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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 시인 / 시집 해설 : 정우영 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4/06 [08:12] | 조회수 : 92

 

  © 시인뉴스 포엠



 

대바구니 행상

 

 

 

검정고무신 신고서 폭설에 덮인

동구 밖 한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서산에 해 지고 소리 없이 기어오는

검은 장막이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눈앞에서 모든 물상을 집어삼킬 때까지

 

곡두새벽 장성역에서 조치원역으로

비둘기호 타고 떠난 어머니는

열흘째 돌아올 줄 몰랐다

 

대숲이 품에 안은 아담한 초가 처마에서

맑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고드름은 어젯밤보다 목이 길어졌고

 

차갑고 어린 내 가슴은

슬픔이 물구나무서서 자라는 고드름이었다

 

 

 

 

 

 

 

 

 

 

 

 

 

 

 

 

 

 

 

 

 

구조

 

 

 

뿔도 없는 매미가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을

머리로 자꾸 들이받는다

 

나는 창문을 열고

거실로 얼른 달려가

형광등을 끈다

 

원전 하나가

날개를 접고

낮달 같은 지구에

혈색이 돌아오는 밤

 

 

 

 

 

 

 

 

 

 

 

 

 

 

 

 

 

 

 

 

 

 

 

 

 

 

마음에 새긴 비문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나는 담양에서 광주로 유학을 가서 양림동에서 자취를 했다. 단풍이 비단개구리 떼울음으로 병풍산을 내려오던 어느 토요일 오후. 집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동틀 무렵부터 해질녘까지 식구끼리 조선낫으로 벼를 벴다.

 길고 고단한 일요일 저녁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가야 했던 무거운 발걸음. 우리 마을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신작로가 나왔다. 가난한 삶처럼 울퉁불퉁하고 먼지 풀풀 날리는 그 신작로 가에 허름한 원두막 같은 버스 승강장이 있었다. 나는 일주일치 양식인, 자루에 든 쌀 두 되를 어깨에 메고 막차를 타러 논길을 진땀나게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어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달려오고 계셨다. 숨을 헐떡이며 다가오신 어머니는, 붉은 라면봉지에 싸서 노끈으로 묶은, 아직도 따뜻한 무언가를, 두근두근 기다리는 나에게 건네주셨다. 그리고서는 아즘찮은* 몸짓으로 막차를 놓치겠다며 어서 가라고 재촉하셨다. 둥근달이 뾰족한 꼭대기를 품은 소나무 아래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초등학생처럼 작아진 어머니는 아직도 그곳에 서서 막내아들 뒤통수를 짠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감나무가 많은 시목마을 열녀비각을 지나 논길이 굽은, 어머니가 보이지 않은 언덕배기에서, 그 라면봉지를 펼쳐보았다.

 구운 갈치 두 토막! 느닷없이 비린내의 날카로운 가시가 왜 그렇게 서럽고 시큰하게 내 눈과 코를 깊이 찌르던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눈앞이 흐려 하늘만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탔다. 고단함이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꽉 찼다. 묵은 파김치가 된 운전사와 차장과 나, 세 사람이 버스를 전세 낸 듯, 실내는 썰렁하고 침침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유령 같은 미루나무 우듬지에 빈 까치집이 차츰 작아지면서 고향이 멀어져갔다.

 글을 배우지 못한 어머니는, 한 자도 남겨줄 수 없어서, 소박한 생활과 얼로 비문을 새겨놓고 세상을 떠나셨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그 비문은 비바람에 조금도 풍화되지 않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있다.

 또렷이,

 

 ‘비릿한 삶을 구워 구수한 향기를 내라.

