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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편지 외9편 / 황현중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1/30 [17:42] | 조회수 : 405

 

  © 시인뉴스 포엠




여름 편지

황현중


꽃잎 한 장처럼
예쁜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산맥을 어루만지는 구름처럼
보다라운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처음 그리는 동화처럼
머뭇머뭇, 아직은 두근거리는
초록 가슴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에게 긴 편지를 쓰기 전
먼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면서
어느새 흐르는 눈물처럼
그렁그렁, 맑은 밤을 홀로
아주 오래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달빛 울타리 너머로
아직 꽃잎을 태우는
흰 장미 한 송이를 따다가
마른 가시에 찔린 손가락처럼
선홍빛 핏방울 몇 알처럼
가슴 밑바닥이 여명처럼 트여 오는
내 마음 그렇게
내내 정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 오지 않는다고 애태우지 않고
예쁜 연꽃 한 장처럼
한 무더기 자운영 꽃구름처럼
그대의 맑은 눈 안에 들고 싶습니다
그대 오는 길목의 풀섶에서
무더위를 견디며 핀 채송화처럼
한 송이 단단한 미소를 배우는
소중한 하루이기를 기도합니다
소란한 매미가 울음을 거두고
마지막 날개를 접는 순간의 고요처럼
그대 앞에 적막하게
눈을 감는 기도였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음악은 충분히 살아 있다

황현중


살아 있다는 것은 소중하다
살아 있기에 내 맑은 두 눈 안에
밤하늘이 눈부시게 펼쳐지고 있다
어느 시인의 슬픈 역사를 뛰어넘어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칠 때
나는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삶의 조각조각들이
통증을 앓는 밤일지라도
창밖에서 어른거리는 도시의 야경보다
덜 중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비좁은 내 안에서 맴돌던 내가
내 밖의 것들과 연결되는 그 순간이
나를 가장 조화롭게 한다
잠든 아내의 애잔한 숨결 너머
부산한 도시의 발걸음과 소란이
나의 느낌을 가장 살아 있게 한다
살아 온 날들, 많은 것들을 잃었지만
아직 내가 살아 있기에
그만큼의 기회가
내 밖에서 나를 힘껏 응원한다

유월의 바람 한 자락이
내 마음속 푸른 건반을 두드린다
그래서 나의 음악은 충분히 살아 있다.




후회하지 않는다

황현중


밤 열시,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안으로 조용히 웃는 소녀의 얼굴처럼
보름달이 구름 속에서 서성인다
잔잔하게 흐르던 물길은
돌부리를 만나 물거품을 일으키고
향기에 취한 유월의 바람이
동네 어귀를 느슨하게 맴돌고 있다
길거리 야시장의 자판에는
마지막 떨이가 여전히 남아 있고
목쉰 흥정이 비릿하다
퇴근길 포장마차 틈새로
아버지의 낡은 구두가 보인다
지친 어깨 위로 떠도는 국물 냄새,

초인종을 누르면
별처럼 쏟아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나를 기다린다
토라져 돌아누운 아내의 어깨 위에
고요한 달빛 한 자락 얹고
오래된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고 싶다

그렇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내일로 향하는 꿈길 위에 잠시 나를 멈춘다
눈을 뜨면 밝은 창이 내일로 열리고
아름다운 풍경이 다가올 것을 믿는다
후지하지 않는다
삶은 늘 미완성이고
미완성은 끝나지 않은 희망
오늘밤만으로 오늘밤은 끝나지 않는다.




슬픔의 쓰임새

황현중


간밤에 그토록 나를 울게 했던
슬픔, 꺼내놓고 보니
겨우 작은 이쑤시개 하나였네
바늘보다 허약한 이것,
물길 막고 험악하게 주저앉은
커다란 암초인 줄 알았더니
겨우 요것이라니!

오늘은 요것으로 무엇을 할까?
이빨 사이사이 더듬어
욕망의 찌거기 모두 뽑아내고
손톱 밑 찌든 상처도
말끔하게 걷어 내야지

가을 산 여기저기 쿡쿡, 찔러
단풍물로 가득 붓질하고
그중 시원한 풍경 몇 폭 잘라내
회색빛 우울한 내 마음의 안쪽
화안하게 도배해야지.




