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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별* 외9편 / 윤석호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3/12 [17:52] | 조회수 : 155

 

  © 시인뉴스 포엠



꿈꾸는 별*

 

 

 

 

가슴속 별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거리의 불빛을 쫓아다닌다

숨 막힐 때마다 꿈은 산소호흡기

그 거리가 끝나는 저녁

마주 선 사람의 눈 속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지켜보며 서 있다

하늘과 도시가 만나는 경계선을 따라

노을이 재즈처럼 검붉다

 

꿈을 위해 가진 것을 버린 사람의

가슴에만 별이 자란다

가슴에 담기에 별은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 아픔을 아는 별에만 불이 옮겨붙는다

사랑하지만 서로 다른 별을 품은 사람들은  

밤마다 서로 다른 은하를 서성거리며

힘들어 한다

그것도 사랑인 줄은 나중에 알겠지만

 

별을 꿈꾸는 도시

그 도시 위에 뜬 별들은 지금 무슨 꿈을 꾸나

어둠이 무거운 것은 젖은 꿈 때문이듯

별이 창백한 것은

그 속에 어둠을 담을 수 없어서다

어둠 없이는 빛나는 기억을

꺼내 볼 수 없어서다

 

 

*영화 La La Land를 기억하며.

 

 

 

벽 속의 문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면

선을 따라 벽이 자라며

세상은 돌연 안, 밖으로 나누어진다

 

멀쩡한 벽에 구멍을 뚫고 문을 만든다

마치 처음부터 문을 위한 벽이었던 것처럼

 

숨을 벽에 가두고

능숙하게 문을 여닫으며

관악기가 음을 만들어낸다

스위치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건전지 속 열망이 어떻게 전구를 불태우며

빛날 수 있었을까

고독하지 않고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듯이

모든 것을 막음으로써 벽은 문을 부추기는 걸까

 

벽이 사라진 사막은

알갱이 하나마다 각자의 벽을 만들고는

풀 한 포기 키워내지 못한다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와 그를 알기 전까지

나는 벽을 몰랐다

미로 같은 생의 한복판에서

그는 막아섰지만 가두지 않았고

두드리는 곳 어디에나

금세 문을 만들고 품어주었다

아픔이었지만 사랑이었고 벽이었지만 문이었다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위에 작은 문을 만들면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송어는 하류로 가고*

 

 

 

오래된 불씨가 지병처럼 번져 숲으로 갔었네

차가운 냇물 속

점박이 꽃 검은 못이 빽빽이 박힌

송어 한 마리 건져 올렸지

재만 남은 마음속에

시린 물고기 한 마리 담고 싶었는데

싱싱한 물비린내 물씬 풍기며

물속 삶이 통째로 따라 올라왔네

사랑인 줄만 알았는데 전부일 줄은 정말 몰랐네

호기심 같은 입질 한 번에

생이 다 걸려들 줄은 그도 몰랐을 거야

그녀를 보내듯 물속으로 다시 돌려보냈네

 

오늘은 송어를 돌려보낸

시내를 따라 상류로 갔었네

오르막이라 힘들긴 해도

소년처럼 가슴 두근거리며 거슬러 올라갔지

크고 굵은 놈들이야

다들 깊고 푸른 하류로 갔겠지만

맑고 얕은 물에서 재잘거리는

풋내기들을 보고 싶었지

그 물가에서 그때처럼 자리를 펴고

송어보다 더 재잘거리는

그 입술에 입 맞추고 싶었네

송어처럼 파닥거리며 입 맞추고 싶었네

그러다 문득 잠을 깼네

송어는 물길 따라 하류로 가고

나는 늙어 있었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의 방황하는 잉거스의 노래(The Song Of Wandering Aengus)에서 영감을 얻음.

