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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는점 외 9편 / 조 용 숙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1/17 [18:51] | 조회수 : 297

 

  © 시인뉴스 포엠



 

녹는점  

 

조 용 숙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서

 

흘러내리는 뱃가죽을 바지 속에 쓸어 담으며

 

솟구칠 줄만 알았던 열망들이

 

평안으로 돌아가는 길을 본다

 

내가 알던 백 네 살 할머니도

 

그렇게 흘러내렸던 거라

 

가슴에서부터 흘러내린 살거죽이

 

배꼽 아래까지 흘러내려와

 

생의 욕망들이 파 놓은 욕창 하나를

 

가만히 쓸어 덮고 있었다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던

 

성질머리도 녹아내려 흐물흐물한

 

물처럼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위로 솟구치기만 했던 생의 뿌리를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려

 

지난 허물들을 덮어주고 있었다

 

 

 

 

 

 

 

지금은 부화중

 

조 용 숙

 

 

속에서 뭔가 꿈틀 거렸나

태동을 느꼈던가

안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잠시 잊고 있던 사이

안에만 가둬두지 말고 나를 좀 꺼내달라고

문 두드리는 녀석이 있다

이마에서부터 굵은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눈 밑으로도 실금들이 자글자글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를 낳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분명 유정란인 것은 분명하다

팽팽했던 손등에도 실금이 가고

발등에도 실금들이 늘어난다

금가는 속도가 빨라지는 사이

부화의 온도에 대해 생각한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유지를 위해

특별히 노력한 기억은 없다

살면서 속 끓인 날이 많았던 기억 밖에 언제 한번

따뜻하게 품어준 기억도 없는데

그래도 한번 기어이 살아보겠다고

저렇게 노크를 해 대는 것을 보니

분명 생명력이 강한 녀석이 태어나려는가 보다

 

 

 

 

 

 

실업의 날들

 

조 용 숙

 

 

비로소 찾은 자유

밥그릇에 파묻어 두었던 얼굴에서

밥풀떼기를 떼어 먹으며

하염없이 빗속을 걷는다

발걸음과 발자국 사이쯤에서

비바람이 자꾸만 우산 속을 들춘다

가난한 남자도 싫고

찌질한데 착하기만한 남자는 더 싫으니까

이제 그만 하자

우산 위에서 포물선을 그린 빗방울들이

말줄임표로 낙하한다

누구보다 내 행적에 대해 함구하고 있을

낡은 운동화가 퉁퉁 불은 발에서 눈물을 뱉어낸다

괜찮아 다 괜찮아

빗속을 걷는 것은 지금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사치야

비는 계속해서 백마강 물을 부풀렸고

나는 그 와중에 패망한 백제와

부여에서 태어난 신동엽 시인을 떠 올린다

백마강은 금강이 되어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주는데

나는 그저 등고선 아래 생의 파고를 숨긴 채

작은 비닐우산 속에 갇혔다

그 사이 빗방울도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초대

 

조 용 숙

 

 

 

 

이 가을

핑계가 먼저 도착했다

백지 편지를 받아들고 호들갑 떠는 연인들처럼

가을은 텅 빈 눈망울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작가로 명명했다

밤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습작될 것이지만

어떤 누구도 그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퇴고 될 수 없는 사연들만이

주머니 속 호두알처럼 굴러다녔고

끝내 출판을 거부당한 나뭇잎들은

활자가 되어 흩어졌다

 

 

 

 

 

도마뱀 요리

 

조 용 숙

 

 

저한테 왜 그러세요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나온 것이

왜 제 탓인가요?

위험을 감지한 순간 하나 뿐인 카드를

썼을 뿐이라구요.

꼬리에 속아 저를 잡지 못한 것이

억울하세요?

제발 저한테 그러지 마세요

당신들이 멋진 도마뱀 요리를 즐기는 동안

나는 거친 땅바닥을 기었다구요

제발 부탁인데요

이젠 남은 당신들끼리

죽을 끓여 드시던

 

회를 쳐 드시던

출장요리를 시켜 드시던

간섭할 마음 눈물 한 방울 만큼도 없으니

기호대로 요리해 드시라구요

레시피까지 저한테 요구하는 것은

정말 아니잖아요?

