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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목요일 외 9편 / 김미연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3/02 [00:42] | 조회수 : 114

 

  © 시인뉴스 포엠



 

절반의 목요일 외 9

 

김미연

 

 

 

초침도 멈춘 거실

가구들이 구부려앉아  졸고 있다

슬며시 소파에 스민 봄볕이

몽롱한 오후의 발등으로 내려앉는다

 

수요일이 사라진 자리

내 것이 아닌 절반의 목요일이 앉아있다

반복되는 무료함에

시간의 발이 멈춰 서 있다

 

침묵은 이곳에서 몸을 늘린다

베란다에서 소리 없이 꽃을 피운 것들은

어느 시간의 파도를 넘어왔을까

기다림이 저 꽃대에 앉아있다

 

나의 기다림도 오래 묵었다

 

손에 쥘 수 없는 것들은 그렇게 나를 빠져나가고

오늘은 내일을 향해 지워지고 있다

 

목요일의 몸통이 흐릿해진다

 

이 고요는 몇 겹일까

바깥의 소음도 고요의 근처에서 가라앉는다

 

 

 

 

밤비는 초록이다

 

김미연

 

밤비는 소리로 내린다

허공이 초록으로 젖는 시간

 

잠든 나무들의 눈꺼풀이 열리고 귀가 트인다

온몸으로 하늘을 흡입하는 나무들

 

초록을 껴입고

나무와 나무를 건너다니는

저 빗줄기들은

나이테를 돌고 돌아

나무의 심장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어디선가 달려온

어둠이 가지마다 열린다

나직이 땅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는 뿌리를 타고 올라

나무의 키를 늘린다

 

내게 빗금을 그은 사람도 밤비처럼 다녀갔다

 

새벽 두시가 젖는다

 

 

 

 

 

언 발

김미연

 

저 맨발들

까맣게 점으로 번지는 순간

하늘엔 화폭이 펼쳐진다

누가 붓을 들어

저녁하늘에 점을 찍는가

저 살아 움직이는 마리, 마리, 마리

충돌도 없이 일시에 동쪽하늘 모퉁이까지

낙관을 치고 돌아온다

물갈퀴로 하늘을 휘감고 날아올라

다시 내려올 때까지

회오리다

그때 보았다

쇠기러기의 빨갛게 언 발을

저 시린 부리로 먼 길을 날아오고

또 약속을 물고

바람을 젓는 발목의 힘으로

그렇게 또 다른 국경으로

떼 지어 노 젓는 소리

하늘이 뒤로 물러선다

 

 

 

 

 본색本色

 

김미연

 

 

치자꽃이 졌다

한 며칠, 지나가는 시선을 온몸에 받더니

가지마다 눈부신 흰빛은

향기조차 말랐다

애초에 갈색은 본색이 아니었을까

 

흰빛은 잠깐이었다

그 밑에 숨겨둔 조글조글한 빛을 품고

 

꽃은 갈색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뒤늦게 드러난 땅의 빛

꽃의 본모습

 

사방으로 흩어지던 눈빛

모두 거두어

돌아갈 채비를 하는 한 그루의 향기

 

자식을 다 키운 빛

 

다 이룬 빛은 갈빛이다

 

 

 

 

 

여름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김미연

 

 

천 개의 바퀴를 굴리는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도

먼 바다 파도의 수레를 끌고 오는

팔뚝이 굵은 바람도 아니었다

 

넝쿨과 가시로 담벼락을 넘는

유월의 붉은 입술도

물을 뿜어 하늘을 적시는

거대한 물기둥도 아니었다

 

뜨거운 모래밭

나팔 하나 매달고

달아오른 정오의 자갈길을

헐떡이며 기어가는 메꽃 한 송이

 

폭염을 지고 바닥에 배를 밀며

나팔을 부는

그 작은 꽃이,

 

내가 마주친 여름의 민낯이었다

 

 

 

 안구건조증

 

김미연

 

 

도시는 신기루가 사라진 사막이다

사방에 우글거리는 천적들

 

피해서 달아나도 다시 제자리

오늘을 저당 잡히고

하루하루가 낯설다

 

노숙자 무연고자 일용직노동자 부랑자 신용불량자…

모래바람이 시야를 흔들고 있다

 

곳곳에 숨어있는 모래수렁

더듬거리는 발목이 허방을 짚는다

 

