, 함께 견디고 물불가리지 않는 재개발, 농약사용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고통, 어깨로 같이 울어줄 사람 운명이 아니고는 둠벙을 떠나지 않는다는, 고향이 같은 사람들 간의 끈끈함 우리가 물처럼 끝없이 이어갈 삶터, 이름처럼

 

 

 

 

 

 

 

잠보

 

 

 

덤핑사이트에 들어서는 쓰레기차량, 환하게 웃는 아이들. 나이로비 고르고초 쓰레기 더미에서 음식을 찾아내던 아이들, 쏟아지는 재활용품들을 헤짚으며 소리지른다.

도레미를 몰랐고 무대를 본 적 없었다. 합창실은 비가 새는 양철지붕 창고 아래. 쓰레기산 위에서 지독한 악취와 쓰레기 타는 연기, 노래하려고 입만 열면 벌레가 날아들어 달아나는 아이들. 그 속에서 희망을 연습하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목소리, 천상의 아이들, 200회가 넘는 공연마다 화음을 이루며 영혼을 흔든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나라 ,행복이 가득한 나라, 평화가 깃든 나라 케냐, 하쿠나마타타. 대한민국에 울려퍼지는 천사들의 함성.

여러분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역자 어머니

 

삼남 삼녀 키운다고 변산반도 한켠에서 농사짓던 엄니. 벼농사만으로는 어림없어 콩이야, 수수야, 고추야, 배추야, 감자야, 고구마야, 가지야 할 것 없이, 이 밭 저 밭 다니며 호미와 하나가 되어버린 울엄니. 이웃집 밭일, 허드렛일은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일.

얼굴은 가랑잎, 손발은 갈퀴, 노래는 은방울인 울엄니.

품 팔아 얻은 콩 머리에 이고 오다 얼음판에 그만.

울 아부지, 소 한 마리 값 병원비 어쩌겠느냐며 석 달을 눕혀만 놓으셨다. 기역자 허리로 농사에 자식걱정에 눈 뜨고 감는 내 엄니. 자식들, 엄니 고쳐줄 명의를 만났고, 때를 놓쳐 수술이 불가하다는 얼음장 같은 소견. 울 아부지 눈감을 때 막내아들 불러놓고 귓속에 남긴 말, 니 엄니 관에 들어갈 때 뚜껑 잘 닫아야 되야. 해질녘 밭 언덕, 아부지 무덤 바라보며 울 엄니, 워쪄 이만하믄 한평생 씩씩하게 잘 살았지

 

 

 

 

     

 

 

카톡, 무지개

 

 

카톡이 울린다. 회색빛 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며 떠 있는 무지개 사진 두 컷 올라온다. 또 울린다. 수원 하늘에 쌍무지개 떴다는 소식이다. 다시 울리는 카톡, 이번에는 방향이 반대로 뜬다. 신 아무개가 올려놓은 쌍무지개다. 또 다른, 한 아무개가 포착한 무지개. 포물선이 제법 크다. 아직도 떠 있어요. 창밖을 보세요. 김 아무개의 카톡이다. 와우, 부라보, 레인보우. 보통리에 뜬 무지개 악보다. 윤 아무개 등장, 방금 전 어두운 산책길에 정체 모를 괴물이 지나갔다. 이티가 교섭 마치고 유에프오 탔다는 통신, 지구상의 짐승은 아닌 듯. 신 아무개 재등장. 제가 보냈는데 접선 실패군. 화성 사람인디. ~ 하하하, 사람만큼 예쁜 무지개 찌개가 끓는 중.

 

 

 

 

 

창밖을 보다

 

 

 

내 몸 구석구석을 방문했던 눈물들이여

그는 어디쯤 오는 걸까

당신들 흩어져버린 안부여

묻지 마라, 중얼거림도 사양한다

산 속 마을, 저녁연기 오르고

길 떠난 탄식 들판을 덮는다

나뭇가지를 물결처럼 타고 흐르던 바람

빗방울 덤벼들자 스스로를 묶는다

 

눈을 감아야 보인다

 

웅덩이에 풀들이 솟아나고

염소가 물을 찾는다

 

마른기침으로 도배한 벽에 기대어

온몸으로 기다리고 있다

 

내 이름 부르지 마라…… 어둠의 한숨들이여

창 밖에서 희망을 구걸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여

 

 

 

 

 

 

 

함정

 

 

습지에 앉아 다리를 가볍게 떤다.

돌 틈, 수초에 숨어있던 물고기들이 궁금해 못 견딘다.

두 날개를 머리 앞쪽으로 우산처럼 펴서 그늘을 만들고 기다리는 백로

 

수초 그늘을 찾아 들어간다

오인을 깨달은 순간

어두운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겉보기에는 그렇게 안 생겼는데 속이 시커멓다

 

목을 접고 날아도 날개짓은

바람에 날리는 숙녀의 옷자락이었는데. . .

 

버들치, 미꾸라지, 개구리들아

어떡하냐

 

 

 

 

 

 

 

 

밴드모임

 

 

간병인 없는 병실에

혼자 누워있다

 

아마존강 유역 울창한 숲으로 가

파라고무나무 껍질에

상처를 낸다

 

링거줄을 타고

아픈 만큼 떨어지는 눈물

 

스며든다

 

슬픔이

이스파뇰라섬 원주민들이 가지고 놀던 공처럼

부풀어오른다

 

고무밴드

 

누군가에게 층계가 되는 꿈을 꾼다

 

 

 

 

    

 

드라이플라워

 

 

연인들의 선물

꽃다발

구름을 타고 다니는 듯

춤을 춘다

 

온 세상에 퍼지는 장미꽃냄새

 

내 방 벽에 거꾸로 매달린 너

 

처음부터 풀이었으면

가슴에 씨앗 한 알만 품고서

끝없는 기다림과 싸웠으리라

 

바람이 볼을 부비고

햇빛이 따뜻하게 안아줄 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리라

 

아름다워서 서러운 꽃

 

 

 

 

     

 

여름

 

선풍기가 돈다. 동그라미 속에 동그라미가 들어있다. 반 쯤 열린 문고리에 매달린 엽전이 흔들린다. 사분의사박자로 왔다갔다 한다. 책상 위 책갈피가 펄렁펄렁인다. 스탠드도 졸다가 깨어 끄덕거린다. 벽시계도 천천히 일어난다.

 

 

     

 

  

 

권월자 시인 약력

리토피아에 신인상 수상.

열린시학에 수필 신인상 수상,

국제문화예술대상, 올해 젊은 작가상,

2회 수원예술인대상(문학부문)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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