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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卵生)의 계보학 외9편 / 안차애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8/09 [07:38] | 조회수 : 649

 

▲     © 시인뉴스 Poem



난생(卵生)의 계보학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다투는 것만큼 의미 없는 싸움은 없다지만 나는 혁거세나 수로왕의 탄생, 저 난생의 설화를 가지고 싶다 마리아가 낳아주지 않아도 되는 알, 프로이드 식 거세의 협박이 무섭지 않은 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족 서사를 꿀꺽 삼키지 않아도 되는 알

 

  들판이나 지푸라기 위를 굴러다녀도 되는 알, 비린내 나는 자궁의 추억이 없는 알, 삼각 사각 관계의 입맞춤이 필요 없는 알뻐꾸기 알처럼 남의 둥지로 데굴데굴 굴러가도 되는 알, 얼굴이 없어서 어디라도 스위트 홈을 꾸미는 알, 졸업 앞으로 나란히 취업 앞으로 가 따위 명령어가 필요 없는 알막판에 몰려 알까기로 휙 날아가 구석에 처박혀도 국물이 새지 않는 

 

  슬금슬금 몇 개를 주워내도 금방 비슷한 하양이나 검정으로 다시 채워지는 알, 발버둥 칠 팔다리가 없어서 관절염도 앓지 않는 알, 아무런 기호嗜好의 감정을 가지지 않아서 모든 감정의 기호記號가 되는 알떠나고 난 뒤에 빈집의 고요로 승부가 드러나는 알, 지붕 위로 굴러가 허공의 경계를 찢는 알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알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알도 뾰족한 입술을 가지지는 않아서 당신을 지우고 싶을  반투명 막을 뒤집어쓰고 난생의 첫 번째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알

 

 

 

 

 

 

 

 

 

뜻밖의 파랑

 

 

오래 수맥水脈을 놓친 건기일 땐 파랑명상법을 한다

세상의 모든 색이나 사물에서 파랑을 찾을 것

파랑에만 집중해서 가장 안쪽의 파랑에 닿을 것

파랑이 쏟아내는 물줄기에 심중의 심부深部까지 온통 적실 것

 

찾기로 작정하면

보라나 연두, 분홍이나 주황은 물론 갈색이나 검정에도 뜻밖의 파랑이 들어있다

보기로 작정하면

격정의 눈동자, 기쁨의 이마 전, 석류빛 웃음, 굳건한 등줄기 등에도 소량이거나 극소량의 파랑이 박혀있다

 

파랑은 중심의 문장

파랑은 그림자의 저변 

먹는 줄도 모르고 섭취하는 염분의 함량처럼 파랑의 농도가 색들의 심지를 틀고 있다 

소실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첫걸음의 명도

높고 맑고 쓸쓸한 광합성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채도

    

니체와 헤세의 첫 문장 사이로 걸어 나오던 파랑의 발자국

첫아이에게 첫 젖을 물리던 날의 푸른 전율

그 아이를 잃고서 파랑이 통째로 곤두박질치던 파탄의 하늘,

파랑에 귀를 붓고 파랑에 입맞춤하고 파랑에 거꾸로 처박힌 적 있다

 

흘러가는 파랑,  튀어 오르는 파랑, 겹겹 주름지는 파랑, 회오리치는 파랑조금씩 휘발하는 파랑, 사태로 쏟아지는 파랑, 꼭꼭 눈부터 숨기는 파랑저요저요 발돋움하며 눈 맞추는 파랑가장 가까이 다가오는 파랑, 가장 멀리 사라지는 파랑파랑을 둘러쓰고 가로지르고 일용한 적,

있다

브라만보다 고귀한 비색의 몰락에 통째로 빠진 적 있다

 

파랑은

바닥이 없어서 무한의 슬픔을 댄다

발꿈치도 닿지 않는 뜻밖의 세계를 범람한다

 

 

 

 

 

 

선인장의 유래

 

 

 

생각도 패턴 같은 것이어서

반짝이는 것들은 반짝임을 부른다

출렁이는 것들은 출렁거림을 변주하여 한 시절을 완성한다

 

휘파람 소리가 휘파람을 부르듯

하트모양은 별모양의 생각들을 나무의 청사진으로 펼쳐놓을 때

코기토 에르고 숨

골똘하고 뾰족한 한 잎의 생각이 태어났다

 

