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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마부』/ 정원도 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3/20 [14:14] | 조회수 : 198

 

  © 시인뉴스 포엠



 

 

시집 『마부』/ 정원도 시인

 

말고삐 함께 끌어주며

 

 

밤늦도록 동리 과수원을 돌며

잠 설쳐 무겁직한 머리 새벽 찬 바람에 헹구며

팔공산 돌아온 금호강물에

긴 그림자 비추며

 

낡은 마차의 삐걱대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 번갈아 뒤뚱거리며

가쁜 숨 몰아 오르던 큰고개*

 

어둔 새벽에도 날뛰던

들치기들의 습격을 염려하는 선두꾼

말 호리는 소리에 서툰 노래자락에

정든 길 서린 눈썹마다 이슬이 되어 맺혀

 

새벽 달빛도 말고삐 함께 끌어주며

타령조의 거친 고개 억척으로 넘고 넘었다

 

 

*큰고개: 대구시 신암동 소재의 고개 이름.

 

 

편자 교체

 

 

아스팔트도 녹아내리는 한여름 오후가 되면

희멀건 거품 내 뿜으며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마저 지쳐

 

편자 갈아줄 틈도 없이 바쁜 길 재촉하다가

말발굽 닳은 탓에 성난 말 절룩거리면

젖은 등 쓸어주며 발굽 꺾어 올려보고

 

편자를 교체해 주러 간다

 

장제사 익숙한 솜씨로 편자 덧댄 못 뽑아내고

비뚤어진 말발굽은 밀칼로 깎아내어

벌겋게 달구어진 편자 발굽 크기에 맞추어

망치로 뚱따당 땅땅! 다시 재단하면

기겁하는 말울음이 차라리 적요했다

 

허벅지에 덧댄 고무판 위로 말발굽 구부려 올려놓고

덜 식은 편자 발굽에 박을 때마다

놀란 말들 힝힝대며

커다란 눈망울이 다 젖고  

 

김 서린 연기 희뿌여니 날리면

발굽 타는 냄새가 사방에 등천登天

고삐를 묶어두었던 나무기둥마다

마부들의 손때가 요란하게 살아 번들거렸다

 

 

 

아버지의 말

 

 

그때 아버지의 말은

누구보다 우리 집 형편을 잘 알아서

과로에 몸살 난 몸으로도 억척으로 일했다

 

새벽길 나서던 아버지 시름 떨치는 콧노래에도

긴 말총, 엉덩이 실룩 잘도 장단 맞추며

마차가 삐걱거리도록 과적을 하여도

묵묵히 투정하나 없이 넘던 고개

 

새벽녘 별빛과

말의 눈매와 아버지의 눈시울은

서글서글하니 한 식구처럼 닮아서

아버지 재촉하던 말발굽 자국이

화인火印처럼 날아와 박혔다

 

 

아버지 몸살이라도 날라 치거나

엄살이라도 앓아누우면

어머니 대리 마부가 되어 새벽마차를 몰았다

 

 

 

말길들이기

 

 

소작을 부친다거나 마차를 끄는 일은

그들의 천직이라

녹슨 양철 대문이 사납게

바람 불 적마다 울어대던 골목

 

해거름 산들바람도 숨죽이고 지켜보는데

두 팔 크게 허공으로 채찍을 날리며

찾는 이 없는 겨울 강변 말 길들이러 간다

 

천방지축 나라님은 청포장수*가 길들이듯

버둥대는 야생마에 재갈을 물리고

마차를 채우고

빈 마차 짐 늘려가며 함께 버둥대기 몇 시각

 

그 사납던 놈이 언제 그랬냐 싶게도

고삐 내려치면 치는 대로

더 실은 짐짝에도 고분고분

어둠 할퀴던 말발굽 소리가

금호강 휘도는 밤물결에 실려 잔잔했다

 

 

 

*동학의 전봉준을 이르는 말.

