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피리 속 교실 외 9편 / 권기덕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9/28 [19:47] | 조회수 : 371

 

▲     © 시인뉴스 포엠



피리 속 교실

 

 

 

 

아이들의 지친 귀를 모아 우주로 떠난다

 

피리를 부는 동안

우주에는 비가 내리고

귀들이 가득한 교실

태양에서 죽은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귀를 쪼아 먹지 마세요)

 

귀 하나가 손을 들고

나는 발표기회 대신

붉은색 분필로 눈동자를 칠해준다

몰래 스캣을 한다

 

(얘야 너는 눈이 없단다)

 

먼별을 넣었다 빼본다

창밖으로 빗물은 점점 쌓여가는데

꽃잎은 찢어지고 찢어져

이명(耳鳴)은 나에게 보내는 추상화

 

귀에서 검은 나비가 날아오른다

그림자가 없는,

없는 얼굴과 없는 몸 주위를 맴돈다

교실에서 또 귀들이 가득한 교실이 생기고

지구는 점점 멀어져간다

 

귀 먼 아이들이 하나둘씩

눈동자를 씻기 위해

가시나무에 내려앉는다

 

죽은 새들이 내 눈을 쪼기 시작한다

 

 

 

 

창고 창고창고창고

 

 

 

 

창고에서 몇 달 전의 구름을 죽였어

내 손은 빛과 빛 사이에 떠도는 흰 손수건처럼

몸이 없었지

구름을 톱으로 자르고 망치로 두드려

작은 의자를 만들었는데

금세 흘러내렸지

 

난 그늘의 농도가 낮다고 판단했어 창고의 창문을 검은 마분지로 가리고 창고 속에 다시 창고를 만들었어 없는 팔다리가 도와주었지 목은 없었지만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서 피 냄새가 났어 트램펄린 위에서 박쥐가 보였지 작은 창고 속은 더 어두웠어 물속에 두고 온 눈동자가 떠올랐지만 불행한 탐구*자가 되어야만 했지 남은 구름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어

 

못 박는 소리가 한차례 총성처럼

울려 퍼지고

아주 작은 의자가 만들어졌어

사라진 내 몸에서도 빛이 났지

울림 속 울림에서 이름들이 흩어졌어

 

잠시 뒤,

여분의 구름은 사라졌고 의자만 남았어

의자는 무중력자처럼 둥둥 떠다녔고 나를

살인자라고 놀렸지

작은 창고 속에 더 작은 창고가 필요했어

아주 작은 창고를 만들고 의자만 밀어넣었어

의자는 점점 직사각형으로 변해갔지

 

창고 속 창고 속 창고 속 창고처럼 말이야

 

 

*조르주 바타유의 불가능중에서.

 

 

 

 

스프링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자 새가 되었다 나는 새가 아닙니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되었다 나는 무화과나무가 아닙니다 그러자 무당벌레가 되었다 나는 무당벌레가 아닙니다 그러자 열매가 되었다 나는 열매가 아닙니다 그러자 바람이 되었다 나는 바람이 아닙니다 그러자 물이 되었다 나는 물이 아닙니다 그러자 뱀이 되었다 나는 뱀이 아닙니다 그러자 벨트가 되었다 나는 벨트가 아닙니다 그러자 구덩이가 되었다 나는 구덩이가 아닙니다 그러자 스피커가 되었다 나는 스피커가 아닙니다 그러자 텅 빈 복도가 되었다 나는 텅 빈 복도가 아닙니다 그러자 스프링클러가 되었다 나는 스프링클러가 아닙니다 그러자 지하실에 누운 고양이가 되었다 나는 지하실에 누운 고양이가 아닙니다 그러자 가짜 반지가 되었다 나는 가짜 반지가 아닙니다 그러자 깨진 거울이 되었다 나는 깨진 거울이 아닙니다 그러자 벽면에 반사된 그림자가 되었다 나는 벽면에 반사된 그림자가 아닙니다 그러자 기차 칸에서 졸고 있던 얼굴이 사라지고 우리는 덜컹거리는 생각만 남았다가 되었다 기차 칸에서 졸고 있던 얼굴이 사라지고 우리는 덜컹거리는 생각만 남았다가 아닙니다 그러자 말이 되었다 말이 아닙니다 그러자 말이 되었다 말이 아닙니다 그러자 밤을 볼 수 없는 눈동자가 되었다 밤을 볼 수 없는 눈동자가 아닙니다 그러자 박쥐가 되었다 박쥐가 아닙니다 그러자 내가 되었다 아닙니다 ……

 

 

 

 

기타리스트와 이상한 가방

 

 

 

 

 

동대구역 대합실에서 기타를 치던 내게 소년이 말했다 아저씨 줄 하나가 끊어졌어요.” 맞다 기타 줄은 끊어졌다 끊어진 기타 줄로 음악을 연주할 순 없는 걸까? 아니다 끊어져야 살 수 있다 끊어진 것만이 고요에 저항할 수 있다 끊어진 기타 줄은 원래 끊어져 있었고 애초부터 원곡을 온전히 연주할 생각은 없었다 소년은 집 나간 엄마를 기다린다고 했다 집 나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할 뻔했다 아저씨 애인 있어요?” “, 아니.” 나는 애인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다 끊어진 기타 줄로 연주할 때마다 애인과 헤어졌고 애인이 없어도 끊어진 기타 줄을 연주하면 금세 애인이 생겼다