생각이 골똘해지면

다당류의 수액이 잦아든다

슬금슬금 마르는 사탕 맛의 날들

성대 결절은 통로의 물기가 마르며 찾아오는 병

유선형이파리는 과열량이거나 과소비를 부르는 보급형 문양이었다

 

새로운 패턴의 시작은

생각의 자세가 단단해지거나 연필심처럼 뾰족해지는 것

한 점 흑연빛 시력으로 모래의 갈증을 짤랑거리게 하는 것

 

나무의 결기가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뚫는다

지나가는 공기의 흐름을 붙잡는다

물 냄새를 잡아챈다

가시 그림자는 가까스로 이슬방울을 글썽이다 마침내 물결소리를 낸다

 

생각도 패턴이어서

사막의 유일한 가시성채는 초록을 전파한다

쌍봉이 허물어진 낙타의 발자국은 구원을 전도한다

 

우리가 오랜 밀월이었다면 이제 패턴을 바꾸어야 할 때

또 한 생각,

무중력의 떡잎 같은 것을

 

 

 

 

 

 

 

사암(砂巖)의 기록

 

  

 

몇 몇 개의 자음과 모음이 가라앉았다.

암석의 무늬는 놀란 심장이 시시각각의 세상을 읽은 흔적.

 

어두움과 차가움이 서로를 밀어내었으므로

덜컹거림과 삐죽거림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한 점 관계의 점도粘度도 없이 조여 오는 폐색의 기운을 읽는다.

유년이 창문을 버리고 내부의 회오리를 발명할 때

지층의 텍스트는 페이지를 늘여간다.

 

나와 엄마아버지를 굳어가는 자모음에 배치하는 건

프로이드가 제창한 화석의 구조.

불량과 불온인 줄도 모르고

기억과 고백은 서로가 서로를 복제한다

 

시간의 심장을 꺼내놓듯

눈물은 흰 그림자를 돌 밖으로 흘려놓는다.

바람의 사선斜線과 물결의 연흔이

만난 적도 없는 서로의 기울기에 기대는 사이,

 

수수만년의 눈빛들이 눌린 시간 근처만 바라보겠다는 듯이

반짝임만을 반짝거린다

언제라도 쏟아지고 싶어서 글썽거린다.

 

  

 

 

 

 

 

터져버린 버찌의 기분처럼

 

  

 

버찌가 떨어져 내린 철에는

울지 못한다

함부로 깨진 눈빛을 밟고 가는 벚나무 길의 여름 오후엔 울지 않는다

 

흘러넘친 눈물의 기분이

터져버린  버찌의 세상을 짐작하듯이

속을 들켜버린 검은색의 감정이

함부로 짓물러진 발밑의 적막을 이해하듯이

 

깨지고 나서야 검은 빛은 파피루스의 장정裝幀이 된다

 

그때

최루가스 냄새는 우리의 스물을 이해하지 못해서

우리의 눈물은 나동그라지는 무릎을 다 적시지 못해서

제각각의 방법으로 캄캄해졌다

 

범람을 위해 차오르는 눈물은 없었지만

모멸을 짓기 위해 익어가는 색깔은 없었지만    

지레 상하거나 서둘러 깨지거나, 각개전투의 형식으로

우리는 납작해졌다

 

버찌는 검은 눈물을 터뜨려 뜨거운 건기를 건너가고

흠 없는 이들의 낯빛을 깨쳐 두부빛 새벽은,

간접화법으로 왔다

 

검은 얼룩사이에 콕콕 박힌 버찌 씨앗처럼

희붐하게 발자국을 밀어 올리는,

 

어떤 기척이 있다

 

 

 

 

 

 

 

 

끝이라는 말

 

 

문턱을 넘는 말이 아니고

아직은 문턱을 넘고 싶지 않다는 말

 

고장 난 로봇청소기처럼 덜컹거리는 어깨뼈를

가만가만 쓸어달라는 말

남은 한 걸음 사이를 한없이 늘이고 싶어서

울돌목처럼 빠른 감정의 흐름에 맞불을 놓는 말

 

사납고 싶지 않은 사나운 말

진짜 끝인사는 혀 밑에 숨겨둔 끝에서 두 번째의 말

깨물어 붉어진 잇자국처럼

아직은 피멍이라도 남겨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

 