 

 

 

 

 

 

 

 

 

 

 

 

 

찍기

 

 

 

수진이 수학시험 답안지는

술에 만취했다

반 번호 이름을 겨우 쓰고

이분 거리도 안 되는 내리막길을

, , 점…

수성사인펜을 짚고

비틀거리며 걷다가 도중에

토끼처럼 잠이 들었다

 

 

 

 

 

 

 

 

 

 

 

 

 

 

 

 

 

 

 

 

 

 

 

 

 

 

 

 

 

 

실화

 

 

 

큰 일 났다

점심때 아내가 집에 없어

혼자 컵라면을 끓여먹으려고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아무 생각 없이 가스 불에 올렸다

베란다에 컵라면을 가지러 간 사이

커피포트 플라스틱이 홀라당 타버렸다

잽싸게 가스 밸브를 잠그고

질식할 듯 매캐한 냄새와 검은 연기를

부채로 몰아 부엌 밖으로 쫓아냈다

가슴이 벌렁거려서 쫄딱 굶고

실수로 불을 냈지만

아내에게 혼날 일만 남았다

으째야쓰까 으째야쓰까

증거를 죄다 없애기 위해

얼른 버리고 새 것으로 사다 놓을까

아니면, 말끔히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하고

대문에서 두 손 들고 기다리다가

생뚱맞게 사랑한다고 말할까

아니면, 손을 꼭 잡고

내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더라도

나를 버리지 않을 거지, 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자아내

자초지종을 말할까

아니면, 짓궂은 유언장을 남기고

며칠 집을 나갈까

외려 뻔뻔하게 큰소리치며 대들까

집을 고스란히 태우지 않은 일만도

얼마나 대견하고 고맙지 않느냐고

으째야쓰까 으째야쓰까

큰 일 났다

 

 

 

 

 

 

 

따뜻한 그늘

 

 

 

찬바람 부는 늦가을 저녁

검고 두툼한 롱패딩을 벗어

청계천 노숙자를 덮어주고

서울시청에서 제기동 쪽으로

물 따라 총총 사라지는 푸름이

 

 

 

 

 

 

 

 

 

 

 

 

 

 

 

 

 

 

 

 

 

 

 

 

 

 

 

 

 

 

 

 

 

시골 학교

- 졸업

 

 

 

세 번 매화 피고

세 번 매실 따면

 

세 번 감자 묻고

세 번 감자 캐면

 

세 번 모를 내고

세 번 벼를 베면

 

빈 당산나무는 조용히 바라본다

흰 교문을 벗어나는 햇곡식들을

 

멀리서 오는

새 발걸음을

 

 

 

 

 

 

원초적 순정과 연민으로 기록하는, 생명의 시들

 

정우영(시인)

 

 

1.

 

뿔도 없는 매미가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을

머리로 자꾸 들이받는다

 

나는 창문을 열고

거실로 얼른 달려가

 

형광등을 끈다

 

원전 하나가

날개를 접고

낮달 같은 지구에

혈색이 돌아오는 밤

-<구조> 전문

 

마음새가 이쯤은 되어야 시인이라 할 것이다. 내가 아닌, 너를 살피는 정성. 생명을 위해 기꺼이 나서는 실천. 누군가에게는 하찮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이 모든 게 갸륵함으로 다가온다. 생명에 대한 경외에는 등급이 없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정원이 유리창을 들이받는 매미를 위해 “창문을 열고/ 거실로 얼른 달려가/ 형광등을” 끄는 행위는 범상치 않다. 안타까운 연민을 풀어내는 자의 따뜻한 배려이며 깨어 있는 자의 움직임으로 비친다. 게다가 그는 형광등을 끄는 자신의 행동에서 “원전 하나가 날개를 접고/ 낮달 같은 지구에/ 혈색이 돌아오는 밤”까지 읽어내지 않는가. 생명 존중과 지구 생태는 이렇게 한 몸이다. 매미의 파장이 원전을 끄게 하고 지구를 살리는 것이다. 이럴 때 매미의 날개효과는 얼마나 눈부신가. 그 눈부심을 시로 적을 줄 아는 그이는 또 어떤가.  

이렇게 생각하다가 슬그머니, 이 시를 시집 맨 앞에 내건 이유가 궁금해졌다. 김정원은 왜 이 시 <구조>로 시집의 처음을 열었을까. 그의 시집 전체를 살펴보면 이 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생태시의 면모가 그리 두드러지지도 않는데. 나는 앞에 적은 그의 마음새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그는 실천적인 생태운동가는 아니지만, 생태적 태도와 자세로 세상을 받아 안으려는 시인 아닐까 싶은 것이다.

