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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향 시인의 첫 시집 『와각蝸角을 위하여』

견디며 건너는 피안의 길 / 서범석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3/10 [11:08] | 조회수 : 55

 

  © 시인뉴스 포엠

 

 

 

견디며 건너는 피안의 길

                                                                                                                                       서범석(시인/문학평론가/대진대학교 명예교수)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능엄경에 따르면 세()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이고, ()는 동•서•남•북•상•하 육방()으로서 중생이 삶을 영위하는 좌표이다. 삼라만상과 우주만물은 세계에 존재하고, 세계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김도향 시인의 첫 시집 『와각蝸角을 위하여』의 세계에는 자연과 인간이 형상화되어 서정적 자아의 주관화된 내면과 공존하고 있다. 그 공존의 양상은 불교의 평등적 세계관의 환유로 읽을 수 있다. 불교에서의 자비(慈悲)란 조건 없는 정순(貞純)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중생들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까지 미치는 보편적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고 가르치는 불교의 연기사상(緣起思想)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까 불교의 세계관은 인간중심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동등하다는 인식과 누구나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평등한 시간과 공간 위에 펼쳐진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한 뿌리에 연결된 한 몸인 것이다.

 

 

 1. 세계에 자아 끼워 넣기

조동일 교수의 장르론에 따르면 문학은 세계와 자아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이때 자아는 인식의 주체이며 세계는 그 대상이다. 시적 자아가 세계를 정서적 또는 주관적으로 통일하는 양식인 서정문학은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 없는, 세계의 자아화로 규정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 시집의 텍스트들 역시 모두 세계의 모습을 시인의 서정적 자아가 주관화 또는 자아화한 그림들이었다. 그러나 김도향 시인의 경우 이러한 자아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모습을 그 자아화 과정에 끼워 넣는 특이성을 보여 준다. 이러한 특이성은 외적 자아의 개입이 있는 서사문학으로서의 성격을 부분적으로 지니게 한다. 즉 서사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정적 자아가 서사적 개입을 시도하는 방법으로서 자연이나 인간을 말하고 있는 자신을 노출하는 특이한 그림이다. 마치 사진을 찍는 사람 자신이 사진 속에 살짝 나타나 말하는 모습이다.

 

세상 향해 무수히 던지고 싶은 파편들이 억겁으로 내려온다. 산등성이에 나무 위에 지붕 위에 내 머리 위에 떨어지면서 채 말이 되지 않고 사라진다. 말로는 그 많은 사연 다 풀어 놓지 못해서 그대로 녹아내린다. 말 많고 탈 많은 세상 나도 한 마디 던지고 싶다면서 한꺼번에 펑펑 내린다.

소나무는 여러 갈래 서술어로, 피뢰침은 뾰족한 직언으로, 내 집 옥상은 평이한 표준어로, 내 머리 위의 말은 내가 씹어서 소화시키듯 침묵으로 사라진다. 이런, 하고 싶은 말들 얼마나 참고 참았기에 새벽부터 자정이 지난 한밤중까지 다 쏟아놓고도 모자라 지금도 펑펑펑 쏟아놓는다.

온갖 넋두리 다 들어주려고 넓은 대지는 가슴 열어놓고 어머니 품처럼 감싸 안는다. 그래 그래, 하고 싶은 말들이 있거든 토씨하나 빼놓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하거라. 내 넓은 치마폭으로 감싸줄 테니. 아양 떨면서 때로는 폭언으로 가끔은 묵언으로 속풀이하고 있다.

주절주절 다 털어놓고 한결 가벼워진 하늘 투명하다. 잘 닦아 놓은 거울처럼 받아주고 달래주고 한없이 품어 주었던 대지 더욱 기름져 촉촉한 호수 같다. 그 호수로 내 마음 맑게 씻어 우주 속 한 점이 된다.

