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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 해변에서 외1편 / 허민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3/26 [09:40] | 조회수 : 47

 

  © 시인뉴스 포엠



말라가 해변에서

 

 

 

 검은 머리카락들이 벌써 출렁거리고 있었어

 먼 곳 글썽이는 빛들은 바로 우리가 떠나온 생들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오래전 파도는 지금 귓가에 닿는구나

 죽은 별들이 입술을 모아 내뱉는 흰 휘파람처럼

 

 왜 이제야 나와 너는 이 해변에 도착했는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모래밭 검은 손가락들을 몸에 적시며, 입술을 만지며

 

 그러나 우리는 매번 사라지는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을 늘 불안해하면서

 맞은편 거대한 트럭이 역주행해 오는 명멸의 상상을 맛보면서

 

 드디어 이 바닷가에 도착한 거야, 일출을 기다리며

 해변 발코니에서, 보이지 않는 별들이 옷 벗는 소리를 엿들으며

 너와 나의 피를 유리잔에 가득

 붓고 마셨다

 

 말라가 해변에서 우리가 모르는 이국의 문장이

 모래밭에 연주하는 세월들을 내려다보면서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벌써 오래전 일

 그날밤 발음했던 그 해변의 인사가

 오늘밤 귓가에 쌓인 자갈들을 찰랑거리고 있듯이

 

 그곳을 떠나고서야 그곳에 닿는 긴 여정은 불안하고 실패했나, 그래서 마침내 짧은 인생을 간신히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오랜 뒤 여행기(行記)를 다시 여행하며 미처 읽지 못했던 숨은 문장에

 고요한 밤 밑줄을 긋듯이

 

 

 

 

 

-계간<창작21>2019겨울호발표

 

주저하는 우리에게

 

 

 

 영동고속도로 품 안에는 강릉가는 길이 잠들어 있고

 

 봉평 터널 즈음, 태풍을 기억하는 금강소나무 몇몇이 산 아래로 기울어진 채 생을 낭비하고 있었지

 

 쓰러진 나무를 나머지 나무가 떠받든 채 서로 죽지 않고 그대로 자라나고 있던

 

 사랑과 몹시 다툰 후 떠나온 길,

 한없이 절벽 아래로 기울어진 채 자포자기한 지난 휘파람들이 차창을 스쳤다

 

 그렇게 기울다가 문득 사랑에 안겨, 생이 기울어졌다는 것도 잊은 채 살아왔지

 

 금강소나무들은 그렇게 하나하나, 각자의 그늘을 함께 묶어 곧은 군락을 이루고

 

 아직도 우리에게 모든 무게를 안심한 채 맡기지 못했다

 밑으로 엉킨 뿌리들, 감춰둔 시린 비밀들이 자라나 서로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계간<창작21>2019겨울호발표

( <주저하는 우리에게>는 문예지 발표 후에 내용 및 형식을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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