김정원의 이번 시집을 조망해보면 대략 세 인격이 나타난다. 첫 번째 인격은 교사이다. 아이들을 따사롭게 감싸안고 가르치고자 하는 양심적인 선생님이다. 다음에는 소시민이다. 어느 고요한 소읍에서 이 시대를 앓고 있으며 주로 혼자 삭이는 편이다. 세 번째 인격은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중년이다. 가난과 고달픔을 넘어온 자의 애타는 눈빛이 그에게는 고여 있다.

주요한 캐릭터인 이 셋의 심상들 밖에서 서성이는 그림자들도 비치긴 하나, 그 세는 흐릿하다. 대체로 그의 작품은 이들 선생님과 소시민과 중년의 시선을 따라 얽히고 풀린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캐릭터가 아니다. 그가 교사의 눈을 뜨든, 소시민의 눈을 뜨든, 혹은 그리움의 눈을 뜨든 간에 그의 시 밑바탕에는 시 <구조>에서 보이는 생명과 생태 존중의 사유가 심연을 이루고 있다.

이렇듯 생명과 생태 존중의 마음새가 그에게 갖춰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조금 곤혹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가르치는 이들이 적어가는 기록들에서 흔히 보이는 ‘계몽의 소리’가 이 시집에서도 심심찮게 출몰하는 까닭이다. 그런 면으로 볼 때 시적 본성에 그가, 생명과 생태 존중을 뿌리내리고 있음은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덕분에 나는 한결 가벼이 눈과 귀를 열어 김정원의 시들과 유대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2.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집을 통독하고 나면 앙금처럼 고이는 작품들이 있기 마련이다. 김정원의 시집에서 젤 먼저 날 감아오는 시는 <시골 학교-졸업>이다. 명료함 너머에서 풍겨 나오는 그윽함이 오래도록 잔향으로 남는다.  

 

 

세 번 매화 피고

세 번 매실 따면

 

세 번 감자 묻고

세 번 감자 캐면

 

세 번 모를 내고

세 번 벼를 베면

 

빈 당산나무는 조용히 바라본다

흰 교문을 벗어나는 햇곡식들을

 

멀리서 오는

새 발걸음을

-<시골 학교-졸업> 전문

 

세상 이치를 배우는 게 이쯤은 되어야 참다운 교육 아닐 것인가. 책이나 선대의 지식만으로는 한 아이가 제대로 자라기 쉽지 않다. 무릇 자연의 순환이 그 아이와 함께 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이같은 관점에서 매화와 감자, 벼의 오묘한 탄생과 결실은 실감나는 훈육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자연 법칙의 위대한 깨달음이야말로 그 어떤 가르침보다 우선할 것이라 여긴다. 더욱이 나고 자람과 맺힘에는 성공도 있지만 좌절과 실패 또한 그 못지않다. 그러니 자연의 이 경이로운 경작은 얼마나 뛰어난 교육장인가.

이 모든 우여곡절을 견디고 나서야 매화는 매실이 되고 감자는 감자가 되며 벼는 쌀이 된다. 아마도 아이는 이 과정을 온전히 견딘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살다보면 숱한 역경과 난관들 닥쳐올 것이나 그것들 견뎌 나가는 방책들 또한 적잖음을. 이렇게 생각할 때 학교는 지식의 전당이 아니라 이 우여곡절을 함께 나누며 체험하는 현장이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고 싶다면 학교는 마땅히 순환하는 자연을 그 텍스트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는 바로 이 점을 상기시킨다. 그런 까닭에 짧은 단편 같지만 결코 얄팍하지는 않다. 그 흔한 계몽도 흘리지 않는다. 다만, “빈 당산나무”처럼 “조용히 바라”볼 뿐이다. 가만히 떠올려보라. 저 넉넉함이 키워가는 사람들의 크기가 얼마만한지. 저 “흰 교문을 벗어나는 햇곡식들”은 이미 하나의 인격체로 튼실하게 성장하지 않았을까.

