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검도외9편 / 박하리 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7/08 [20:03] | 조회수 : 338

 

▲     © 시인뉴스 Poem



 

서검도

박하리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었다. 한겨울 꽁꽁 얼었던 얼음장이 깨어지고 뒤엉켜 바다로 흘러든다. 밀고 밀리며 떠내려 온 얼음이 섬 둘레를 가득 메운다. 어디에서 흘러온 얼음인지 알 수가 없다. 겨울의 시작은 섬을 건너 건너 또 건너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바다가 온통 폐허다. 외줄에 묶여 있는 여객선은 얼음 위에 앉아 있다. 육지로 향하는 발들이 선착장에 묶여 있는 동안에도 얼음은 끊임없이 섬으로 밀려든다. 선창가의 보따리들이 얼음 밑으로 가라앉는다. 얼음이 힘 빠진 여객선을 바다로 밀어낸다. 얼음이 잠자는 섬을 먼 바다로 끌고 간다. 바다는 사납게 울고 얼음덩어리들은 춤을 추어도 섬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겨울을 지키려는 바람이 아직도 바다를 휩쓴다. 발길 돌리는 논둑길에 천 년의 눈꽃이 피어있다.

 

 

 

 

길 위에 널린 말들

박하리

 

 

 

 

말들이 집을 짓고 길을 만든다.

말들이 나무를 심고 새를 키운다.

말들은 토담이 되고 토담 속의 동화가 되고 동화 속의 별이 된다.

 

혀끝에 뱅뱅 돌아 나오는 말들은 구름이 되어 비를 내리기도 하고,

혀끝을 바람처럼 벗어난 말들은 낙엽 되어 구르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말들은 귓볼을 스쳐가는 바람이다.

잔잔한 술잔 속의 태풍이다.

말들은 토담 속의 아름다운 꿈이다.

고요한 꿈속의 한바탕 회오리다.

 

말들이 흔들린다.

사람들이 흔들린다.

풀잎처럼 세상이 흔들린다.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흔들리다가 휘돌다가 꽃잎처럼 밟혀 사라진다.

 

 

 

대해와 통해

박하리

 

 

 

 

바람이 불기도 전에 누워버리는 상황에 대해,

 

먹물로 도배하는 상황에 대해,

오물로 도배하는 상황에 대해,

 

자신만 깨끗하다고 억지를 부리는 상황에 대해,

다른 사람은 깨끗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상황에 대해,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나와 생각이 같다고 해서,

 

나이어야만 다 된다는 생각에 대해,

남은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에 대해,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대해,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주장하는 상황에 대해,

하루하루 발버둥 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다는 생각에 대해,

사람의 길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 대해,

 

맥없는 나는 어쩌지도 못한다는 생각을 통해.

 

 

 

 

거울 속의 그 남자

박하리

 

 

 

초원의 밤은 처절하다.

거울 속의 그 남자 왕이 되었다.

그가 휘파람을 불면 하이에나가 온다.

그의 허락 하에 하이에나는 사냥을 시작한다.

거칠 것이 없는 그는 하이에나에게 칼을 물려주었다.

밤이 되면 초원을 샅샅이 헤집고 다닌다.

동물들의 뼈와 살은 포식자의 입으로 들어간다.

하이에나는 초원의 무법자이다.

 

암사자는 하이에나가 득실대는 곳에 몸이 묶여 있다.

부상당한 암사자를 하이에나 무리가 그냥 놔 둘 일 없다.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머지않아 수명을 다할 운명이다.

이제 더는 사냥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다.

 

때를 기다리던 암사자 보복을 꿈꾼다.

 

 

 

 

 

벽 속의 길

박하리

 

 

 

 

길을 걷다 길의 벽을 만난다.

벽 안으로 어스름한 어둠이 들어오고

희뿌연 연기도 바람과 함께 들어온다.

시끌한 말들도 따라 들어온다.

안개 속이다.

 

퍼덕이는 날갯짓으로

너울너울 벽의 높이를 어름해 본다.

깊이를 감춘 벽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던 벽이 발끝으로 길이 된다.

넘어질 벽이기도 하고 넘지 못 할 벽이기도 하다.

등 뒤에 펼쳐진 날개의 깃털 속으로 바람을 모아

푸드득 푸드득, 날갯짓으로 벽을 넘어본다.

길이다.

 

날개 안으로 태양의 빛은 들어오고,

그 빛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로,

떠다니는 먼지로 날아간다.

 

길 위 태양의 빛은

벽을 타고 오르는 꽃향기다.

 

 

 

 

말이 말을 퍼올린다

박하리

 

 

 

말을 가둔다.