 

―「폭설」 전문

 

하룻밤을 지난 아침의 시간과 산등성이와 대지가 보이는 농촌의 공간이 이 텍스트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 세계에 폭설이 내렸다. 이 시는 그 상태를 묘사한 서정적 자아의 정서적 그림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폭설 그리기는 제12연이면 족한 것인데, 후반 제34연은 소설에서 작가가 개입하여 이야기를 끌고 가듯이 서정적 자아가 직접 끼어들어 주관적 정서를 덧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은 산문으로 서술됨으로써 서사적 개입과 한층 조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단초는 앞부분 내 머리 위의 말은 내가 씹어서 소화시키듯 침묵으로 사라진다에서 이미 나타나 있다. 그런데 제3연에서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대지의 속마음까지 설명하는가 하면, 4연에서는 내 마음 맑게 씻어 우주 속 한 점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서술자의 주관적 정서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구성적 특이성을 보여 준다. 세계에 자아 끼워 넣기이다.

 

 

때로는 손발 묶이는

수갑도 필요하다는 듯

햇볕 차단하고 바람 닫아걸고

한철 동안거 드는 선 수행자

보이는 것만 전부는 아니다

삭풍은 밤낮으로 죽비 흔든다

나는 어디서부터 흘러왔나

돌멩이처럼 굴러왔나

홀씨처럼 날아왔나

빗물로 왔나 이슬로 왔나

눈물로부터 왔나

죽음도 이런 죽음은 없겠다

한순간 쾅 닫혀버린 관뚜껑

주름진 실크블라우스도

일렁이던 보리밭 고랑도

등 긁어주던 청둥오리도

허상이었다, 이었다

무릎 치며 깨칠 날 있겠지

 

―「결빙의 대동지大同池」 전문

 

겨울의 언 연못을 묘사한 텍스트이다. 선 수행자로 연못을 바꾸어 그리니까 바람 닫아걸고, 죽비 흔든다같은 그림이 적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나는 어디서부터 흘러왔나/ 돌멩이처럼 굴러왔나/ 홀씨처럼 날아왔나/ 빗물로 왔나 이슬로 왔나/ 눈물로부터 왔나의 부분은 돌연한 서정적 자아의 끼어들기이다. 끼어들어서는 무릎 치며 깨칠 날 있겠지라고 대상(연못)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고 있다. 객관적 묘사 대상과 주관적 자아의 경계 없는 드나듦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자아이고 자아가 세계인 자아 끼워 넣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자연을 인간화하고 인간을 자연화하던 시인의 묘사정신은 여기에 이르러 자연이나 인간 어느 쪽도 놓지 못하고 그 둘 다와 융합하지 않고는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전일적 세계관을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의 이러한 묘사 형식은 그의 그러한 내면세계에서 솟아난 꽃일 것이다.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도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다.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풀 한 포기나 돌멩이 한 개조차도 나와 마찬가지로 한 뿌리로 연결된 동일한 몸으로서 나와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가 소중하다는 자비심에서 발아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 그림 속에 살짝 나타나는 특이한 그림의 제작이유이다.

 

 

2. 사바세계에서의 보살행

 

지금까지 살펴본 시인의 의심 없는 친불성(親佛性)은 모든 텍스트의 세계를 한꺼번에 끌어안는 벼리[]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서정적 자아는 세계를 보면 거기서 바로 불교를 만난다. 누에에서 금강경(「누에」), 바위에서 보리달마(「바위」), 수국에서 만월보살(「수국」), 파리지옥에서 무간지옥(「파리지옥」), 청개구리에서 극락왕생(「청개구리 울다」), 나무에서 불경의 말씀(「끙끙끙, 겨울나무들」), 바다에서 대자대비(「바다에게서 배우다」), 물고기풍경에서 경전(「바람경전」)을 만나고 보고 듣고 깨닫게 된다.