, 그리고 이 지점이다. <시골 학교-졸업>에서 이 부분을 놓치면 곤란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정원이 졸업생들을 “흰 교문을 벗어나는 햇곡식들”로 묘사하는 시행. 탁월하지 않은가.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헐어버린 이 발상으로 이 시는 아연 깊어진다. 흔히 무생명으로 여기는 식물들에게 사람 못지않은 생명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이렇게 동등한 자격을 갖춤으로써 아이들은 스스로 알찬 곡식이 되며, 귀한 곡식이 된 아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은 뿌듯해진다. “흰 교문을 벗어나는 햇곡식들”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이 시는 겹과 겹이 울리는 감동의 하모니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시골학교-졸업>이 단순 명료한 비유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면, <마음에 새긴 비문>은 보다 늘어진 진술로 읽는 이의 눈길을 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나는 담양에서 광주로 유학을 가서 양림동에서 자취를 했다. 단풍이 비단개구리 떼울음으로 병풍산을 내려오던 어느 토요일 오후. 집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동틀 무렵부터 해질녘까지 식구끼리 조선낫으로 벼를 벴다.

 길고 고단한 일요일 저녁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가야 했던 무거운 발걸음. 우리 마을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신작로가 나왔다. 가난한 삶처럼 울퉁불퉁하고 먼지 풀풀 날리는 그 신작로 가에 허름한 원두막 같은 버스 승강장이 있었다. 나는 일주일치 양식인, 자루에 든 쌀 두 되를 어깨에 메고 막차를 타러 논길을 진땀나게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어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달려오고 계셨다. 숨을 헐떡이며 다가오신 어머니는, 붉은 라면봉지에 싸서 노끈으로 묶은, 아직도 따뜻한 무언가를, 두근두근 기다리는 나에게 건네주셨다. 그리고서는 아즘찮은* 몸짓으로 막차를 놓치겠다며 어서 가라고 재촉하셨다. 둥근달이 뾰족한 꼭대기를 품은 소나무 아래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초등학생처럼 작아진 어머니는 아직도 그곳에 서서 막내아들 뒤통수를 짠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감나무가 많은 시목마을 열녀비각을 지나 논길이 굽은, 어머니가 보이지 않은 언덕배기에서, 그 라면봉지를 펼쳐보았다.

 구운 갈치 두 토막! 느닷없이 비린내의 날카로운 가시가 왜 그렇게 서럽고 시큰하게 내 눈과 코를 깊이 찌르던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눈앞이 흐려 하늘만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탔다. 고단함이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꽉 찼다. 묵은 파김치가 된 운전사와 차장과 나, 세 사람이 버스를 전세 낸 듯, 실내는 썰렁하고 침침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유령 같은 미루나무 우듬지에 빈 까치집이 차츰 작아지면서 고향이 멀어져갔다.

 글을 배우지 못한 어머니는, 한 자도 남겨줄 수 없어서, 소박한 생활과 얼로 비문을 새겨놓고 세상을 떠나셨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그 비문은 비바람에 조금도 풍화되지 않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있다.

 또렷이,

 

 ‘비릿한 삶을 구워 구수한 향기를 내라.

-<마음에 새긴 비문> 전문

 

이 시의 ‘아즘찮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아놓았다. “아즘찮은 : 마음이 놓이지 않고 걱정스러운, 아쉽고 서운한”. ‘아즘찮다’는 ‘안심찮다’의 뜻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쓰인다. 집 떠나는 아이를 배웅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맞춤인 말이다.

나는 이 시에서 보이는 ‘아즘찮은 어머니의 마음’에 주목한다. 그게 무엇이냐고? ‘라면 봉지에 싸인 구운 갈치 두 토막’이다. 나는 이 ‘갈치 두 토막’이 집 떠나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순정이자 연민이라 여긴다. 시적으로 말하면 본성이다. ‘라면 봉지에 싸인 구운 갈치 두 토막’은, 오로지 그의 어머니만이 표출할 수 있는 시적 본성의 매개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요즘 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독자적인 어머니를 그리고 있는 모체의 시라고 할 수도 있다.

