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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해 시집『가만히 먼저 젖는 오후』중에서

평설 이규식(문학평론가)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3/13 [12:45] | 조회수 : 55

 

▲     ©시인뉴스 포엠

 

권순해 시집『가만히 먼저 젖는 오후』중에서

 

 

■평설

 이규식(문학평론가)

 

삶의 정화를 향한 넓고 깊은 시선

-권순해 에서의 관조와 긍정의 힘

 

 

 

 

 

1. 위층 혹은 아래층

 

 

여섯 시에 일어나 오줌 누고

샤워하고

하루를 지갑에 넣고

유월의 강물처럼 출근하는

 

늦은 아침을 지루하게 먹고

설거지는 뒤늦은 장마처럼 하고

전화기로 햇볕을 널거나 바람을 넣거나

울거나 웃거나

 

안방에서 거실로 다시 베란다로

빠르게 혹은 느리게 포물선을 그리는 발바닥

 

나는 귀를 세우고 따라간다

 

생각처럼 말은 오고가지 못하지만

열린 창문이나 막힌 벽 사이로

 

서로 귀를 주고받는

 

 

-삶도 이렇듯 따분한 일상의 전개로 자칫 권태로 이어질만 하지만 시인은 아파트 ‘위층 혹은 아래층’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통하여 나름의 소통을 도모한다.

 

            (.......)

 

            안방에서 거실로 다시 베란다로

            빠르게 혹은 느리게 포물선을 그리는 발바닥

 

            나는 귀를 세우고 따라간다

 

            생각처럼 말은 오고가지 못하지만

            열린 창문이나 막힌 벽 사이로

 

            서로 귀를 주고받는

 

                                     - ‘위층 혹은 아래층’ 부분

 

 흥미로운 발상이다. 아파트 층간 소음으로 인한 갈등과 분쟁, 사생활 노출 그리고 폐쇄된 공간에서의 답답함 같은 부정적인 사고의 단서를 벗어나 긍정적인 소통의 여지를 상정하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교분이 없다 해도 위층 또는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과의 정신적인 교류, 영혼의 교감을 생각하는 시인의 상상력 외연은 바람직하다. 상징주의 시조 시를 보들레르가 산문시 ‘창문들’에서 저 건너편 창문 안 이름 모르는 노파를 바라다보면서 오로지 혼자 그 여성의 삶과 꿈, 전설을 만들어 가는 도시인의 아득한 소통, 상상의 교감을 노래했듯이 상처와 어둠을 견뎌온 삶의 숨통이 트이는 듯한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위층 아래층과 창문이나 벽을 통하여 “서로 귀를 주고받는” 정황을 상상하는 것은 현대 도시생활, ‘유목’의 삶을 표상하는 것은 아닐까.

 

 

2.  유목의 길

 

 

초원으로 향하던

검은말 한 마리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한 떼의 발굽 소리는 잦아들고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는 유목민들의 행렬

나도 검은말 잔등 위에서 내 길을 들여다보고 있다

초원은 눈앞인데 유목은 너무 멀다

 

누군가의 울음이 조등처럼 허공에 매달려 있지만

귀가 잘린 말들은 듣지 못한다

 

새로운 길은 수많은 발굽이 지나면서 만들어지는 것

그때 기우뚱 길이 잠시 흔들리는 것을 보는 자가 유목민이다

 

나는 말갈기를 흔드는 바람의 속도를 잰다

초원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깊고 어두운 나이를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열리는 유목의 길

 

잘린 귀들이 새싹처럼 다시 돋아나고

검은말이 머리를 숙이고 풀을 뜯는 자리

나는 살아온 만큼의 풍경을 오래 읽는다

 

 

-‘유목의 길’에서 시인은 유목의 삶을 통하여 얻는 삶의 지혜를 노래한다. 여러 상징과 비유를 앞세우며 시인은 지금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고 있다. 상처와 어둠이 고초를 거듭하며 단련되는 것이 삶이라면 5연의 여러 묘사는 지금 우리들 도시유목, 노마드의 속성을 집약한다.