 

햇빛 비껴드는 추녀 끝에서 새들은 허기져 죽는다. 죄명 없이 목줄 매인 물고기 한 마리, 빗방울 지나가며 녹물 입는다. 뒤돌아보지 않는 시간이 뼈마디를 들춰낸다. 남모르게 지은 죄의 찌꺼기들, 큰 죄는 갇힌 세상이었다. 떼로 몰려다니며 여론몰이 했었던, 정적을 모르고 설치며 수행하지 않았던, 성별 없이 종족을 번식했던, 일하지 않고 유랑하며 문전걸식했던, 잠을 자도 눈 뜨고 자라는 어록 한 줄이 추녀 끝에서 허공을 잡는다. 절간의 공양물이 된, 손꼽을 수 없이 몸 흔드는, 마지막 남은 목숨 값 하라고 속죄의 눈물 흘려보낸다.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서 잊을 만하면 수시로 경책하는 저 양철물고기

 

—「바람경전」 전문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양철 물고기가 달린 풍경(風磬)을 형상화한 시이다. 그 물고기는 죄명도 없이 절간에 공양되어 녹슬어가고 있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는 거기에서 많은 죄를 읽어내며 항상 눈 뜨고 수도에 정진하라는 어록을 찾아 경책하는 스승처럼 여긴다. 그 많은 시간을 바람과 비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눈 뜨고 있는 양철물고기에서 사바 중생의 서원을 세우고 인욕의 보살행을 깨닫는다.

사바(娑婆)란 중생이 갖가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이 세상을 말한다. 즉 석가(釋迦)가 교화하는 땅으로 괴로움이 많은 인간 세계[苦海]이다. 고통의 원인은 욕망에의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러한 욕망을 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근본적 교리인 사성제(四聖諦)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수행법으로 육바라밀(波羅密)을 제시한다. 보시(布施 : 널리 베풂), 지계(持戒 : 절제), 인욕(忍辱 : 관용), 정진(精進 : 노력), 선정(禪定 : 평상심), 반야바라밀(波羅密 : 지혜) 등이 그것이다. 『와각蝸角을 위하여』에는 인욕바라밀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가 몇 편 있어서 눈길을 끈다. 아마 시인은 특별히 인욕에 관심을 두고 있는 듯하다.

 

 

뚝 떨어졌다

스치긴 스쳤을까

뚝 떨어졌다

느낌은 있을까

뚝 떨어졌다

아프기나 할까

한 방울 떨어졌다

두 방울 떨어졌다

세 방울 떨어졌다

네 방울 떨어졌다

쇠구슬 하나 떨어졌다

쇠구슬 둘 떨어졌다

쇠구슬 셋 떨어졌다

미련 남은 듯

악착같이 같은 동작으로

시간의 제곱, 제곱 알파에

바둑 돌 놓을 시간 알리듯

,

,

,

,

바윗덩이가 아프다는 듯

호박구덩이 같은 눈에

눈물 고인다

 

―「낙숫물―인욕바라밀•1」 전문

 

이 텍스트는 낙숫물을 그린 것이지만, 실은 낙숫물의 무한한 공격에 속절없이 당하면서도 참고 견디는 바윗덩이의 보살행을 그린 것이라 하겠다. 그것을 보는 서정적 자아는 아픔과 슬픔으로 바위의 인욕을 말하고 있다. 인욕(忍辱)은 수치스럽고 욕된 것을 참아낸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욕됨을 용서한다는 뜻과 함께 나아가서 타인의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는다는 뜻이다. 이는 모든 일에 대하여 동요됨이 없이 모든 존재의 평등무이(平等無二)함을 깨달아 해탈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이다. 인욕을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하는데 내원해인(耐怨害忍)·안수고인(安受苦忍)·제찰법인(諦察法印)이 그것이다. 남의 해침을 받고도 복수할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내원해인이고, 질병이나 재난 등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안수고인이며, 진리를 관찰하여 불생불멸하는 이치에 안주하는 것이 제찰법인이다. 이 시의 바위는 지금 내원해인의 바라밀을 수행 중이다. 그러니까 바윗덩이는 서정적 자아의 수도자적 내면을 표상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하겠다.