 

한편 그는, 이 갈치 두 초막에서 평생의 시적 슬로건을 얻는데, ‘비릿한 삶을 구워 구수한 향기를 내라.’라는 시행이 그것이다. 이심전심일까. 어머니의 뜻을 그가 잘 새겨들은 것일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모자의 관계로 비추어 볼 때 둘다일 것으로 짐작한다. 김정원은 이후, 우리 삶의 비린내나는 우여골절들을 녹여내어 희망으로 싹틔우는 시쓰기를 그의 좌표로 삼았음에 틀림없다. 이 시집은 그 좌표의 한 결실이며 그가 세상에 구워주는 갈 치 한 토막일 것이다.

이처럼 그와 그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대책 없는 순정과 연민을 교감하고 있다. 나는 이를 ‘원초적 순정과 연민’이라 이름 붙이고 싶은데, 이는 최근 발표되는 시들에서는 거의 만나볼 수 없는 덕목이다. 이미 단절된 순정이요, 연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 시에서일 뿐일까. 현대인들의 심성에는 사람 된 자가 가져야 할 본성으로서의 ‘원초적 순정과 연민’ 같은 게 사라지고 없다. 현대사회가 이토록 삭막해진 이유도 인간의 이러한 본성들이 물질과 탐욕에 시들어져버린 탓 아닐까 싶다.  

한데 다행스럽게도 김정원은 이와 같은 원초적 순정과 연민을 새긴 마음의 비문들을 곳곳에 세워두고 있다. 그 주요 매개자가 바로 앞에 적은 세 캐릭터들-선생님과 소시민과 중년-이다. 이들이 그가 새긴 시의 비문들을 시집이라는 텃밭에 심고 키워 열심히 가꾸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시는 봄에 익고 또 어떤 시는 겨울에도 익는데, 원초적인 순정과 연민의 계절에서는 봄여름갈겨울이 자연의 이치대로만 순환하지 않는다. 맘의 결에서 피어나는 숨의 움직임에 따라 계절이 바뀌는 까닭이다.

그래서 <대바구니 행상>처럼 겨울 이미지를 품고 있는 작품도, 마치 봄내와도 같은 온기 뿜어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검정고무신 신고서 폭설에 덮인

동구 밖 한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서산에 해 지고 소리 없이 기어오는

검은 장막이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눈앞에서 모든 물상을 집어삼킬 때까지

 

곡두새벽 장성역에서 조치원역으로

비둘기호 타고 떠난 어머니는

열흘째 돌아올 줄 몰랐다

 

대숲이 품에 안은 아담한 초가 처마에서

맑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고드름은 어젯밤보다 목이 길어졌고

 

차갑고 어린 내 가슴은

슬픔이 물구나무서서 자라는 고드름이었다

-<대바구니 행상> 전문

 

<마음에 새긴 비문>이 어머니의 순정과 연민이라면, 이 시는 아들의 그것을 담고 있다. 정황상으로는 겨울인데 아들의 그리움에 전염되어 그런지 차갑지가 않다. 시 속 아이는 “차갑고 어린 내 가슴”을 부여잡고 “물구나무서서 자라는 고드름” 같은 슬픔에 떨지만, 그 슬픔이 안온하게 스며드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내가 아이가 아니라 중년의 시선으로 이 시를 바라보기에 가능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이렇게 전도된 시정을 품게 된 것일까. 화자인 소년을 바라보는 중년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소년의 감성 너머에서 겹치고 섞이는 까닭이다. 소년이되 소년만이 아닌 그가 중년의 그림자를 깔고 있는 것이다.

