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이향란 시인의 『너라는 간극』 / 해설 백인덕 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3/11 [11:15] | 조회수 : 135

 

  © 시인뉴스 포엠

 



이향란 시인의 『너라는 간극』속에든 시 7

 

 

간극에 대하여

 

 

 

 네가 내게 뻗어오거나 내가 네게 뻗는 모든 것이 왜 전부라고 느껴지지 않는지, 마음의 핏대를 올리며 너와 나 서로에게 충실하였으나 왜 쇳소리 나는 바람이 불고 황사비가 내리는지.

 

 목숨 다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을 듣는 순간 나 또한 그러하다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서성대는 공허 앞에서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너는 늘 수많은 걸음으로 내게 다녀가지만 단 한 번도 다녀가지 않은 사람처럼 문밖에 여전히 그렇게 서있다.

 

 

해설

 이향란 시인은 시작(詩作) 초기부터 ‘존재 정립’이라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시세계를 경영해 왔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 시집을 그 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결절(link)’로 이해할 수 있다면, 시인이 불가피하게 직면한 곤란들을 분석, 이해하는 과정을 ‘간극’과 ‘사이’에 대한 재인(再認)이라 할 수 있다. , 시인이 지금까지 취해왔던 ‘관계 맺기’ 방식에 반성적 고찰이 이번 시집, 『너라는 간극』의 핵심 테제라는 것이다.  

 

접안

 

 

 

무엇인가

물처럼 스며들어, 천상의 계절로 찾아들어

생의 몇 날을 머물다 간 적 있다

 

나는 시력을 잃고 말라갔으며 말을 잊었다

불 밝힌 마음은 아득한 곳을 향해 깃발처럼 흔들거나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옆구리가 닳았다

찢긴 지 오래인 돛

떠밀려 온 해초더미에 칭칭 감긴 닻

발이 잘린 내 역사는 빛나고 어두웠다

오르지 못한 채 둥둥

빈 배였다

 

다가간다는 것은 온 몸으로 기댄다는 것은

서글픈 운율로 나를 켜는 일

나를 되려 가두는 일

내게서 다시 내게로 건너가는 일

그리하여 끝까지 남은 나를, 비늘 덮인 나를

바다로 되돌리는 일이었다

 

다가갈 수 없거나

다가가지 못하던 그때처럼

 

 

 

 

해설

 이향란 시인은 이 포섭에 이르지 못한 관계 맺기를 ‘접안’이라는 탁월한 이미지를 통해 정리한다. “다가간다는 것은 온몸으로 기댄다는 것은/서글픈 운율로 나를 켜는 일/나를 되려 가두는 일/내게서 다시 내게로 건너가는 일/그리하여 끝까지 남은 나를, 비늘 덮인 나를/바다로 되돌리는 일이었다”(「접안」). ‘접안’이란 이질적인 두 사물이 일시적으로 서로 맞대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를 “나를 되려 가두는 일”이라고 깨닫는다. ‘너-당신’은 부재할 뿐이므로 결국 그 지향은 오히려 ‘나’에 대한 집착으로 환원될 뿐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나를/바다로 되돌리는 일이었다”는 명제에서 그것이 과거형 시제라는 점이다. 실패한 관계 맺기가 더 이상은 현재진행형이 아님을 암시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팔 저울의 비애

 

 

 

 

 

두 눈 두 귀가 있듯이

두 입 두 가슴도 차라리 있었다하자

본디 그러했는데 닳거나 진화된 거라고 치부해 버리자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깊은 것에게는

입과 가슴 하나씩 더 달아주어 통증을 덜어주자

어느 곳으로 새어나가든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지든

그것은 오로지 두 입과 두 가슴의 평형을 위한 것

더 이상 잴 수 없는 생의 질량을 끌어안기 위한 것

안으로 파고드는 마음과

밖으로 나가려는 마음의 충돌을 어루만져

당연히 그러하다는 듯 충분히 이해된다는 듯

양팔이어서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음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그러나 섞일 수 없음이 비극이라는 듯 희극이라는 듯

 

 

해설

시인은 ‘두 눈과 두 귀/한 입과 한 가슴’의 대비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화’를 가정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깊은 것에게는/입과 가슴 하나씩 더 달아주어 통증을 덜어주자”고 주장한다. ‘양팔 저울’이 암시하듯이 이 ‘평형’ 상태는 간극이 고착화된 상황을 의미하며, 나아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으로 시계추처럼 왕복만 할 뿐, 위치를 설정하지 못하는 자아의 비극을 보여준다. 비약하자면, 이 양시적(是的) 태도는 문제의 해결보다는 고착을 강화하는 역효과가 있다. 더욱이 그것이 “안으로 파고드는 마음과/밖으로 나가려는 마음의 충돌”이라면, 존재의 정립이 아니라 와해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붉은 기억으로 익어가는 토마토

 

 

 

 싼 값에 덜 익은 토마토 한 상자를 샀다. 지금은 파래도 실온에 그냥 두기만 하면 금방 익을 거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하루가 지나면서 붉은 빛이 서서히 돌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은 온통 붉어졌다. 토마토는 예전의 붉은 기억에 충실했다. 본의 아니게 그것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되돌아갈 줄 알았다. 푸름을 붉음으로 스스로 물들일 줄 알았다. 그러면서 온전히 익어갔다. 햇빛이나 바람은 절대 아니었다.