 
 
 
 
 

철 대문

 

 

 

변두리 골목 안으로 이사를 갔다

러닝셔츠 바람의 아버지가 어깨를

벌겋게 태우며 대문을 달았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철 대문은 퍼덕거렸고

망치로 얻어맞을 때마다 카랑카랑 소리를 질렀다

대문은 완강했고 나는 어렸다

 

대문 안쪽에 시간이 쌓여 갔다

마당에서 대추나무 가지가 꾸불꾸불 자랐고

철 대문에 대춧빛 꽃이 만발했다

붉게 녹물을 토해내던 장마철 지나

아버지는 꽃을 벗겨내고

페인트로 눈물 자국을 지웠지만

시간은 조금씩 새 나가고 있었다

대문은 중년처럼 무거워 보였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들락거렸다

 

철 대문 꽃핀 자리마다 버짐이 번졌다

버짐이 두툼하게 속에서 차오르는 동안

아버지는 몇 번 덧칠을 했지만

대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늙어갔다

대추나무 엉클어진 머리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동생이 시집을 갔고 어머니가 세상을 버렸다

아버지가 욱여넣었던 시간이 모두 빠져나갔다

나도 이민을 했다

 

아버지는 대문을 나와 아파트로 이사했다

애들 데리고 아파트에 살아보는 게

꿈이었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와

식탁 위에서 웃고 있다

어머니 뒤로 덧칠이 벗겨진 철 대문이 보이고

사진 찍던 내 그림자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다

밥을 먹는 아버지 얼굴이 철 대문 같다

눈시울이 대춧빛으로 붉다

 
 
 
 
 

당나귀, 꽃 보듯 한다

 

 

 

당나귀, 꽃 보고 있다

당나귀, 꽃 보듯 한다

 

옛날 청계시장 다락방 미싱 앞에

당나귀가 가득했다

키 작고 순해서 당나귀만 한 게 없었다

이다음에 더 자라서 말이 되고 싶은 당나귀

다락방을 떠돌다 착하게 늙어갔다

그래도 당나귀 세상을 꽃 보듯 했다

 

공사장 막노동판에 당나귀 가득하다

맷집 좋고 얌전해서 당나귀만 한 게 없다

이다음에 돈 벌어서

작은 집 하나 짓고 싶은 당나귀

떠들썩한 골목 지나 집으로 돌아간다

비좁고 가파른 길 오르는데 당나귀만 한 게 없다

 

뒤돌아보면 환한 불빛, 아쉬운 기억들

콧잔등 하얗게 하루를 잊고

식구들 앞에 서면 미안해지는 눈자위

진통제처럼 술 한 잔 걸치면 하늘에 만개한 별들

 

새끼들 눈동자 속

당나귀, 꽃 보고 있다

당나귀, 꽃 보듯 한다

 
 
 
 

버티다 무너지는 것들에 대하여

 

 

 

버틴다는 말을

무너졌다는 말로 결말지을 수 있나

 

꽃 피면 할 수 없이

화려함으로 버텨야 하고

새들도 한 음절의 노래로

하늘을 버티며 날아간다

쭈그러진 아버지가

홀로 누워 생을 버티는 동안

아버지의 구두는 허기로 벌어진 입을

적막으로 버티고 있다

누가 그들에게

버틴다는 동사의 목적어를 물어볼 수 있나

 

막 떨어진 낙엽을 들여다본다

이렇게 곱고 섬세한 잎들도

때가 되면 가지를 놔 준다

목련도 미련처럼 보이기 전에

스스로 꽃의 목을 자른다

사랑조차도

견디는 일이란 것을 알아차린 듯

어둠 속 별 하나

스스로를 화장하며 별똥별로 지고 있다

 

버티던 것들만 무너질 수 있다

세상의 하루를 담담히 버텨 내고

해가 벌겋게 서쪽으로 무너지고 있다

시간과 장소가 지워진 기억 몇 개만

차갑게 밤하늘에 남을 것이다

 
 
 
 
 

4인칭에 관하여

 

 

 

영화가 시작된다.

