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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 노선도의 꿈 외9편 / 구정혜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3/03 [09:25] | 조회수 : 169

 

  © 시인뉴스 포엠



전철 노선도의 꿈

 

 

 

 

태어나면서 마디가 생기고

커 갈수록 무릎이 꺾이었다

 

흔한 햇볕도 보기 힘든

평생을 쪽방에서 살아야 하는

 

나에게도 무지개보다 더 많은

색깔의 길이 있음을

 

어머나, 제 소원은

 

이어도 발끝에서

저 백두산 머리를 지날 만큼

기지개 한번 켜보는 것입니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허리 한 번  -욱 펴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처다

 

 

봐라, 신도림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빽빽한 저 뒷모습에 부처 아닌 자 있으랴

제 한 몸 짊어지고

일상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는 사람들

새벽부터 밤까지 수없이 짓밟히고도

또 자신의 등을 내주는 계단을 밟고 오르면

숨가쁘게 전철이 들어오고

봉숭아 씨앗처럼 중생들 쏟아진다

발밑에서 구둣발 소리가 뭉쳐 몰린다

끝도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의 물결

연꽃 아닌 자 있으랴

부처 아닌 자 있으랴

땀흘리며 하루하루 수행하는 이들은

모두가 부처이다

 

 

 

 

 

 

 

 

 

 

 

 

 

 

 

 

 

 

 

 

어항 앞에서

 

 

음식점 창가 어항 안에

열대 치어가 산다

 

아무리 보아도 먼지들이

떠다니는 듯

오장육부라고는 있을 것 같지않다

오랜 습성인지 바쁘게 움직인다

 

나는 두 팔과 다리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저 작은 것들 앞에서

힘들다는 말은 않기로 했다

 

 

 

 

 

 

 

 

 

 

 

 

 

 

 

 

 

 

 

 

 

 

바느질 하며

 

 

용접을 하다가

작업복에 구멍이 동동동동

 

용접이란 경계를 잇거나 구멍을 때우는 일인데

그러한 본분을 잠시 잊었는지

뒤로는 무수히 구멍을 내고 있다

 

이렇게 공기 구멍이 있어야 땀내도 덜 나고

양말도 구멍이 있어야 무좀이 생기지 않는다고

어설픈 너스레를 늘어놓는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식솔들의 목구멍을 메우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남편의 하루가

구멍 속으로 빤히 보인다

 

곤히 잠든 남편 곁에 앉아

작업복 구멍을 정성껏 꿰맨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들로 헐거워진

그대와 나 사이

매듭 없이 손질하고 싶다

 

 

 

 

 

 

 

 

 

 

 

 

 

생강나무꽃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저만치 서서 쳐다보는 이 있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하다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암 진단 받은 에미 때문에

슬픈 결혼식이 될까봐 마음 졸이던 딸

서로 눈 마주치지 말자고

기쁜 날은 기쁜 것만 생각하자고 다짐하며

가발 쓴 나에게 슬몃 웃음지어 보이던 내 딸

 

춘삼월 하순, 꽃샘추위다

맵싸한 바람이 뺨을 후리더니

허공이 캄캄하도록 눈발이 날린다

삽시간에 꽃 위에 맑시린 눈이 쌓여

생강나무꽃 울상이다

 

딸아, 살다보면

상처없는 나무가 없듯이

뜻하지 않는 굴레가 있고 벽도 있단다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지만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유럽 여행갔던 문우도

한창 농사일에 바쁜 시골 친구들도

만사 제치고 축하해주니

 

난 이만하면 잘 살았다

 

 

 

 

 

 

 

 

물봉숭아

 

물처럼 살고자 했던

그 여자

 

신데렐라처럼 온몸으로 사랑받는

봉선화와는 달리

축축한 그늘에서 산다

 

언제나 뒤편에 서서

뭇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말없이 바라본다

 

이제는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멀어져 간다

 

태풍 영향으로

비가 찔끔거렸는지

물봉숭아 눈이 퉁퉁 부었다

 

새벽에 난소암 투병하던

옆자리가 비워졌다

 

 

 

 

 

 

 

 

 

 

 

 

 

 

 

 

여행 2

-요양병원-

 

산기슭에 크루즈 한 척

세상에서 떠밀려 온

많은 섬을 싣고 있다

 

1인실에 하나

3인실에 셋

다인실에 여러 개의 섬

 

한때는 푸른 바다 마음껏 누볐던 이들

층마다 칸마다 섬으로 남겨져 있다

 

여태까지의 버거웠던 삶을 내려놓고

가장 가벼워진 몸짓으로

제각각 부화를 준비한다

 

어둠이 배를 들어 올리려 주변을 에워싸자

급기야 스크루 소리를 내며 스팀이 들어오고

닻을 올리듯 커튼을 슬몃 젖힌다

 

달이 떠간다

아주 천천히

 

목적지는 같은데

나침판을 잃은 선장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계속 정박 중이다

 

 

 

 

 

 

 

 

 

 

자처유배 自處流配

 

 

찬바람 불어와 구름을 몰더니

떨어진 낙엽 위에 비를 뿌린다

가족은 천 리 밖 복사골에 두고

끈 떨어진 두부리마냥

산청 민박집에 오도카니 앉아서

넋 놓고 먼 하늘 바라보니

된서리 맞아 축 처진 돌감 하나

 

 

 

 

 

 

 

 

 

 

두부리: 뒤웅박 의 방언

 

 

 

 

 

 

 

 

 

 

 

 

 

 

 

 

 

아기 2

 

어느 시인이 이토록 독자의 마음을

맑히는 시를 쓸 수 있을까

 

아기는 시다

그러므로 엄마들은 모두 시인이다

 

시 삼백 사무사라 했던가

아기 얼굴 보고 있으면

저절로 사특함이 없어지고

한없이 내 마음 맑아져서

무구함을 느낀다

 

그냥

일순간

 

얼굴 하나로

몸짓 하나로

 

평생 때묻은 내 마음이

눈보다 희고

수정같이 맑아지는

서윤아, 네가 시다

 

 

 

 

 

 

 

 

 

 

 

 

 

 

미황사 풍경 風磬

 

 

얼마를 기도해야

하늘을 날 수 있을까

 

등뼈와 내장조차 모조리 들어내고

물 없이도 천 년을 살아가는 너

 

거친 비바람에도 한 가닥 생의 끝을

잡고 있기에 가벼운 몸으로

허공을 나는 물고기 새

 

잠시라도 방심하면 이끼처럼

돋아나는 사념들

 

미황사 대웅전 추녀 끝

투명하게 뱃속까지 내보이며

허공을 헤엄치는 풍경

 

작은 바람에도

뎅그렁

 

 

 

 

 

 

 

 

 

 

 

 

구정혜

 

경북 상주 출생

부천대학 졸업

2014년 모던포엠으로 등단

박수호 시창작교실 소새 시동인

부천작가회의 회원. 시산맥 회원

하남마을 야단법석 제1회 한 편의 선시공모 대상 수상(2019)

시집: 2015년 아무 일 없는 날-시와 동화 출간

      2019  말하지 않아도- 시산맥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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