         

 

 마부의 아들2

 

 

 

끝없는 탱자나무 울타리마다

새하얀 탱자 꽃이 피었다 지면

누렇게 익은 탱자 향이 곱절로 하늘에 오르고

삐걱대는 마차를 채찍질하던 손에도

탱자향이 스며들어 코를 설레게 했다

 

하현달 기우는 밤마다

어둑한 남폿불 아래 모여 앉은 마부들

두부내기 화투는

식민지 시절 일본군 부역을 피해 다니던 이야기나

동족상잔의 참화가

포탄껍데기마냥 시뻘겋게 널브러졌다

 

담배연기가 오소리 굴처럼

쿨럭이던 화투 방의 긴 밤을 건너

식구들 죄다 들일 나간

빈집을 지키다가 보았다

 

양수 째 쏟아진 망아지가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뒤뚱거리는 몸짓으로

비좁은 마구간을 마구 뛰어다니는 것을

 

그 젖은 눈망울이 마당을 휩쓸 즈음

망아지 올라타는 재미에 지친 감나무 그늘이

담을 넘던 저녁이었다

 

 

 

 

 

 

 

 

말꼴을 베다가

 

 

 

말꼴을 베다가 내 발등 내가 찍어

뽑히지 않는 낫을 부여잡고 까무러치던 대낮

 

들녘 나가던 동네 아재의 손에

피 묻은 낫이 빠지고 벌어진 살 틈으로

어머니 풍년초 살담배를 털어 넣자

또 기절했다

 

언제쯤 다시 깨어났을까?

해거름 노을이 벌겋게 거품을 문 채

빛바랜 장독간 뒤로 저물고 있었고

 

말은 그런 피 묻은 꼴 맛을 알기는 했을까?

 

내가 얼어붙은 연못에 빠져

영문도 모른 채 죽을 뻔 했던 이후

마부 아버지와 그 말의 싱싱한 울음을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

 

 

 

마부와 시인

 

 

길들인다는 말의 양면성을

나는 어릴 때부터 터득했다

 

아버지 노쇠한 말을 갈아서

새 말을 길들이러 가던 금호강변

바퀴가 푹푹 빠지는 길도 없는 자갈밭을

재갈을 물리고 마차를 채우면

빈 마차조차 거부하며 날뛰던 말을

 

긴 갈기 목덜미 쓰다듬으며

어르기도 하다가 달래보기도 하며

조금씩 짐을 늘릴수록 버둥대다가

커다란 눈동자 껌벅대며 눈물을 뿌려댔다

 

 

그렇게 아버지는 짐을 거부하며

날뛰는 말을 길들여야 하는 마부가 되었고

 

나는 너무 온순하여 소용이 못되는 말

사납게 날뛰기도 하는 말로 길들여야 하는

또 다른 마부가 되어갔다

 

 

 

 

 

 

 

 

 

 

 

 

 

<시인의 해설『마부』(산문)>

 

마부와 마부의 아들

1

 

내 시의 시작은 죽음이었다. 모든 존재를 단숨에 무로 돌려버리는 죽음. 생명의 유일한 통로이자 의지가지였던 부모를 어린 나이에 여의게 된 이후로 나는 날마다 아득한 절망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시는 문학이 아니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 유일하게 나를 정화시켜주 해원같은 것이었다. 갓 스물 무렵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처럼 나의 삶을 시로 기록해보고 싶던 간절함도 어느덧 4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포항공단의 한 귀퉁이에서부터 공장생활 틈틈이 독학으로 시를 끄적거린 것도 다 일찍이 여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에서부터 시작된 필연적인 운명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습작은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나마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를 지켜준 유일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밤마다 지친 잔업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향한 욕구를 제대로 채울 수조차 없던 시절에 불현듯 다가온 상념의 쓰디쓴 결실인 것이다. 형산강을 건너는 끝없는 황색 작업복의 자전거 대열에 끼어서 출퇴근하던 공단의 매연 자욱한 불빛을 바라보면서, 저 거대한 용광로 불꽃과 함께 살아가야 할 삶들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고, 그 많은 번민의 끝을 실행에 옮겨보기로 한 것이 이 자전적 연작시 ‘마부’인 것이다.

 

 

2

 

아버지는 큰고모부의 권유로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후 새어머니가 들어오셨을 때였다. 당시 금호강을 낀 경산 일대가 대구 사과, 대부분의 산지여서 고향인 반야월도 생산의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곳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버지의 마부 생활은 내가 5세 때부터 10세 때까지 6년 정도 지속되다가 막 화물차가 등장하면서 그 짧았던 마부의 길도 접게 되고야 말았지만, 내게 남아있는 아버지의 기억은 대부분 마부일로 바쁘시던 그때의 모습들이다.

 아버지의 마차 일이 끊어진 이후로는 궁여지책으로 어머니가 식육점을 시작하기도 했는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어머니의 과욕이었는지 3,4년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접게 되고야 말았다. 아버지는 그 무렵 좋아하시던 막걸리 과음으로 귀가하신 후 주무시던 잠결에 세상을 하직하시니 그때 내 나이 겨우 열 넷 되던 해였다.

