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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 외9편 / 최서림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8/20 [23:33] | 조회수 : 707

 

▲     © 시인뉴스 포엠



삼천포

 

 

몸에 항구를 지닌 여인들은 사월이면

엉덩이가 삼천포 앞바다 만해지곤 했었다.

쫓기는 남자들이 살그머니 들어와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다가곤 했었다.

무언가를 놓아버리지 않으려는 듯,

죽어서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갈치처럼 날을 세워 잠들곤 했었다.

NLPD도 몰라서 더 큰 여자들,

여자가 아닌 여인들의 바다가 있었다.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는 바다.

 



 

시인의 재산

 

 

누구도 차지할 수 없는 빈 하늘은 내 것이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새털구름도 내 것이다.

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내 것이다.

너무 높아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다 내 것이다.

 

 



 

아청(鴉靑)빛 시간

 

 

淸道라는 아청빛 시간에 푹 젖었다 왔다

 

시인인 나를 부러워하는, 나보다 더 시인다운 농부를 만났다

 

소들이랑 한 식구처럼 살고 있었다 소를 닮아 눈망울에

 

초겨울 저녁 검푸른 물빛 하늘이 출렁출렁 담겨 있었다

 

마들이라는 두꺼운 시간 속에 아청빛 시인이 살고 있다

 

간판들이 켜질 무렵 얽매이지 않는 말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도봉산 겨울 능선 위 저녁 하늘빛이

 

노시인의 눈에 흘러내릴 듯 가득 차 있다

 

광주 진월동에는 이른 새벽부터 푸른 저녁까지

 

편백나무로 시를 짜는 목공이 있다

 

총알이 스친 다리처럼 시리지만

 

옷깃을 여미게 하는 묘한 빛깔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말에 찔리고 베여 갈라터진 이 땅 어디에서도

 

붕대 같은 저녁이 찾아오듯이

 

시의 순간만큼 짧은 아청빛 시간이 왔다 간다

 

 


 

새도 듣고 바람도 듣고

 

 

천산남로 어떤 종족은 아직도,

땅이나 집을 사고팔 때

문서를 주고받지 않는다.

도장 찍고 카피하고 공증을 받은 문서보다

사람들 사이 약속을 더 믿는다.

돌궐족이 내뱉는 말은

하늘도 듣고 땅도 듣고 새도 듣는다.

낙타풀도 지나가는 바람도 다 듣고 있다.

글자는 종이 위에 적히지만

말은 영혼 속에 깊숙이 새겨진다.

바위에다 매달아 수장시켜버릴 수도

불에다 태워 죽일 수도 없는 말.

 

 

 

 

애수의 소야곡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요마는

 

장인이 무얼 해 먹고 살았는지

아내는 도통 말해주지 않는다.

얼굴에 쓸쓸한 바람이 이는 장인은

술기 오르면 곧잘 남인수 노래를 불렀다.

오염된 바닷물처럼 시커먼 세월에 부대끼다

가난하게 돌아가신 장인 나이의 아내는

생전 안 보던 가요무대를 다 본다.

애수의 소야곡을 듣다 갑자기

고향엘 가고 싶다 한다.

초등학교 가는 길에 탱자울과 보리밭,

문둥이가 숨어있다던 광안리 그 너른 보리밭이

자꾸 눈에 밟혀온다고 한다.

아버지처럼 바람이 술술 새는 집이 보고 싶고

겨울 바닷바람에 광목처럼 펄럭이던

중학교도 못 간 친구들이 보고 싶다 한다.

검정물 들인 싸구려 양복처럼

헐렁해서 속이 꽉 들어찬 풍경이 보고 싶다 한다.

 

노래도 영화도 슬픈 시절이 있었다.

코미디 웃음조차 슬픈 시절이 있었다.

 

바람도 문풍지에 싸늘하고나

 

 



물금

 

바닷물이 숭어 떼처럼 파닥파닥 밀려올라오다 허리쯤에서 기진해 멈춘다 날숨과 들숨으로 강물과 혼몽히 몸을 섞는다 썰물을 내려 보내는 갯벌이 그리움으로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곳, 그녀와 나 사이 매일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다 내 그리움도 그곳까지, 그 선까지만 밀물져 가다가 해매다 돌아오고 만다 그녀가 사는 곳이 곧 물금이다 대추나무 잎에 반짝이는 햇살처럼 영혼에 일렁이는 물결무늬처럼 떠있는,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 물금, 물금 한복판에서 찾아 헤매게 되는 물금, 농익은 감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철퍼덕 맨땅에 떨어져 산산이 흩어지는 곳, 초로의 적막이 물푸레나무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그곳이 물금이다

 




오동나무

 

 

예로부터 저쪽 한량들이

기타나 만돌린을 가지고 놀았듯이

이쪽에서도 생활에 구멍 뻥뻥 뚫려있는 축들이

거문고나 피리를 만지며 흥성거려 놀 줄 안다

피리나 대금은 속을 통과해 나오는 바람으로 소리가 나는데

그 속이란 게 그저 뻥 뚫려 있는 듯해도

천태만상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란 실()의 다른 이름인 법,

거문고 마디마디 울혈 진 가락이 하늘과 땅 사이를 진동시킬 수 있는 이치도 알고 보면

뜯는 이의 마음이 텅 비어서 가득 차 있기 때문인 것,

텅텅 비어 있는 마음에서 저며 나와 푸르게 여울져 흘러가는 소리가 바로

뜯는 이의 혼이자 거문고의 정신인 것,

잘 익은 가을날 오동나무를 베어 보라

긴 줄기를 따라 의 정신으로 꽉 메워진

텅 빈 구멍이 나있을 것이다

잔뜩 움켜쥠보다 손을 탁 놓아 비워버림이

자유롭다는 것을 진즉 알았는지

오동은 씨앗시절부터 그 안에 구멍을 키워왔을 게다

마음에 구멍이 뻥뻥 뚫려있어 놀 줄 아는 축들만이

속이 텅 비어버려 쓸모없는 오동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

구멍 없는 것들은

놀 줄도 놀 자유도 모른다

요새 사람들 노는 게 어디 노는 것인가

 

