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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의 생(生)외1편 / 홍수연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10/04 [01:19] | 조회수 : 305

 

 

▲     © 시인뉴스 포엠



도마 위의 생()

      

홍수연

 

 

 

한 포기의 달달한 점심을 썬다는 것이

도마의 등에 봉합하지 못할 상처를 내는 일일 줄이야,

 

남의 살을 탐하기 시작할 때부터

잇몸 속에 숨어 있던 이빨은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하고

남의 살을 따라 뾰족하게 내민 입술

 

한 여인이 문을 열고 나가면

한 여인의 옆구리를 물어뜯고

두 번째 여인이 문을 닫고 나가면

두 번째 여인의 뒤꿈치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지

세 번째 여인인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하고,

여태껏 문지방에 오도카니 서 있네

 

도마에 새겨진 상처처럼 내리는 비

 

세상에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사람들 많이 있네

 

먹다가 먹다가 퍽퍽해진 살점으로 저 작력이 부치면

맹물에 말아 꿀떡꿀떡 삼키는 일 늘어나겠지만

 

도마의 등에 새겨진

성한 곳 없이 자잘한 칼자국 따윈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세상에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사람들 많이 있네

 

세상에!

도마 위에서 오롯이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 많이 있네

 

 

 

 

 

 

 

한여름, 짖다, 짖지 못하다, 핥다

      

홍수연

 

 

 

 

 

한여름이었고 장날이었으며, 계절대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슬펐고 여느 때처럼 나는 무기력했다 언젠가 이 무기력이 나의 소중한 무기가 되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날들이었다 내가 컹컹 소리 높여 짖을 수 있기를 바랬고 내가 맹렬히, 나를 가로질러 도주하는 내 그림자를 앞지를 수 있기를 바랬다 맨드라미처럼 나는 허공을 항해 바짝 약이 올라있었고 맨드라미처럼 속절없이 아팠다

 

녀석은 그 날 그 곳에 있었다 팔월의 휑한 초등학교 운동장 담벼락 뒤편 더러워진 솜이 가죽을 뚫고 주먹질을 해대는 허름한 자전거 안장 위, 포개어 쌓은 두 개의 케이지 중 상단 에 서있었다 안간힘으로 케이지를 할퀴고 있었다

 

한여름이었고 당직이었으며 관리자 A와 여직원 B는 쉴 새 없이 조잘대었고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앉아 있었지만 서 있었다 벌서는 기분이었으며 그 쉴 새 없이 짖어대는 가느다란 아가리들에 할 수만 있다면 지린내 나는 이불솜을 틀어막고 싶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으며 황급히 계단을 뛰어 이층 건물로 올라갔다 창 밖 플라타너스가 오래 나를 들여다보고 갔다

 

녀석의 초롱한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백구의 눈물을 본 건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체념한 듯 무더위에 지친 듯 미동도 없다 녀석만이 제 운명을 거부하고 있었다 긴 혀를 빼물고 씩씩거리며 머리로 하늘을 들이박고 있었다 거부함으로써 녀석은 눈에 띄었고 눈에 띄었으므로 제일 먼저 도축될 것이었다

 

한여름이었고 사무실이었으며 업무 중이었다 활짝 열어둔 창 너머로 A가 지나갔다 사무실은 조용하였고 동료들은 보이지 않았으며 지시사항은 내게 전달되지 못했다 어제 A의 명령에 내가 삼키지 못한 수박씨들이 모래 위를 뒹굴고 있었다

 

녀석은 케이지를 핥고 있다 한여름이었고 불볕더위였으며 점심시간이었다 짖지 못하면 핥게 된다 컹컹 짖으면 격리된다 맞은편 가축시장 매대에 겹겹이 전시된 녀석들의 팔다리, 도륙의 세상이다

 

물어뜯기기 전에 먼저 물어뜯을 것! 이 바닥에선 누구도 이 명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2018<모던포엠> 등단, 시집으로 즐거운 바깥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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