중학교를 막 입학했던 어느 날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아버지께서 심한 헛소리를 하시며 정신이 몽롱한 증세를 보이셨는데 불안한 마음이었지만 학교가기를 재촉하는 어머니의 호령으로 마지못해 등교하여 수업이 막 시작되던 찰나였다.

 

동네 아주머니가 다급히 나를 찾으러 오셨고 나는 아버지 마지막 떠나시는 모습조차 보지 못한 채 그리움으로 삭혀야 하는 운명이 되고야 말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인은 뇌출혈이었지만, 그런 사단이 일어난 것은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동네마다 사방사업이니 배수로 공사니 부역으로 불려 다니며 얻어 마신 공짜 막걸리에 탈이 난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 새마을이란 말만 들어도 외면했다.

 

그 당시 반야월에는 아버지와 같은 마부 동기들이 꽤나 있었다. 동무 아버지와 뒷집 아재가 가장 기억에 남는 마부였고, 그들은 일 없는 밤마다 우리 집 오두막 골방에 모여앉아 화투를 치거나 막걸리 추렴이나 하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아버지 마흔 하나에 태어난 늦둥이 외동이다 보니, 아버지는 늘 나를 귀하게 데리고 다니셨다. 그나마 가장 소중한 추억들의 대부분이 마부들끼리의 한담이나 화투판에 끼어 귀동냥한 이야기들인데, 지금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할 따름이다.

나와는 다섯 살 차이인 막내 누님과 둘이서 자주 말꼴을 베러 다녔는데, 누님이 하도 겁이 많아서 들녘에 나갈 때면 언제나 어린 나를 앞세우고 슬그머니 뒤따라 다녔다.

때로는 동네 형과 함께 들에 나갔다가 형의 꼬임에 빠져서 오후 내내 베어 모은 한 망태기 풀을 ‘낫 던지기’ 내기에 다 잃어버려서 어둠이 깔릴 때까지 홀로 남아 비워진 말꼴을 채워야 했다.

나는 왼손잡이인데 낫은 전부 오른손잡이용으로 휘어져 있어서 걸핏하면 손가락을 베게 되었다. 아버지는 상처 난 내 손가락에 오징어 뼈를 갈아서 헝겊으로 싸매줄 때가 다반사였다. 그때 당한 수난들만 돌이켜 보아도 눈앞이 아득해지는 사연들이 수두룩하다.

한 번은 누나와 함께 작두로 말여물을 써는데, 처음에는 내가 작두를 발로 밟다가 잘 못 하니까 누나가 작두를 대신 밟고 내가 여물을 우겨넣다가 서로 박자가 맞지 않아 내 오른쪽 검지를 잘라버렸던 일도 있었다.

또 한 번은 도랑에 자라는 질긴 풀을 낫으로 내려찍다가 발등을 찍는 바람에, 뽑히지 않는 낫을 부여잡고 누나와 둘이서 울며불며 들일 나가던 동네 아저씨를 불러서야 겨우 그 낫을 뽑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어머니가 벌어진 상처에 풍년초 살담배 부스러기를 우겨넣고 싸매는 바람에 실신하기도 했다. 지금도 낫날이 박혔던 오른쪽 발등 내려다볼 때마다 시리고 아렸던 그때의 통증이 되살아나곤 한다.

 

 

땡볕 긴 금호강변에서 해가 저물도록 땀 뻘뻘 흘리며 말을 길들이던 아버지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노쇠한 말을 새 말로 갈아치운 날 처음으로 재갈을 물리고 길마를 얹고 빈 마차를 채운 후 금호강 자갈밭 길을 몰아 말을 조련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거세게 거부하던 말이 어떻게 어르고 달랬는지 조금씩 짐을 더 얹어도 고분고분 마차를 잘 끌어 주었다. 말을 조련하느라 아버지 마른 입술에서 초조하게 타들어가던 담뱃불을 바라보며 어린 입술도 함께 타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3

 

내 귀가 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때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어렴풋이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 대신 새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어머니가 들어오고 한 달 만에 네 살이 되었다고 하는데, 어릴 때 어른들끼리 나누던 이야기를 흘려듣노라면 어머니는 늘 내가 당신을 친어머니로 알고 있다는 것을 큰 위안으로 삼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친어머니인줄만 아는 아들로 보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그런데도 새어머니와 처음 만났던 기억은 전혀 없고, 느닷없이 불쑥 찾아와 하룻밤을 함께 보냈는지 어땠는지도 알 수 없는 어떤 여인에 대한 기억이 더 생생했다. 어여쁜 얼굴에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맵시 있는 모습이었다. 어린 가슴마저 설레게 하는 화사한 분 냄새를 풍기며 가방 하나 들고 왔다가는 자취를 감춘 어떤 여인 말이다.