1인칭과 2인칭, 착하거나 못 된 3인칭들

나머지는 배경이거나 세트거나 이름도 없고

상관도 없는 잡다한 것들, 4인칭이다

나는 가구다

옷장이면서도 옷 한번 배불리 품은 적 없다

나는 행인이다

하지만 한 번도 갈 길을 간 적이 없다

아무도 나에게 무례한 적 없다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거리에서, 편의점에서 사람들의 무표정은

배역을 받지 못해서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나는 다시 1인칭

내 곁에는 2인칭도, 3인칭도 없다

그들은 각자의 방문 안에서 1인칭으로 살고 있다

나에게 그들은 그들에게 나는 4인칭이다

문을 열고 입을 열면 저절로 인칭이 생기겠지만

4인칭끼리 말을 섞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런 밤이면 마음속에 구덩이를 파고

참았던 것들을 깊게 묻는다

 

외로운 별은 아무 때나 빛날 수 없다

바람 분다고 누구 앞에서나 몸을 뒤집고

속을 보일 수도 없다

4인칭은

장르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다

 
 
 
 
 

누가 꽃이 되려 하나

 

 

 

전에는 꽃을 너무 꽃으로만 보고

꽃말의 처방대로 간병만 했었다

지금도 꽃은 꽃이지만

누가 섣불리 꽃을 위로할 수 있나

 

유전이란 본능보다 집요하다

화려함으로 기억되는 이름을 위해

얼마나 깊이 생을 빨아야 꽃이 되나

중독될수록 선명해지는가

 

안으로 들어가며 마음을 잠근다

기억을 뒤져 꿈 몇 개를 들여다본다

커튼을 내리듯 눈을 감는다

심장의 공회전이 손끝에서 새어 나온다

자폭을 준비하는 팔레스타인 청년처럼

세상 끝에 장전된다

 

바람이 없었다면 꽃밭은 피비린내 났을 것이다

기어이 마음을 열고 들어가

하나하나 생의 무게를 해체하고 있다

 

바람이 부는 날

꽃들이 환하게 창을 연다

육중한 숲으로도 못 한 일을

가벼운 미소 하나로 해냈구나

 
 
 
 
 

새롭게 빛나는 저녁

 

 

 

빛을 섞으면 환해집니다

하늘의 것이니까요

색을 섞으면 까매집니다

땅의 것이니까요

빛은 하늘로 와서 색을 만들어내지만

아무리 색을 뭉쳐도 빛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모래를 뭉쳐도 모양이 될 수 없듯이

한번 흩어진 마음은 아무리 뭉쳐도

처음의 마음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시간을 이으면 영원이 됩니다

하지만 기억들을 불러 모으면

고스란히 아픔만 남습니다

소중한 것은 쉽게 깨어지고

그 가장자리는 왜 그리 날카로운지

그래도

아파했던 그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영원에 닿아 있었지요

영원은

길이가 아니라 깊이니까요

 

해가 방금 지고

거리의 불빛이

새롭게 빛나는 저녁입니다

 
 
 
 
 

휘어진다는 것은

 

 

 

바람이 불다

휘어지는 곳에서 휘파람이 된다

휘어지는 모퉁이마다 바글거리는 바람

오래 머물면서 소리로 피지 못한

바람의 상처를 듣는다

 

새벽빛 휘어져 노을이 되고

저녁 무렵, 휘어져 돌아온 아버지의 그림자

잠자리에서도 펴지지 않던 어머니의 등

휘어진 가로등 밑에 흩어진 꽃다발

늦은 겨울 밤거리를 휘어져 걷는 사람들

휘어진 길에서만 되돌아 보이는

지나온 발자국들

 

휘어진다는 것은

꺾이지 않고도 절망을 알고

꺾이지 않았기에 탓하지 않고

둥글게 안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구김 없는 수긍이리라

 
 
 
 
 

약력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2014)

미주 중앙 신인 문학상 당선(2011)

문협 워싱턴주 지부 회원, 시마을 동인

시집, 4인칭에 관하여(시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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