 

소년에게는 가방 하나가 있었는데 캐리어라고 말했지만 중국집 양철 가방에 가까웠다 연주가 재개되자 소년은 양철 가방에서 가위를 꺼낸 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소년은 눈물을 흘렸고 얼마 후 끊어진 기타 줄을 위한 퍼포먼스라며 밧줄로 내 양발을 꽁꽁 묶었다 양철 가방에서 여성용 화장품들이 쏟아졌고 간혹 새 울음소리도 들렸다 기타 연주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건 차라리 원곡을 흉내 낸 창작곡에 가까웠다 없던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 박수를 쳤다

 

 

 

 

웰컴 투 어글리!

 

 

 

 

슬리퍼로 벽을 만들었어요

 

슬리퍼와 슬리퍼 사이

 

바람이 불고

 

틈이 생겼지만

 

슬리퍼는 슬프지 않아요

 

슬리퍼는 어디론가 늘 맴돌아요

 

슬리퍼는 비 오는 날, 흘러내려요

 

슬리퍼슬리퍼슬퍼리퍼슬슬리퍼리슬슬퍼슬리슬퍼슬리리퍼퍼슬리퍼퍼슬리퍼슬슬리퍼슬리슬슬퍼퍼슬퍼슬리퍼퍼슬슬리퍼슬리리리퍼슬슬퍼퍼슬리퍼리퍼슬슬리퍼슬리퍼슬슬퍼슬퍼슬퍼퍼슬리퍼슬슬퍼퍼……

 

슬리퍼 벽에서 문이 열리면 빨강모자 쓴 그녀가 슬리퍼를 신고 등장해요

 

슬리퍼는 얼굴이 없어요 슬리퍼는 가슴이 없어요 슬리퍼는 감정이 없어요 (그런 슬리퍼를 사랑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3!) 슬리퍼는 진실이 없어요 슬리퍼는 눈물이 없어요 슬리퍼는 할 말이 없어요 슬리퍼는 친구가 없어요 슬리퍼는 돈이 없구요 슬리퍼는 직업도 없어요 (그런 슬리퍼를 사랑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3!) 슬리퍼는 가족과 애인이 없어요 슬리퍼는 우산이 없구요 슬리퍼는 그림자도 없어요 슬리퍼는 색깔이 없어요 슬리퍼는 음악이 없고 슬리퍼는 담배는 있는데 불은 없죠 슬리퍼는 슬리퍼가 없어요 슬리퍼는 슬퍼가 없어요 (그런 슬리퍼를 사랑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3!)

 

벽 너머 당신은, 당신이 아닌 당신

 

총을 겨누고

 

거울 밖 겨울을 견디며

 

슬리퍼들이 걸어가요 벽이 움직여요 벽이 벽을 따라 걸어가요 벽이 아닌 벽을

 

 

 

 

 

그 창문 속 새장

 

       

 

깨진 창문에서 새소리가 흘러나왔다

날선 유리구멍에서 풍경이 비명을 질렀다

새를 잡기 위해 손을 창문 속으로 집어넣었다

단단한 뼈 같은 게 만져졌다

 

 

 

 

 

창문 속 새장

 

 

 

그림자, 시계, 구름이 흘러내린다

낯선 내가 서 있고

나는 창문 속 새장에 갇힌다

새장에 눈이 내린다

 

창문 속 새장

 

몸에서 겹소리가 났어요

형광불빛과 종소리가 만나 나무가 된 것

실내장식과 낙화로 빚은 토르소

여러 개의 눈과 다중 목소리

켜켜이 쌓인 햇살이

무뇌아처럼 웃을 때

 

 

창문 속 새장

 

 

 

 

나는 처음부터 몇 마리의 새였는지 몰라요

유리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려요

내 눈물은 나무들 울음소리로 가득해요

잉크처럼 번져나가는

눈들

 

창문 속 새장

 

별빛이 깃털에서 알을 낳아요

날지 못하는 나는

무덤이 되기로 해요

내가 나를 죽이고

또 다른 창문에 둥지를 틀 때

 

창문 속 새장

 

창문 속 새장

 

창문 속 새장

 

그리고

 

새장 속 창문

 

검은 새가 날갯짓을 한다

여러 명의 내가

창문들 사이에서

찢어진다

사라진다

 

 

 

 

 

 

은하약국999

 

 

      

 