 

 

 

 

 

여수 총각

 

조 용 숙

 

 

침묵으로 확인시킨 부재의 한 나절

발신자와 수신자가 교체 된다

새벽을 깨운 죄를 다그치자 너털웃음을 웃는다

긴 침묵 사이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몇 구비를 돌고 돌아온 안부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선고다

나 죽거든 꼭 오라는 말에

죽은 사람이 뭘 안다고 가겠어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노력은 해야지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 죽겠다는 뜻이여

한때는 나랑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농처럼 프로포즈를 했던 남자

가진 것도 없으면서 맘 좋은 거 하나로 어딜 넘 보냐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가끔 안부가 궁금했던 사람

번번이 면박을 당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잊을만 하면 소식을 전하던 사람

가끔 삶에 지칠 때마다 그냥 그 무릎에 엎어져서

한 생을 기대어 볼까 싶다가도

고개를 내 저었던가

소식 없더라도 어딘가에서 건강하게 잘 살고 있겠지

그러다 문득 환급형 보험처럼 전화를 걸어

 

고단한 삶을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던 사람

그래 죽기 전에 얼굴이나 한 번 보자

 

 

 

 

 

환승역

 

조 용 숙

 

 

정류장 버스기사 모집 공고 앞에 선 남자

관광버스 운전기사로

지방에서 서울까지 오르내린 기억을 더듬는다

수술대기 순번이 한 자리 숫자로 바뀌면서

금방이라도 이름이 호명될 것만 같아 사표 쓴지 이 년 째

다시 버스 운전을 해야 하나

망설이면서도 손에서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 한다

일주일에 세 번 혈액 투석을 위해 찾는 병원은

누군가의 불행을 담보로 부여잡은 희망의 끈이라

전화벨이 울릴 때 마다 혹시나 기대를 걸어 보길 수 십 번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까

그 사이 종착역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탄 사람들도 여럿

환우들을 배웅할 때 마다

폐부 깊숙이 전해지는 생사의 갈림길

그 사이 버스 한 대가 사내 앞에 멈춰 선다

누군가는 내리고 목적지를 모르는 또 누군가는 버스에 오른다

눈앞에서 멀어져가는 번호판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내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는다

 

 

 

 

 

창문 수리공

 

조 용 숙

 

 

그 남자의 직업은

자폐아들의 닫힌 말문을 열어주는

창문 수리공이다

그는 창문 수리를 위해

때때로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별을 따거나 달을 달아놓기도 하면서

수시로 우주와 교신 한다

교신 내용은 주로

거실 찍어서 보내

주방 찍어서 보내

화장실 찍어서 보내

때로는 명령어들이 뒤섞여서

쥐를 잡아 보내라는 명령어가 뜨기도 한다

모든 명령어는 상명하달식이다

명령에 따라 집안 구석구석을

사진에 담는다든가

식당 입구에 설치된 CCTV

사진에 담아 우주로 전송 한다

밥 먹으러간 식당에서

검시관으로 오해받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하지만 누구도 그가 창문 수리공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는 사람은 없다

그는 창문수리 전문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정작 굳게 닫힌 자기 집 창문은 열지 못했다

다만 어느 늦은 가을

빠끔히 열린 창문 사이로 여자 친구를 바라보며

입이 귀에 걸린 일이 전부였다

 

 

 

 

 

환생

 

 

조 용 숙

 

세상의 중력에 눌려

자라다 만 작달막한 키에

험준한 산맥들을

얼굴에 빼곡히 새겨 넣은 정림 여사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보고 씨부랄년 나가 뒈지라잖어

 

아침마다 눈물 콧물로

생의 주파수를 맞춘다

 

​자식 딸린 홀아비 만나

전처 자식 끌어안고 호호 불며 살았다더니

이제 병들고 쓸모없어졌다고

나가 뒈지라는 싸가지 없는 놈이 어딨냐고

펄쩍펄쩍 뛰며 울부짖는다

 

​젊어서는 그렇게 정갈했더 사람이

슬그머니 찾아온 치매에 덜컥 손목 잡혀

이웃집 고추밭 콩밭 앞섶에 다 훑어내다가

도심 변두리까지 떠밀려 왔다더니

 

​주방 세제 넣은 계란프라이

미원 쏟아 부은 된장국에 쫓겨 나와

아기 하나 낳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깊은 속내를 풀어내던 날

 

​두 손 든 양아들 등살에 떠밀려

요양원 간다

 

 

 

 

 

 

 

상사화

 

조 용 숙

 

 

매일 매일이 만삭이고

나날이 난산인 세월 속에서

실낮 같은 기억들을 챙겨 생일상을 차립니다

퇴근길 위장을 장악한 고소한 냄새가

골목길에 들어앉아 수저질을 하는 통에

마른 침만 삼켰다는 기억을 버무려

곱창 볶음을 만들고

잘 삭힌 홍어찌개를 좋아한다며

하이파이브를 했던 손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워낼 푹 삭은 홍탁 찌개를 끓이고

또 무엇을 놓을까

마지막에 나눠 마신 복분자 막걸리 한 잔 따라 올리며

하늘에서 온 생일 문자를 축문처럼 펼칩니다

주인 잃은 케익 위에서 간신히 초 한 자루로 버티고 서 있는

우리들의 일일이

건널목 없는 차량 통제구역에

작은 불꽃으로 피었습니다

 

 

 

 

조용숙   충남 부여 출생. 2006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 『모서리를 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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