어둔 안방의 윗목에 다소곳이 앉은 채, 눈빛이 마주친 나를 손짓해 당신의 옆에 앉히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 연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살기 힘든 시절에 어찌어찌 소문을 듣고 찾아왔으리라. 그리고는 도저히 살 곳이 못되는 살림살이를 마주하고는 종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

 

훗날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물으니 당신이 오신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후처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가 찾아왔으나 차편도 여의치 않던 시절에 바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형편이라 하루 묵은 다음날 떠났다는 것이다.

그날 어머니는 집을 피해서 어머니를 소개시켜준 아는 동생네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기이한 일이었다. 새어머니는 내가 너무 어릴 때 생모가 죽어 당신을 친엄마로 안다는 것이 큰 위안이라도 되는 듯했는데, 정작 나의 기억 속에는 생모를 초상 치던 풍경이 생경하게 살아있다니.

그 기억이 친어머니 장례 풍경이었다는 것은 내가 예닐곱 살 때부터 알아차렸다. 넓은 마당이 있는 오두막이 있었고, 장독대가 있었고, 집 옆에는 작은 마구간까지 딸려 있었다. 담벼락 옆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망아지와 내가 숨이 차도록 뛰놀았다.

그 마당 한가운데 차일이 쳐지고 동네 사람들이 북적대며 문상을 다녀갔다. 그 슬픔 때문인지 워낙이 막걸리를 좋아하신 탓인지 아버지 몸에서는 해거름이 가까워올수록 막걸리 냄새에 독한 담배 냄새가 났다. 그 냄새 때문에 아버지 무릎에 앉아있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어머니를 태운 상여가 대문을 나설 때 멋모르고 골목을 뛰어다니다가 마주친 기억이 또렷한데 그것이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인지를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사인이 무엇인지는 알 턱도 없고 치료할 병원도 없던 시절에, 자신의 몸은 돌 볼 틈도 없이 일하며 참는 데만 능숙하다가 기어이 변을 당하고야 만 것이리라.

그렇게 가엾은 첫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멍에가 되었다. 그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 몸이 먹먹해져 온다. 그녀를 회상하는 글을 쓰다가도 온 몸에 신열이 돋고, 회갑이 가까워오는 나이에도 물밀듯이 밀려드는 그리움에 극심하게 앓아눕고야 만다.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날은 내 몸속에 물려주고 떠나신 그녀의 영육을 더듬어 대화를 나누고, 지금도 그럴 때마다 내게 말을 건네 오는 환청이 들려온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것은 오월의 어느 날이었고 새어머니가 오신 날은 설날 한 달 전이었다고 하니, 그렇게 인연이 된 새어머니는 가장 오래토록 나와 함께 했다. 돌이켜보면 허물 많은 나를 일깨우러 신이 보내주신 특별한 인연이라 믿는다.

어릴 때는 “낳은 어머니가 아니라서 그렇지!” 라는 말도 많이 들었고, “그래서 그럴까?” 미움이 컸던 적도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게 다 나를 강하게 키워준 큰 은혜임을 깨닫는다. 그때 그리 모질게 단련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나를 낳으시고 지켜주신 운명의 세 어머니에게 바쳐야 할 효를 남은 한 어머니에게 바쳐야 하므로 나는 세 곱절의 노력을 해야 하리라!      

 

 

4

 

그런 어머니께서 나에게 셋째 어머니까지 특별히 맺어주신 것은 결국 당신과 내가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음은 뒤늦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어느덧 식구로 익숙해졌을 무렵, 위로 누님 셋은 저마다 초등학교만 마치거나 그나마 그것마저도 포기한 채 뿔뿔이 공장으로 살 길 찾아 떠나야 했고, 나와는 띠 동갑인 큰 누님은 어머니와 나이 차가 많지 않은 탓이라 걸핏하면 티격태격 댔으며 누이 셋은 순식간에 입 하나 덜기 위한 출가로 시집을 가야했다.

