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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 외1편 / 박민서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7/04 [08:29] | 조회수 : 273

 

▲     © 시인뉴스 Poem



구유

박민서

 

 

 

소가 기다리는 건 저녁

 

우묵하게 파인 곳엔

별똥별이 떨어진 자리처럼 옹이 몇 개 박혀 있다

그곳에 풀을 져 나르며

어깨가 단단해지거나 굽어지는 곳이고

수도원 쪽으로 날아가는 새였다

 

구유가 소라고 믿었던 어린 시절

되새김질은 기타 소리 같아서 혀 놀림으로

몇 개의 음표를 배웠다

꼬리가 흔들리는 어둠이 오면

소의 울음소리는 밀랍처럼 굳었다

 

구유 속에는 나팔꽃 줄기나 달개비꽃이 피었다 여치 몇 마리와 초록 달팽이도 들어 있었다 파란 여물 속에 듬성듬성 꽃들이 섞여 혓바닥에서 휘돌아 다녔다

 

할머니는 여물 먹는 소리로

하루 한 끼만 밥을 먹었다

 

소가죽은 뒤부터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온갖 쟁기 낫 호미들이 들어앉아 있어

어느 날은 크고 잘 생긴 소가

연장들을 먹어치우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올해는 농사지은 것들을 안 먹고 싶다던 할머니가

연장을 찾으러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여릿한 풀들은 꼬리가 되고

끈적한 점액의 초록 달팽이들은 연골이 된다

바람이 연주하는 할머니 손과 소의 꼬리가

서로의 뒷면에서 시간을 접는다

 

 

 

 

 

 

 

 

 

 

실록

 

 

무화과나무를 심으려고 판

마당 한 귀퉁이에서 녹슨 자물통이 나왔다

 

이사 온 후로 처음 파보는 땅

나무 한 그루를 심으려고 흙구덩이를 보니

수백 년 지하의 공터를 잠그고 있었다

 

어느 시대의 유물이냐고 물어도 묵묵부답

 

그 땅속의 입김이 구름 위에까지 퍼졌다면 입에 우겨넣은 비밀이

구름의궤에 기록할 수 있을까

 

왕조의 사관이나 혹은 궁녀의 무덤은 아닐까

땅속만큼 완벽한 자물통이 있을까

 

마당 한 귀퉁이의 실록

함구마다 붉은 녹이 슬어 있다

 

세월이 옭아맨 단단한 흙

잠근 문도 사라지고

빈 자물통만 지키고 있는 곳

새로 심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사라진 문이 슬쩍 열릴까

 

낮달은 무화과나무를 들여다보고

바르르 떠는 잎의 면죄를 청할 것이다

 

햇살은 자물통

소리를 가득 물고 있는 무화과 열매들

, 입속에 붉은 흉터가 벌어진다

 

 

 

 

 

 

 

박민서 2019년 계간 󰡔시산맥󰡕 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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