하루하루 이별을 하는 도시

세상은 빠르게 돌고 꼬리에 간신히 매달려도

번번이 손을 놓쳤다

 

우화를 꿈꾸는 노숙의 벌레들

늘 바닥을 기어다닌다

 

어디서 이렇게 메마른 바람이 불어오는가

뜨거운 먼지에 지평선이 사라진다

 

이 도시에는 눈물을 파는 곳이 있다

 

 

 

 

늦가을

 

김미연

 

 

노인이 도리깨질을 한다

휘두르는 손끝에서 허공이 쩍 갈라진다

 

메말라 단단해진 것들

매섭고 아린 세상과의 첫 대면이다

도리깨는 집요하게 닦달을 한다

 

꼬투리 속에 숨은 가지런한 콩알들이

순서도 없이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다

멀리, 더 멀리 추락하는 늦가을

이리 저리 튀어 올라 탈출을 서둘러도

 

허공은 주머니가 없다

 

콩밭에 앉아 알맹이를 고르는 손

쭉정이처럼 살아온 가난한 손에 늦가을 볕이 내려앉는다

그을린 손마디에 갇혀 함께 늙어가는 은가락지 한 쌍

피붙이처럼 익숙하다

 

연이은 도리깨질에

버석한 노인의 등 거죽처럼 부서진 콩껍질이 수북하다

 

속을 다 드러낸 가을이

멍석 밖으로 도르르 굴러간다

 

 

 

 

 세발가락 나무늘보

 

김미연

 

 

거꾸로 매달린다

이 번민을, 이 생을 어떻게 비워낼까

 

저 아래아래 가라앉아 있는 땅이 하늘로 보일 때

빈 허공이 되어간다

 

해질 무렵까지 하나의 열매처럼

정물이 되는 것

한 점 티끌로 가기 위한 것

 

아무리 게으름을 피워도

한 생은 쾌속으로 지나가는데,

물구나무서서

느릿느릿 몸속을 흘러 다니는 그리움을

다 쏟아내면

신선이 되는 것일까

 

몸에 이끼가 끼어 나뭇잎과 뒤섞인다

곡식의 싹과 같은 미소가 드리운다

시력이나 청력은 아무 소용없는 것

 

나무에 매달려

그냥 무심한 나무가 되고 있다

 

 

 

 

  

겨울 빨래

 

김미연

 

 

추위에 얼어붙은 산동네

빛바랜 플라스틱 집게가

좁은 고샅길을 물고 있다

 

냉기에 동상 걸린 점퍼 한 벌

노동을 마친 점퍼에 페인트 자국이 꿈틀거린다

어느 시간이 다녀갔을까

정작 자신을 덧칠하지 못하고

누구의 생을 채색해주었을까

 

모서리마다 녹슬어가는 양철대문

바람이 불 때마다 삐꺽거리고 있다

마당에서 출렁거리는 빨랫줄

그늘이 닿은 자리

고드름이 거꾸로 매달린다  

 

어느 해 겨울 같은 처마 끝

그 시린 흔적들

 

응달진 이곳

어둠의 얼룩에 바람은 더욱 거세진다

 

방문 앞에 뒹구는 운동화 한 켤레

물기를 머금은 가난 한 벌

저녁이 오는 소리에도

빨랫줄은 축 늘어져있다

 

 

 

 

 

 

바닥

 

김미연

 

 

 

빗물이 도시의 바닥을 친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

튕겨나가며 흩어지는 빗물

아무리 두드려도 자국조차 없다

바닥을 기어 캄캄한 하수구로 빨려든다

 

지하도 차가운 바닥에 누운 바닥들

냉정한 시선에 도시의 심장은 딱딱해지고

, 숨이 막힌다

더는 내려갈 수 없어

절망에 녹이 슬어 절뚝거린다

 

하루의 귀퉁이를 떠돌다가

해가 지면 몰려드는 곳

바닥이 된 사연은 서로 묻지 않는다

 

도시의 부평초들

뒤꿈치를 들고 뛰어올라도 다시 제자리

때 절은 어둠을 끼고 살아

하늘을 잊은 지 오래다

 

하수구로 빨려든 빗물처럼

길바닥에 누워

캄캄한 생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김미연

국문학 박사(동국대)

<월간문학>문학평론 등단

시집『절반의 목요일』

연락처 : 010- 569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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