비수의 안쪽 날을 시퍼렇게 들이 미는데 

칼날의 이빨만 왕창 내려앉은 말

한 움큼의 비명을 향기로운 꽃처럼 당신에게 뿌리는 말

 

슬픔의 진자운동이라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보편적

고백적

이별 유예선언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말

 

이제 정말 끝이야

 

 

 

 

 

 

 

차도르

 

 

 

당신의 안과 나의 바깥은 얇은 접점도 없이 몇 생의 어스름을 끌고 간다

 

나의 웃음은 아직 당신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당신의 고요는 아직 함량에 이르지 못했다

 

당신의 목록 속에 없는 나를 찾아서 그림자의 그림자까지 그늘진다

 

포개진 길들이 거품처럼 끓어오를 때 오후 두시는 산화酸化를 시작한다

 

오늘이 오늘의 감정을 덮어쓰듯

 

지금이 지금의 얼굴을 휘감듯

 

나는 다만 당신의 표정을 펄럭인다

 

내 안에서 물갈퀴 돋는 소리를 바람만 듣는다

 

 입이 아가미처럼 뻐끔거리는 것을 오후 두시의 햇살이 따라 한다

 

나의 바깥은 당신이지만 당신의 안은 내가 아니다

 

아직 내 발자국은 당신의 발꿈치를 물지 못했고

 

당신의 눈빛은 내 귓바퀴에 이르지 못했다

 

한 겹 행간 속으로 스며들지 못해서

 

당신의 문장은 아직 본문 바깥에 있다

 

 

 

 

 

 

 

 

 울금

 

 

 

키 큰 작물이라고 생각했던가

딱딱한 과채라 생각했을까

 

파초와 칸나 중간쯤 되는 울금 잎 보고 놀랐네

시월 하순에도 밭둑 가득 차오른 푸른 잎사귀

너무 넓고 겁먹은 표정

 

앎 직하지만 모르는 이름

조금 예쁘고 조금 서럽기도 한 이름

늦가을에 피운 꽃송이가 부끄럽다는 듯

늘어뜨린 잎 속에 엉거주춤 꽃을 감추고 있는 울금

 

나는 부모님이 시골의 백모에게 몇 년간 대리양육을 부탁한 아이

친딸이 아니어서 백모는 늘 예삐라 불렀지

예쁘지 않아도 한사코 예쁘다고 불러주는 이름처럼

내놓고 울지도 못하는 울먹

 

파랗게 질린 게 아니라고

한사코 처음의 색깔과 지문을 꼭 쥐고 있지

촘촘히 금간 시간을 깨물고 있지

아직 처음의 궁음도 열지 못한 얼굴

꼭 깨문 각음도 닫지 못한 몸짓

        

이제 그만 쏟아져도 괜찮아

가을은 슬프고 아픈 엄마

꼭 꼬집어 우릴 붉게 울려주지

 

딸꾹질로 울음을 참고 있는 표정

지레 입술부터 깨무는 버릇 

착한 얼굴을 터뜨려 쩌렁쩌렁 울어보렴

예쁜 이름 밀어서 마음껏 사지를 버둥거리렴

 

 

 

 

 

 

편암(片巖)의 기록

 

 

 

석영이나 운모의 얇은 층에 새어든

아침은 잎사귀 빛이다.

 

돌 속에서 자라는 돌은

동종교배처럼 푸르게 눈이 먼다.

하나를 지키기 위해 하나를 떼어주는 편리片利,

어제를 지운 마음은

책력의 낱장처럼 저문 하루를 떨어뜨린다.

 

접힌 부록에서 목차를 꺼내는 사이,

몇 움큼의 낱말이 마르거나 변질되었다.

사랑이 사탕 껍질보다 쉽게 구겨졌으므로

질문의 입은 켜켜 감정들을 뭉툭 베어 물 뿐.

 

박층薄層에선 웨하스 맛이,

습곡 이후의 사건에선 젤리 맛이 나는 모양이지만

외압이거나 외세, 외부거나 외풍이 없던 시절은

없었으므로 애초에 정답은 없었다.

 

점령군처럼 발자국을 뭉개며

찾아온 변성變性.