 

 

 

주점 블루’, 그리고 사막

 

 

뒷골목, 이 빠아에 들어오면 대낮에도

축축이 고여 흐르는 푸른빛과 만난다

부딪힌 삶의 모서리에서 삐져나온 어둠들이

알코올로 적당히 절여지면

어둠은 멍든 삶의 빛을 내며 승화된다

때론 멍든 삶이 아름답다

푸른빛을 좇아 멍든 삶들이 향일성 벌레처럼

모여든다

재즈 음을 타고 흐느적, 거리는 깊고 푸른 강물은

나를 떠밀고 따라오던, 빌딩과 빌딩 사이

긴장된 햇빛을 門前에서 밀어낸다

햇빛이 더 이상 수색할 수 없는 소도, 주점 블루에

날마다 바다가 떠오른다

대낮에 술을 마시고

푸른빛의 흐느적임을 따라

알코올은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간다

알코올이 온 몸에 불을 지르면

몸은 바다로 떠오른다

빌딩이 사라진, 바람만 부는 모래바다

벌거벗고 술 마시는

꿈틀거리는 사막, 이곳에서 사람들은

푸른빛을 마신다

 

 



푸른빛으로 돌아오다

 

 

마른장마에도, 온통, 푸른빛이었다

 

묵계리(默溪里) 가는 길은 푸른빛으로 돌아오는 길, 푸른빛은 늑골 사이로 나온다 심장에 새치가 희끗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새치 사이로 옛 강이 슬며시 다시 흐르고 물새가 흩어진다 깊은 물 우에서 햇빛이 꺾여 푸른빛을 낸다 굽은 빛이 속살 깊숙이 파고든다 안개를 먹은, 혼돈의 급류에 끌려 다녀 무릎 꿇은 중년의 빛은 아름답게 휘인다

 

여행은 굽은 마음이 잠시 허리 펴는 것, 길은 늑골 밑에서 기어 나와 그곳으로 돌아간다 나이 삼십 넘으면 인생에서 송장냄새가 난다던 후배, 그의 여로(旅路)는 아직 햇살 뒤꽁무니에 매달려 발버둥치리라 내게도 빛이 직선으로만 운동하던 때가 있었다 강바닥까지 비추며 물살을 몰아가던

 

사춘기, 어린 늑골 사이로 늘 강물이 깊었고 물새가 하얗게 울었다 햇빛을 잡아먹고 강은 푸르게 내장을 뒤척였다 얼굴 없는 푸른빛 속에서 자맥질하다 잠들고……어느 날 햇빛 아가리 속으로 뱉어져……

 

묵계리까지 여행은, 운 안개 속에 먼저 가 숨어 있는 나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청도장

󰠏󰠏 이서국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입구

 

1

 

청도 사람에게 이서국은 세상을 보는 거울이다.

이 세상이 이서국의 안이고 밖이다.

 

 

2

 

이천 년 청도 사람 밥줄 이어온 장터 어귀

오동나무 밑 생선 파는 늙은 과부 장씨, 대대로

장터 살아온 어머니 닮아 새까맣고 기름기 빠진 얼굴에

자잘한 욕정과 좌절이 검버섯으로 박혀,

인생살이 모든 게 그저 목쉬는 흥정으로

그에게 세상은 절인 고등어다.

아비도 모르는 아이 지우고 기어 들어와

실밥처럼 풀어진 딸년 생각에

파장 때 남은 고등어로 잉어 한 마리 사

타박타박 낮은 고개 넘어오는

장씨는 더 작아 보였다.

서쪽 하늘은 감빛이고

 

감빛 노을 받으며 장씨 조상 이서국 늙은 수렵꾼,

값비싼 꽃사슴 가죽으로 어쩔 수 없이 바꾼 잉어 들고

솔개에 채인 수탉 되어 힘없이 낮은 고개 넘는다.

집에는, 작년 봄 빚값으로 중랑장에게 끌려갔다가

병들어 쫓겨 온 임신한 딸, 기다리다 울며

감빛에 젖은 도라지 꺾는다.

도라지는 퍼런 눈물 흘리고.

수렵꾼에게 삶이란 힘들게 구입했다가

손쉽게 잃어버리는 화살촉이거나

자신도 아끼는 닳아빠진 곰가죽옷이다. 하지만 또

가마솥에 푹 고아낸, 쓸개를 터뜨리지 않고

짜내야 할 잉어이기도 하다.

 

 

3

 

잉어 고고 있는 솥 말없이 바라보며 장씨 딸,

납빛 얼굴 노을에 담그고 도라지 꺾는 손에

이서국 수렵꾼 딸 흘린 눈물 젖는다.

청도장서 어머니 따라 생선장사나 할 그녀, 지금

뼈까지 녹아내린 이서국 잉어 즙 짜내고

 

 

* 중랑장(中郞將) : 삼한 시대 통치계급의 하나.

* 이서국 : 경북 청도 지방에 있던 고대 小國의 하나.

 

 

 


최서림 시인 약력:

경북 청도 출생, 1993 현대시등단, 서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구멍, 버들치, 물금시론집 말의 혀. 클릭학술문화상,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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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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