 

            (.......)

 

            나는 말갈기를 흔드는 바람의 속도를 잰다

            초원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깊고 어두운 나이를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열리는 유목의 길

 

            잘린 귀들이 새싹처럼 다시 돋아나고

            검은말이 머리를 숙이고 풀을 뜯는 자리

            나는 살아온 만큼의 풍경을 오래 읽는다

 

                                     - ‘유목의 길’ 부분

 

 

 

3.  사과

 

 

한쪽에서 다른 한쪽에 닿기 위해

벌레 한 마리가 그녀를 파먹고 있다

 

꽃피던 날의 통증에 대하여

열매를 맺던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만

아득한 거리를 몸으로 들일 뿐

 

벌레가 꿈틀거릴 때마다

말없이 중심을 내어주고 있다

 

몸을 관통하는

중심을 보여주고 있다

 

 

숭숭하게 뚫린 저 벌레구멍이

그녀의 중심이다

 

 

-벌레 한 마리가 사과 한쪽에서 다른 쪽을 향해 파먹어 들어가고 있다. 크게 보아 삶에서 죽음을 향한 도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이 정경은 참신한 비유와 묘사로 돋보인다. 특히 2연은 인상적이다.

 

            (.......)

            꽃 피던 날의 통증에 대하여

            열매를 맺던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만

            아득한 거리를 몸으로 들일뿐

            (.......)

 

                                     - ‘사과’ 부분

 

 ‘중심’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중복사용하면서 혼돈의 시대, 상실의 시대, 배회의 시대, 유목의 시대,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시대 그리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시대에 과연 ‘중심’이 무엇인지 두루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권순해 시인의 시창작 작업 그리고 이번 시집에서 일관되게 묻고 또 스스로에게도 해법을 구하며 제기하는 삶의 예지는 결국 ‘중심’을 찾는 작업을 향하여 모아지고 정렬되고 있다.

 

 

 

4.  아직은 멀다

 

 

경북 영주 무섬마을에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가 있는데요

체통 없이 굴거나

거드름을 피우다가는

강물에 빠지기 십상인데요

양반들 팔자걸음으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었다네요

 

다리를 건너는데도

요령이 있다는데요

마음 중심을 바닥에 두고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외나무다리 위에 서서

 

슬쩍 주먹을 펴보는데요

뼈마디 부서지는 소리만

강물 속으로 흩어지네요

 

-중심이 갖추어진 삶과 일상의 언저리에서는 헛된 권위나 허영, 교만이 자리 잡기 어렵다. 모랄리스트의 눈으로, 모랄리스트의 인식으로 바라볼 때 자연스러운 경구, 근엄하거나 위압적이지 않은 신선한 표현의 잠언이 그대로 도출될 수 있었다.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려면 나름 안목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다리를 건너는데도

            요령이 있다는데요

            마음 중심을 바닥에 두고

            움켜진 주먹을 펴는 것이라네요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외나무다리 위에 서서

            뼈마디 부서지는 소리만

            강물 속으로 흩어지네요

 

                                     - ‘아직은 멀다’ 부분

 

 부디 이 ‘중심’을 나침반 삼아 삶과 일상, 인간과 사회에 대한 넓고 깊은 사랑과 이해를 증폭시켜 나가기 바란다.