 

3. 피안으로 건너가는 꿈

 

지금까지 살펴본 『와각蝸角을 위하여』의 시세계에는 자연, 인간, 자아의 삼요소가 평등적 융합을 이루려는 피안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한 지향의식은 자연의 인간화, 인간의 자연화, 세계에 자아 끼워 넣기등의 묘사적 방법에 의하여 꽃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대체로 시골(전원)이라는 공간과 이라는 시간으로 배경을 이루었다. 이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사바중생의 염원과 상응하는 밝음의 세계로서 서정적 자아의 꿈을 담고 있는 세계이다. 인간으로서의 서정적 자아의 현실은 결코 밝은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미래를 꿈꾸는 서원(誓願) 속에 그의 시세계를 담아 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집의 서정적 자아가 보살행을 하는 이유는 열반(涅槃)에 이르기 위함일 것이다. 열반은 생사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밝은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이다. 국어사전에서는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라고 풀이한다. 어느 인간이 이러한 상태를 꿈꾸지 않겠는가.

『열반경』에서는 열반의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열반은 상()·()·()·()4(四德)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의 변화가 없는 것, 은 안락의 뜻으로 번뇌가 다한 진정한 즐거움의 세계, 는 진아(眞我)를 뜻하는 것으로 진정한 자아에 도달하는 것, 은 염오(染汚)에 덮인 생사를 여읜 청정한 세계 등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사바세계에서 보살행을 통하여 열반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쉽다면 인간은 모두 부처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불의 어려움을 시인은 다음의 「생각 끌고 가기」에서는 황소 끌고 가기에 의탁하여 그리고 있다.

 

한 생각을 끌고 가는 일은

고삐 풀린 황소 한 마리 끌고 가는 듯하다

열두 고비를 넘고 넘어야 닿을 수 있는,

한 눈 파는 사이

남의 콩밭으로 황망히 뛰어들고

한 고삐 늦추는 사이 또 논물 핥아먹고

한숨 돌리는 사이 또 다른 길로 접어드는,

깜박 조는 사이 산등선 하나 넘고

코앞에 끌어다 놓으면

다른 암소 엉덩이 쳐다보고 침 질질 흘리는,

오리쯤 가다가 풀 한 번 뜯고

십리쯤 가다가 되새김질 한 번 하고

백리쯤 가다가 오줌 한 번 지리고

느린 강물처럼 한 곳에 멈출 줄 모르는,

 

―「생각 끌고 가기」 전문

 

고삐 풀린 황소는 남의 콩밭 뛰어들기, 논물 핥아먹기, 다른 길로 접어들기, 암소 엉덩이 보고 침 흘리기, 게으르게 풀 뜯기, 강물처럼 멈추지 못하는등 세속적이고 동물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의 소는 서정적 자아의 생각이고 보살행으로서 열반에 이르는 일이 지난한 것임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소를 도()의 상징으로 보고 견성(見性)에 이르는 과정을 열 단계로 간명하게 묘사한 심우도(尋牛圖)를 절의 외벽에 많이 그려 놓는다. 그 단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이 시의 황소는 4(四德)은커녕 평균 이하의 좌표에 위치하고 있는 수도자로서의 한심한 현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상관물이기도 하다. 어찌 도피안(到彼岸)의 길이 중생에게 쉽게 허락되겠는가.

 

 

없는 길은 만들어서 가기

모래밭에서 숨은 바늘 찾기

바늘 찾아서 황소 사들이기

황소 먹여서 장에다 내다 팔기

바닷물이 마를 때를 기다리기

바다를 메꾸어 밭이랑 만들기

보릿단 세워서 푸른 탑 만들기

탑 꼭대기 올라 태산을 넘어가기

태산에 올라 하늘에 닿기

하늘 무너뜨려 고속도로 닦기

고속도로를 달려가 달 찾기

달 찾아 토끼 만나서 애 하나 낳기

별나라 날아가 별을 따서 목에 걸기

웃다가 실신해 잠들기

꿈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뿔

어디까지 뻗어갈까

꿈속에서 깨어나지 않기

제 가는 길 돌아보지 않고

그 길 따라가다 백발白髮 맞겠네

 