문을 잠그고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를 걸어둔다.

새어 나간다. 연기를 피우고 새어 나간다.

말은 공기와 함께 섞여 나뒹굴다가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며 태풍을 만들기도 한다.

태풍은 비를 만들고 겨울 내내 푸석하게 쌓여있던 덤불,

그리고 내다 버리려했던 말들을 섞어 강으로 흘려보낸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덤불 속에는

스멀스멀 온갖 말들로 가득하다.

남은 말들이 섞이며 부풀어 오른 말들은

넘쳐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온갖 말들이 뒤엉켜 촘촘한 그물을 만든다.

말이 말을 퍼올린다.

온갖 세상의 것들이 올라온다. 온갖 것들을 퍼올린다.

바닥이 훤히 들어나도록 부지런히 그물질을 하며 퍼올린다.

퍼올린다.

 

 

 

 

,

박하리

 

 

]

가파른 계단을 지키는 가로등은 그를 집으로 끌어가는 아내다. 그의 등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아내가 시린 등을 감싼다. 그의 허리는 통증으로 굽어있고 뼈와 뼈 사이 찬바람이 샌다. 계단을 오르는 그의 다리가 터벅거린다. 딸아이의 웃음소리가 귀속으로 파고든다. 아내의 달콤한 숨소리가 심장 속으로 파고든다.

 

현관문을 열고 어두운 집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딱딱하게 굳은 밥풀을 핥고 있는 강아지와 아침에 먹고 남은 밥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숟가락과 뚜껑 열린 반찬통의 마른 김치 조각과 굳어버린 간장 종지다. 가스렌지에 주전자 올려놓고 곤히 잠든 아내 깰까봐 살며시 내려놓는다. 밥통 속에 주먹만큼 남아있는 밥에 뜨거운 물 부어 한 수저 입에 털어넣는다. 세상에 없는 그의 아내가 등에서 내려온다.

 

 

 

 

 

가면

박하리

 

 

 

눈을 뜨자마자 가면을 찾는다. 미처 기름기가 마르지 않은 어제의 가면이다. 거울 앞에 선다. 머리에는 깊이 박힌 뿔이 늘어져 있다. 눈은 푹 꺼져있고 입꼬리는 내려 앉아 있다. 뒤집어쓴다. 뿔을 추켜세우고 꺼져있는 눈동자를 끌어내고 입꼬리를 치켜올린다. 거울 속의 코가 풍선을 분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얼굴을 보니 시작이 괜찮다. 시끌시끌한 티비 속 어떤 부부도 새로 산 가면을 쓰고 앞뒤가 없는 말을 하는 중이다. 집을 나선다. 밤새 쏟아진 배설물에 차바퀴가 길을 낸다. 괜찮다. 다른 가면을 쓴 얼굴들이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들이어 괜찮다. 좋은 날입니다. 미소를 멈추지 않는 가면에 땀이 차기 시작한다. 웃고 있는 입 속으로 찬바람이 밀려들어온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다. 갈갈갈, 웃음소리가 쉰다.

 

 

 

 

 

박하리

 

 

 

벽을 열고 들어간 하늘에는 뜨거운 태양이 퍼붓고,

가끔 태양을 가리는 구름 그리고 바람소리,

벽을 열고 들어간 바다에는 흔들거리는,

바다와 떠있는 섬, 정박하고 있는 여객선이 고요하다.

 

그녀는 매일 벽을 열고 있다.

 

벽 속에 펑퍼짐한 중년의 그녀가 웃고 있다.

세월의 주름들이 꽃이 된 그녀와

탈을 쓴 그녀의 얼굴은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있다.

늘 푸석한 얼굴에 툭 튀어나오는 눈, 굵어진 팔 근육,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다리의 푸른빛 혈관들이

툭툭 터져 혈관들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붉은 태양이다.

그녀의 얼굴은 푸른 바다이다.

그녀는 오르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달

박하리

 

 

 

그녀는 밤마다 달을 딴다.

딴 달을 가마솥 뚜껑 위에 올려놓는다.

우물 속에도 깊숙이 넣어 놓는다.

 

그녀는 낮에도 달을 딴다.

불 꺼진 방에 옮겨 놓기도 하고

고향을 향해 널어놓기도 한다.

바닷가에 떠있는 뱃머리 위에 걸어 놓기도 한다.

 

어머이, 글쎄 고향에서 본 달이 여기에도 있더이다.

달이 꼭 닮아 있더이다.

 

그녀의 섬에 달이 뜬다.

고향의 달이 그녀의 섬에도 뜬다.

 

 

 

 

      

    

 

박하리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계간 리토피아 편집장.

 

시집 말이 퍼올리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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