 

 

 

5.  간이역

 

 

오래된 책의 행간에서

툭 떨어지는 사진 한 장

 

누군가를 떠나보낸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떠나온 것 같기도 한 거리를

반짝이는 선로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안녕 하고 짧게 손을 흔드는 사이

기차는 시간 저편으로 사라지고

단단하게 허공을 붙잡고 있는 젖은 눈

 

 

풍경을 하나씩 들여다보지만

쓸쓸함만 자라날 뿐

기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뜨거운 아픔으로 금이 간 다기처럼

나는 여전히 간이역을 배경으로 앉아 있다

 

- ‘간이역’은 흔히 사용되는 시적 대상이며 제목이기도 한데 독자는 표제만으로 이미 나름 시의 전개를 짐작하고 평가하기도 한다. 기차, 여행, , 특히 지금은 찾기 어려워진 간이역은 진부해 보이지만 그 개념과 의미 자체가 삶의 보편적인 속성이 한 단면을 내포하고 있다. 삶과 직, 간접으로 연관을 맺는 개념은 대부분 상투성을 띠거나 진부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삶의 순간순간 우리가 처해 있는 현장이 간이역 그 자체임을 마지막 행에서 그려낸다.

 

            (.......)

            뜨거운 아픔으로 금이 간 다기처럼

            나는 여전히 간이역을 배경으로 앉아있다

 

                                     - ‘간이역’ 부분

 

 간이역이나 그보다 큰 규모의 역에서거나 하루에 몇 번 일정한 시각에 열차가 도착하고 떠난다. 반복이 거듭된다.

 

 

6. 인형뽑기

 

 

그는 뽑기 고수다

 

퉁이는 15

도라에몽은 33

피카츄는 20

 

내가 당신의 표적이 되었다가

당신이 나의 표적이 되었다가

번번이 어긋나기만 하던 것처럼

 

그도 처음부터 고수는 아니었다

이브를 놓치고

냐오빌을 앓으면서

길고 긴 하수를 건너왔다

 

누군가의 표적이 되기위해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기 위해

킁킁 냄새를 맡으며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

 

눈알이 빠진 도라에몽과

팔이 없는 피카츄들이

거리 곳곳에 나뒹굴어져 있다

 

그도 누군가에게 뽑힌 적이 있다

 

 

-매 순간순간 우리의 삶은 선택을 요구받는다. ‘뽑기’ 능력과 수완이 비범할 경우 큰 역량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 내가 당신의 표적이 되었다가/ 당신이 나의 표적이 되었다가/ 번번이 어긋나기만 하던 것처럼 (.......) 누군가의 표적이 되기 위해/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기 위해/ 킁킁 냄새를 맡으며/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 (‘인형 뽑기’ 부분)” 같은 몇 행으로 선택과 뽑기 능력이 삶의 중요한 속성임을 강조한다.

 

 

7.   못자국

 

어는 성인의 못자국을

당신 손에서 봅니다

 

한 번도 들춰 보지 않았던 상처가

애벌레처럼 꿈틀거립니다

 

무거운 공중을 들어 올리느라

계절의 끝에서 반쯤 무너져 내리던 나무처럼

 

너덜너덜해진 통증을 주삿바늘에 기댄 채

그 손 더 높이 들어 올립니다

 

폐그물처럼 낡은 당신의 손금 위에

가만히 눈빛 하나를 포갭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공중이 추락하지 않는 것은

맑고 깊은 손자국 때문이라는 걸

 

박힌 자리에서 빼낼 수 없는

저 단단한 자국들 때문이라는 걸

 

 

-이 시집에서 눈여겨 볼만 한 구절의 하나인 위인용은 그 자체로 시인의 심성,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이번 시집에서 우리와 소통하려는 그의 시적 메시지의 일단을 보여준다. 부박한 세상, 누항의 헛된 유혹과 산재한 위험 속에서 우리를 꼿꼿이 세워주고 막아내는 것은 못자국, 단단한 자국이라는 역설적 선언의 언사는 그래서 인상적이다. 단순한 수사적 표현 차원을 넘어 오랜 내면의 수련과 시적 내공을 거친 사람이 토로하는 단순하지만 의미 있는 구절로 이해된다. 시를 쓴다는 것도 결국 그런 자국을 찾아 끊임없는 탐색을 계속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권순해

2017년 포엠포엠 등단

2018년 시집『가만히 먼저 젖는 오후』

2018년 강원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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