때때로 사랑보다

황현중


때때로 나는 사랑보다
이별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너를 보내고 홀로 마시는
차 한 잔의 고요를,
너를 만날 약속보다
만나고 돌아오는 골목길에
들꽃처럼 차오르는
하얀 달빛의 그림자를 좋아한다
오래된 상처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흑백사진 속 미소를 좋아한다
한세월 곰삭은 침묵을 좋아한다
생각해 보면 쓸쓸한 일이지만
쓸쓸한 말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시의 마을에서
이별의 아득한 거리만큼
사시사철 꽃피는 그리움으로
곁에 없는 너를 껴안고
안을 수 없는 너를 부르며
돌아오지 않는 사랑을 쓴다.




해가 저물 때는

황현중


해가 저물 때는 홀로 울고 싶다
간절하게 사랑을 말하고 싶다

풀잎의 기울기로 이슬을 안 듯
두 손을 모으고
목 타는 갈증의 입술을 열어
사랑을 기도하고 싶다

내일은 해가 뜨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뜨지 않는다면,
흔적 없이 사라질 슬픈 존재들

온몸을 떨며
어둠 속에 묻힌 검은 이별을 안고
오늘이 아니면 안 될
녹슨 침묵의 말들을 고요히 꺼내

사랑한다 사랑한다
고백하고 싶다, 해가 저물 때는.




비망록

황현중


너무 멀리 가지 않기로 한다
다시 돌아와야 할 여기,
오늘을 잊지 않기로 한다
두근두근, 오늘을 떠나지만
지친 발걸음이 쉴 곳은
애오라지 여기뿐
작은 죄가
늙고 낡은 어미 품에 안기고
열두 줄 가야금의 현을 누르듯
슬픈 사람들의
숨소리가 잦아드는 여기에서
하루의 후회를 정갈하게 다듬어
일기장 안에 눌러 쓰고
잠시, 그윽이 떠오르는
눈썹달을 바라보면
저절로 솟는 쓸쓸한 미소 같은 오늘,
일상이 있기에 일탈이 가능하고
일탈은 일상을 의미 있게 하는 것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한다
다시 돌아와야 할 여기에서
나를 생각하고
너를 그리워한다
세상을 가득 사랑한다.




비 오는 날

황현중


지금 내리는 비는
비만이 아닐지도 몰라

빗속에는 늘
번개 하나, 천둥 하나쯤
운명처럼 품고 있으니

나도 나만이
아닐지도 몰라

번개 같은 분노가
천둥 같은 폭력이
언제 어디서
내 몸을 찢을지도 모르니

비 오는 날
나 아닌 내가 두려워

욕망의 뿌리 잘린
꽃 한 다발
화병에 꽂으며
웃는 내가 조심스럽다.




시가 안 되는 밤

황현중

 


낱말마다 꺾인 관절이 아프다
문장의 혈류가 막히고
동맥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단락의 호흡이 숨가쁘다

이빨을 드러낸 음소들이
옥수수 알갱이처럼 우수수,
백지 위에 쏟아지고
잇몸만 남은 혀 밑의 타액이
엉킨 자모를 울컥거린다

술 취한 하루살이들이
가로등 불빛을 향해 토악질하는
이제 시간은 자정!

날카로운 경적 하나가
예배당의 십자가에 목을 맨다

써라, 가질 수 있느니
쓰지 마라, 자유로울 수 있느니

선택의 여지마저 문맹이 된
시가 안 되는 밤.




눈물 기우제

황현중


오색구름을 거부한다
여짓여짓, 양털구름도 싫다
다만 먹구름으로 흐르고 싶다
기쁨의 눈물이라도 좋고
슬픔의 눈물도 가리지 않는다
한바탕 통곡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오늘,
그동안 쓸데없이 흘렸던
나의 눈물을 후회한다
부질없이 소비한 눈물의 죗값으로
그만 눈물샘이 바닥났다
나만을 위해 흘렸던
그 많은 눈물들
정작 세상이 필요로 할 때
나의 눈물은 언제나 인색했다
잔고가 바닥난 눈물통장을 조회하다
울컥, 바닥이 긁히는 짠 눈물 한 바가지,

내일은 비 올 확률 50%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작가 약력)
전북 부안 출생
한국시사문단에 시와 평론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시사문단 신인상 심사위원
제6회 북한강문학상 수상
시집 <조용히 웃는다>, <너를 흔드는 파문이 좋은 거야> 
산문집 <딴짓 여로> 
현재 전북 임실우체국장으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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