 

 

 

 

해설

 정말 그랬다. 시인은 “싼 값에 산 덜 익은 토마토”는 ‘햇빛이나 바람’이 아닌 “예전의 붉은 기억에 충실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온통 붉어졌다”(「붉은 기억으로 익어가는 토마토」)고 진술한다. 정말 그럴까. 파랬던 토마토가 상온에서 며칠 지나면 붉게 변한다는 것은 사실(fact)이지만, 앞의 시적 진술은 현실의 법칙과 궤()를 달리한다. 시는 토마토의 본성이 ‘붉음’에 있고, 이것은 그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으며, 이 기억을 되살리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제 본성을 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사물들이 세계에 현현(顯現)하는 방식으로서의 사실이 아니라, 시인이 그 사물들을 세계에 개입(介入)시키는 의지와 의도의 이해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당신으로 살다

 

 

 

오늘의 나는 그림자처럼 늘어진 나를 접고 당신이 즐기던 새빨간 짬뽕과 소주를 시켜먹으며 당신의 자세로 앉아 책을 읽고 시를 쓴다 당신의 뭉툭한 손끝으로 나를 더듬고 만진다 당신처럼 서서 변기에 오줌을 누고 조용히 콧노래도 부른다 이렇게 반나절만 살아도 당신의 발자국은 저벅저벅 문밖까지 다가와 초인종을 눌러댄다

 

그리고 당신이 저문다

유령처럼 내게서 빠져나간다

 

나로 서있기가 매우 힘들다

 

 

 

 

해설

관계 맺기가 자주 실패로 귀결되는 이유는 당신이 나보다 언제나 상위의 개념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나는 ‘그림자처럼 늘어진’ 존재로 남는데, 그림자가 암시하듯 정체불명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역할놀이, “소주를 시켜먹으며 당신의 자세로 앉아 책을 읽고 시를” 쓰는 행위는 이미 실패가 예정된 것이다.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당신의 발자국은 저벅저벅 문밖까지 다가와 초인종을 눌러댄다”. 그래서 시인은 “나로 서 있기가 매우 힘들다”고 토로한다.  

 

물을 건너온 바람

 

 

 

 

건너온 수위만큼 깊어 보이는 몸

물비린내가 지독하다

 

오래 전 접어둔 수건을 펼쳐  

더 이상 흐르지 않는 시간과 물살을 닦아준다

 

햇빛에 들썩이는 속삭임은 뒤로 감추고

물보라 치는 기억은 입김 불어 지우고

 

내가 지닌 바람이란

모래 날리며 윙윙 울어대는 게 고작이지만

뒤늦게 다가온 이 바람은

머나먼 물길 속 울음을 견디며 왔단다

 

이제 나의 몫은

그의 물기를 빨아들여 마른 장작의 몸으로 되돌리는 일

화르르 타오르게 하는 일

 

첨벙첨벙 물을 건너 그가 내게 왔으므로

 

 

 

해설

시인의 표현을 그대로 비유하자면, “내가 지닌 바람이란/모래나 날리며 윙윙 울어대는 게 고작이지만/뒤늦게 다가온 이 바람은/머나먼 물길 속 울음을 견디며 왔”(「물을 건너온 바람」)다는 차이에 대한 인정이 우선해야 한다. 이 인정이 ‘사이-관계’에 대한 인식의 새로운 차원을 넘어가는 문지방이 된다. 이처럼 의미를 낳는 새로운 차원으로서 차이를 형성하기 위해 ‘사이-관계’에 대한 인식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그 전 단계로써 방법적 실패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향란 시인은 이를 ‘간극’이라는 상징으로 함축하고 있다.

 
 
 
 

이향란 시인 약력:

강원도 양양 출생,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2002년 시집 『안개』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슬픔의 속도』,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의 글을 게시하고자 할 경우에는 실명인증 후 등록하셔야 합니다.
실명확인 된 게시물은 실명인증확인 여부가 표시되며, 실명확인 되지 않은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 게시물은 선관위의 요청 또는 관리자의 판단에 의해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본 실명확인 서비스는 선거운동기간(2020.04.02~2020.04.14) 동안에만 제공됩니다.
  • 실명인증
  • ※ 일반 의견은 실명인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 ※ 이 댓글에 대한 법적 책임은 작성자에게 귀속됩니다.

시집 소개

더보기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