무속신앙이 깊던 시절에 무당이 나보고 “어미를 셋 둘 팔자!”라는 말이 어머니 맘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 말은 결국 새어머니 당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그래서 택한 것이 빤눈이 무당을 나의 셋째 어머니로 삼는 일이었다. 빤눈이라는 별명은 종갓집 형수님이 지어 부르기 시작했는데 양쪽 눈이 심하게 초점이 돌아간 사팔뜨기라 붙여진 별호이다.

 

내가 처음으로 시내버스를 타게 된 것도 그 무당집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와 단둘이 대구 변두리 산동네를 글자도 모르는 어머니 손에 쥐어진 주소 하나로 물어물어 찾아갔다.

 

기울어져 닫히지도 않는 대문을 밀고 들어서니 빼꼼히 열린 방문 사이로 조그만 불상 하나가 단출하게 모셔진 채 사람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 무당을 어머니로 삼는 예를 올리고 징표로 받은 수저 한 벌을 어머니 당신은 자신의 목숨처럼 챙기셨고, 내가 밥 떠먹을 때 마다 그 숟가락을 쓰는 것이 중요한 비방이 되었다.

아마도 그 수저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신과의 약속이 깨어져버려 또 다시 셋째 어머니가 생기는 변고가 닥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무당이 우리 집 굿을 해 준 것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두어 번 있었는데 신대를 꺾으러 해 저문 과수원 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굿이 시작되고 신대를 잡은 큰어머니가 무당의 주술에 잡은 신대를 심하게 흔들어대다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까무러치는 것을 보았다. ! 어떻게 무당의 주술에 저렇듯 영혼이 흠뻑 젖어 기절할 수가 있을까? 기이하기도 했다.

그때의 북소리와 징소리를 잊지 못할뿐더러 어린 숨결에 깊이 새겨진 탓인지 지금도 자제력을 잃은 북과 징이 격정적으로 우는 소리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굿을 할 때마다 안방에서 어머니와 무당과 셋이서 나란히 잠을 자며 ‘낳아주신 어머니는 세 살 적에, 아버지는 또 열넷에 떠나보내고 남은 새어머니와 나는 얼마나 기구한 운명이면 무당까지 셋째 어머니로 삼아 한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것일까?’ 그 불운에 대해 밤새워 절망하기도 했다.

 

그 후로 나는 어머니가 맺어주신 셋째 어머니의 징표인 수저를, 공단에서 떠돌던 이삿짐마다 고이 챙겨 다니곤 했다. 지금은 그 굿을 주도했던 종갓집 형수님도 구순 중턱에서 세상을 뜨시고, 어머니는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면서 아들을 따라 개종했다. 난공불락의 무속에 심취되어 성당에 가기만 하면 온 몸을 떨며 극도의 아픈 증세를 보이는 통에 무던히도 애를 먹기도 했다.

 

 

 

5

 

지금도 고향에 내려가면 어머니를 기억하는 이름은 이밥재이로 불린다. 이밥재이라는 말은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보리밥을 못 드셔서 큰어머니 시집오셔서 가마솥에 밥 할 때마다 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시동생 밥은 무조건 삼베주머니에 따로 순 쌀로 안쳐주어야 했대서 이밥재이가 되었다.

새어머니 들어오시고 10년 만에 또 아버지를 여의신 후 나와는 평생을 함께 사셨으므로 어쩌면 아버지는 후처를 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부재 시의 어린 아들을 염려하여 새어머니를 구해놓고 떠나신 셈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로부터 가장 불행한 운명공동체가 되어 온갖 난관을 함께 헤쳐 나와야 했다. 유복한 집안의 따스한 축복도 없이 출가하여 험난한 세상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세 누님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버지가 몸져누웠을 때는 어머니 대리 마부가 되어 새벽 마차를 몰고 저 거친 마부 사내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30리 먼 길 대구 청과물시장으로 향했을 모습은 상상만 해도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저녁나절마다 금호강변 긴 과수원 길을 지친 말발굽 소리에 신명 한바탕 싣고 마차를 몰고 다니셨던 마부 아버지. 그리고 나를 낳아주시자 마자 다급히 세상을 뜨신 어머니와 그동안 힘겹게 나를 길러주시고 지켜주신 어머니의 잠든 머리맡에 이 시집을 바친다!

 

       

     

   

 

 

      정원도 시인 약력:

  -1959년 대구 출생.

  -1985년 『시인』지에 「삽질을 하며」등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그리운 흙』(1988, 시인사)/『귀뚜라미 생포 작전』(2011, 푸른사상사)/    『마부』(2017, 실천문학사)

  -()한국작가회의 감사, ()한국작가회의 연대활동위원장, 분단시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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