약사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권기덕 할아버지와 권기덕을 불렀네. 권기덕 할아버지와 권기덕은 처방전을 확인했네. 권기덕 할아버지는 글씨가 잘 안 보인다며 약사에게 읽어달라고 했네. 권기덕이 대신 읽어주었네. 권기덕 할아버지가 권기덕에게 반갑다고 말했네. 권기덕은 목이 많이 부어있어 고개만 끄덕거렸네. 권기덕 할아버지는 권기덕에게 자신은 몽상가이며 우주를 활보하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호수에 들어갔고 감기몸살이 걸렸다고 했네. 그리고 사냥개가 자신을 계속 따라왔다고 말했네. 다음에는 절대 자신을 만나면 안 된다고 권기덕에게 당부했네. 권기덕은 이 행성에서 절망을 쓰다듬을 수 있는 건 상대적인 시간밖에 없다고 대답했네. 권기덕 할아버지와 권기덕이 다시 불렸네. 둘 다 똑같이 처방된 항생제를 살피며 약사를 쳐다보았네. 약사가 자신을 못 믿느냐며 화를 내었네. 사냥개 소리가 들렸네. 약국유리문을 열자 깜깜한 우주였네. 유리건물들이 솟구치고 있었네. 약국 앞에서 사라지는 권기덕 할아버지 뒷모습을 권기덕은 한참 동안 바라보았네.

 

 

 

 

 

포토그래프몽타주 No.-6 지하철

 

 

 

 

지하철문이 닫히고 사람들 머리가 잘린다

발목이 잘린다 끌려온 길들이 잘린다

출입문 비상콕크에

철썩,

흔들리는 손잡이에

철썩,

맞은편 할머니마스크에도

철썩,

철썩, 철썩, 그림자가 달라붙는다

 

버켓백과 장갑, 스마트폰이 뒤바뀌고

애인의 문자메시지는 낯선 남자의 귀에 걸린다

당신 하이힐은 점퍼에 어울리고

당신 목도리는 열차바닥에 더 적합하다

있어야 할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은 우리를 오려붙이기 위해 땅속을 달린다

 

철썩,

 

당신의 상상은 그의 온몸을 조각내고 있군요

하지만, 이곳은 평화로운 흑백사진

당신은 나에게 말한 적 없고

당신은 나를 살인한 적이 없어요

누군가를 그리워해본 사람은

 

철썩,

 

열차의 창문에서 내 표정은 더 선명해지고

바람은 거꾸로 불어온다

 

철썩,

 

당신은 당신이 아니라 작은 바람이고

당신의 무릎사이 누군가의 신발이 포개질 때

숨바꼭질놀이는 다시 시작된다

숨어도 찾지 않는

 

철썩,

 

나를 찾을 수 있겠어요?

 

 

 

 

 

 

세컨드 라이프

 

 

 

 

귤껍질에서 검은빛이 떠오를 때

나는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하늘을 난다는 건

검은 연기가 몸속에 가득 차는 것

 

그럼 제 몸을 태우겠습니다

 

내 몸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다 나는 혼잡한 자동차들이 보이는 도로를 지나 빌딩을 지나 집으로 간다 내 몸은 일정하지 않다 단지 바람에게 검은 눈동자를 맡긴 채 흐른다 저 투명한 유리창에 당신을 가두고 나는 겨우 작은 어둠이 되었을 뿐,

 

나는 괴물입니까?

 

붉은 저녁이 오고 있다 저녁이 저녁의 구름을 물고, 없는 그림자를 저녁에 묻고, 하늘 위 까마득한 어둠에 날개가 점점 커지도록 저녁이 오고 있다

 

나는 어느새 작은 마을을 덮는 새가 되어 간다

 

 

 

 

 

 

 

광장에 죽은 비둘기들을 쌓아 기울어진 펜스를 설치한 자들의 변명

 

 

 

 

광장의 인형 뽑기 상점 향해

복면 쓴 자들이 가짜 총을 들고 잠입했다

쿠키를 먹던 아이들의 손에서 모래가 흘러내렸다

 

볼 수 있으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죽은 비둘기들이 바닥에 쌓여 갈 때

우리는 녹슨 운동기구에 낙서를 한다

 

말라 버린 분수와 기울어진 펜스를 설치하는 건

죽음을 은폐하고자 했던 습관으로부터

죽음을 되돌리기 위한 것

 

기울어진 펜스가 공공을 위해 필요합니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투표를 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었다

 

바닥을 위해 만든 바닥에서 꽃이 피고 그림자들이 쌓여 바닥이 사라진다면 죽음도 미학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삽을 들고 죽은 비둘기들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펜스가 만들어질 때마다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펜스는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거렸고

유연하게 왼쪽과 오른쪽의 경계를 만들었다

 

왼쪽에는 비가 내렸고

오른쪽에는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기울어진 펜스를 따라

기울어져 걷거나

뒤로 걸었다

 

밤이 오면

펜스는 사라졌고

검은 비둘기들로 가득해졌다

우리는 광장에서 길을 잃었고

 

복면 쓴 자들이 가짜 총을 들고

다시

광장의 인형 뽑기 상점을 향해 잠입했다

 

광장은 점점 공공을 위한 사람들로 늘어났다

 

 

 

 

 

 

 

<약력>

 

권기덕

 

2009󰡔서정시학󰡕을 통해, 2017󰡔창비어린이󰡕(동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P󰡕, 󰡔스프링 스프링󰡕을 썼다.

 

 

 

 

   

 

 

 

 

 

 

  • 도배방지 이미지

시집 소개

더보기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