해저 탁류보다 무거운 세력이 다녀갔던

기억의 암록이 내내 반짝거리고,

 

가정법도 감탄사도 없이, 변심한 얼굴은

아침에 예비 된 저녁의 빛깔로

당신을 기다리다 천천히 어두워진다.

 

 

 

 

 

 

 

낮달의 반쪽

 

 

 

눈에 띄지 않아서 눈에 띄는 저속低速의 프로필

낮에 보이는 온달은 없다

 

매직아이를 보듯 파인 상처에 시선을 맞추면

막 핀 둥근 통꽃의 얼굴이다

 

서쪽으로 하강하는 햇살이 잠시 밀어 넣어준 빛 숨이

초여드레 반달의 실루엣을 일으킨다

점선 한편으로 접혔던 그늘의 양감이 수면 위로 차올라

자전의 궤도를 완성하는 시간

 

둥근 눈물문양 퍼즐 속에

내 얼굴을 빠져나간 네 오랜 표정이 걸렸다

희미한, 낯익은, 멀어지는, 없는,

 

저 횡격막

 

손 뼘으로 짚어보는 허공만큼

나에게 돌아오고 있는 어디쯤이라 믿는다

 

 

 

 

 

 

 

 

⸺⸺⸺

      

  제로

   루치오 폰타나, 1960

   절개를 포함한 캔버스에 유채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보는 자의 눈빛을 보라. 망설임이나 독백은 얼마나 화려한 유채색인가. 빛과 어둠의 경계를 여는 침묵의 칼날이 ,   

 

  캔버스를 가로질렀다. 루치오 폰타나의 그림 제로는 가슴뼈의 위쪽과 우심방의 아래 부위가 슥, 관통 당했다. 찢긴 선 사이로 검은 어둠이 담즙처럼 차오른다.   

 

  이젠 피 따위는 외부로 흘리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 베어진 시간의 검은 구멍을 들여다본 자와 보지 못한 자 슥, 끊어진 크레바스에 한 발을 디밀어 넣은 자와 넣지 못한 자 슥, 베어진 검은 구멍이 점점 자라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    

 

  나는 실꾸리가 풀리듯 검은 구멍 속으로 끝없이 감겨 들어간다. 젖은 습자지 빛에 빨려 메아리도 캄캄하다. 검은 틈 속으로 몸을 숨긴 뒤 흔적 없이 깊어지기만 하는 아가, 아기를 업은 아가, 아기를 부축한 또 아가야, 여기는 울음도 눈물이 되지 않는 지역의 농도, 잠시 빛살과 틈새 사이로 번지점프를 하듯 

  

  , 가로질렀을 뿐인데 이면이 없다. 매일 자라는 검은 틈을 키우는 자들은 그림자가 없다. 부풀어 오른 칼자국 사이로 이곳의 빛 무늬와 저곳의 검은 물결을 동시에 본다. 소실점이 없다.

 

 

 

 

 

 

사랑스런 당신의 이마 

    모비딕 풍으로

 

 

인상학도 한때의 우화일 뿐

굴곡진 이목구비에 기댈 수는 없다

 

얼굴이

마침내 제 표정을 버리고 흐린 벽으로 남았을 때

이마는 묵묵히 깊어지는 상형이다 

흰 배의 선폭처럼 이맛전에 물결과 바람을 놓을 때

고래는 부력의 방향으로 가만히 떠오른다

 

수부들의 이마에 주름살 몇 개 새겨지듯

해류가 서로 엉기다 외눈박이 허리케인을 일으키듯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득이고 몇 철이 동시에 어른거리는 것은 

다만 고래의 이맛전에서 일어난 일

 

가장 먼 봄이 이슥토록 머물다 간다

이번 생의 흐린 문장들은 사이렌의 노랫소리보다 독하다

시간은 내내 역류 중이어서

수면 위엔 양피지의 주박이 손금처럼 환하다 

 

당신의 수심이 깊어질 때

표정 바깥이 표정으로 그만 갸웃해질 때

흰 두루마리의 오랜 헌사가 있다

 

 

 

 

 

안차애 약력

 

200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원

문예진흥기금 및 문화재단기금 수혜

계간 <시산맥> 편집위원

시집 <불꽃나무 한 그루> <치명적 그늘>

교육도서 <시인되는 11가지 놀이>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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