―「와각蝸角을 위하여」 전문

 

이 시는 수도자로서의 서정적 자아를 달팽이라는 상관물로 바꾸어 형상화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진폭이 큰 역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달팽이가 없는 길을 만들어서 가는 노정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을 순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말놀이 형식으로 ∼기를 반복하여 미적 즐거움을 쌓아간다. 모래밭에서 숨은 바늘 찾기/ 바늘 찾아서 황소 사들이기/ 황소 먹여서 장에다 내다 팔기/ 바닷물이 마를 때를 기다리기등의 과정을 재미있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의 그 길 따라가다 백발白髮 맞겠네에 마주치게 된다. 재미에 빠져 시간에 대한 생각을 놓치고 있다가 문득 그 무상함을 깨닫는다. 그렇구나, 달팽이는 꿈속에서나 피안에 도달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피안으로 가는 꿈이나 꾸고 있는 가련한 수도자의 언어그림이 아름다우면서도 먹먹한 그림자로 독자를 감싸고 있는 사바의 현실, 그것이 이 시집이 그리고자 하는 시세계로 이해된다.

그 세계에는 피안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아의 죄의식이 알게 모르게 촘촘히 박혀 있다. 이 여름이 다 가도록/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만 쓰고 있네(「눈물의 경계」), 더하고 뺄 것 없는 똑같은 죄인(「장작더미), 죄 짓고 쫓겨나면(「탱자」), 속죄의 눈물 흘려보낸다(「바람경전」)등에서 확인되는 바처럼 사바에서의 죄의식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꽃으로 송이송이 피어 있다. 피안의 길을 가로막는 멸하지 않는 죄, 거기에서 허덕이는 인생의 굴레, 과연 꽃송이는 자신을 버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더 갈까 말까? 넣을까 말까?

기름눈금의 게이지를 몇 번 확인한다

괜스레 속도를 늦추어 본다

사형선고 선포하는 나무방망이처럼

누군가 가슴에 꽝꽝 대못을 치는 소리

왠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말 잘 듣던 브레이크를 다시 한 번 힘차게 밟아본다

마지막이란 세 글자는 늘 공포를 몰고 온다

마지막 그의 노랫소리도

마지막 그의 백합화 얼굴도

마지막 만났던 중앙공원의 나무벤치도

마지막 잡았던 그의 양털 같은 손도

그곳은 모래사막의 길

그곳은 낙타의 귀가 먼 소리

그곳은 하늘의 잡히지 않는 거리

그곳은 만질 수 없는 허공의 손

가슴 뭉클한 이정표 앞에서

그곳으로 통하는 길은 긴긴 터널

넣을까 말까? 더 갈까 말까?

기름 게이지를 몇 번인가 확인한다

 

―「마지막 주요소」 전문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심리적 갈등과 번뇌를 겪고 있는 중이다. 마지막 주유소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좌표에서 자동차 기름을 더 넣을까 말까?를 망설인다. 목적지가 확실하다면 사실 그렇게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가야할 그곳모래사막의 길로서 잡히지 않는불확실성의 어디쯤이기에 기름을 더 넣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이 텍스트는 그대로 인생을 환유한 주행의 묘사가 아닐까. 운전한다는 것은 인생길을 간다는 것이고, 마지막 주요소라는 것은 인간의 숙명적 일회성 앞에 놓여 있는 공간이 아닐까. 그럼 기름은 정신, 수도, 인격 등 피안으로 가기 위한 내적 에너지가 아닌가. 죄 많은 사바의 길을 주행하는 수도자의 번뇌는 어디쯤에 끝나는 곳이 있을까. 피안은 어디에 있는가.

중생으로서의 열반을 향한 꿈과 시인으로서의 예술적 꿈의 행복한 합일을 이루는 무궁한 길은 시집 『와각蝸角을 위하여』에서 이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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