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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는다는 것 외1편 / 권상진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3/26 [10:10] | 조회수 : 209

 

  © 시인뉴스 포엠



접는다는 것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 같이 선명하다

 

한 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 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 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를 변용

 
 
 

테트리스

 

 

다섯 평 원룸에 삼대가 삽니다

서로 살을 맞대는 일이

이 방에선 오히려 도덕적입니다

 

필요한 건 거의 다 있어요

꼭 필요하지 않은 게 없을 뿐

우아하게 놓여있지 않을 뿐

 

딱 추워 죽지 않을 만큼, 딱 더워 죽지 않을 만큼

비좁은 계절은 독특했지만

봄과 가을이 그 사이에 한 번씩 있다는 게 어디예요

 

어쩌다 일요일

할머니의 낮잠이 가로로 눕습니다

아이들 숙제는 세로로 엎드리고

엄마는 하릴없이 동네를 걷습니다

경계는 언제나 접점 입니다

 

바닥에는 서열이 있습니다 혹은 없습니다

할머니 이부자리가 깔리고 나면

우리는 나이순으로 혹은 귀가 순으로 배치됩니다

매일 새로운 모양으로 완성되는 가족은

밀려난 옷걸이와 모로 누운 밥상이 있어서

언제나 안심입니다

 

방을 집이라 부릅니다

가끔 틈이 생기는 날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 집에다가 

다시 칸을 지를 순 없잖아요

 

 

 

 

 

 

 

[ 권상진 약력 ]

 

경주 출생.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복숭아문학상 대상, 경주문학상 수상

시집 『눈물 이후』(2018년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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