소년과 중년이 이처럼 한 몸이므로 배면에 깔아놓은 그의 감정들은 진솔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서산에 해 지고 소리 없이 기어오는/ 검은 장막이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눈앞에서 모든 물상을 집어삼킬 때까지” 그와 같이 떨며 어머니를 기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감대의 폭이 이와 같이 넓게 펼쳐져 있으므로 누구라도 자신의 기억을 타고 들어가 소년과 일체가 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시의 보편성을 김정원은 이렇게 획득한다. 게다가 애타는 모성의 시 아닌가. 웬만한 인간들은 그가 펼치는 이 원초적 순정에 들끓을 수밖에는 없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누군가는 격정적으로 들끓고 누군가는 가만히 들끓는 것 정도 아닐까.  

 

 

3.

 

나는 시에서 계몽과 교훈을 지우려 애쓰는 편이지만, 김정원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교사라는 그의 삶이 그를, 끊임없이 계몽과 교훈들로 추동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라. 교사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학생과 학교로 엮이는 신분이고 계몽과 교훈을 체질화해야 하는 직분 아닌가. 스스로도 그렇고 아이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계몽과 교훈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생활 반경이 이와 같으므로 교사에게 가장 리얼한 시들은 교육현장의 수많은 현재들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작품들일 것이다. 오늘 여기, 내가 몸담고 있는 교육 현실을 온전히 기록하고 성찰하며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찌 그를 양식 있는 시인이며 교사라고 할 것인가. 흔히 생명의 문학과 생태문학을 자연으로만 연결 짓곤 하는데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생명과 생태문학은 바른 가르침을 통한 인간과 자연 그 본성의 깨우침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나는 김정원의 교육 창작시들을 뜻 깊게 바라본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다르게 쓸 것인가’이다. 반드시 수많은 교육 창작시와 다른 변별점을 스스로 적어내어야 한다. 기존의 시적 사유와 다르지 않은 작품을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교단생활의 특성상 계몽과 교훈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독자적인 모색이 없다면 그 작품의 의미는 반감된다.

이를테면 시 <따돌림><학급담임>, <장악> 등의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 시들에서는 따돌림이나 인간소외, 청소년기의 충동적 일탈, 계급 갈등과 인권 문제 등 교육 현장의 폭발성 강한 문제의식과 충돌들이 다소간 스케치 형태로 그려진다. 더욱이 시 <장악>에서는 시인이 화자로서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계몽적인 고백을 풀어내고 있는데 이래서는 곤란하다. 읽는 이가 스스로 심금의 현을 켤 수 있도록 좀더 정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을 소재로 한 김정원의 작품 중에서 날 설레게 한 작품은 <찍기>이다. ‘찍기’라고 하는 제목조차 직감을 자극한다.  

 

수진이 수학시험 답안지는

 

술에 만취했다

반 번호 이름을 겨우 쓰고

이분 거리도 안 되는 내리막길을

, , 점…

수성사인펜을 짚고

비틀거리며 걷다가 도중에

토끼처럼 잠이 들었다

-<찍기> 전문

 

설명이나 해석을 덧댈 필요조차 없이 이 작품은 재미지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수진이들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정황은 안타깝고 안쓰럽지만 시험장의 전반적인 모습을 떠올리면 코믹하기도 하다. 시험에 열중하는 자와 잠자는 자의 대비가 배면에 깔려서 시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켜 준다. 거기에 “수진이 수학시험 답안지는/ 술에 만취했다”고 씀으로써 의인화된 소극 풍경까지 겹쳐 보인다. 서술 자체는 간략하나, 형식적 플롯은 탄탄하고 내용적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우리시대 교육 현장의 한 축도를, 수진이 수학시험 보는 장면을 통해 가져와 통쾌하게 풍자한다. 이런 게 제대로 된 교육 창작시가 아닐까. 화자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보다 훨씬 교감의 폭이 깊고 확장성은 넓어진다.

앞으로도 김정원 시의 한 축은, 교육 현장에서 나올 것이다. 그가 이를 피해가려 해도 시가 앞장서서 그를 이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라 여긴다. 그러니 김정원은 한층 더 교단에서 섬세해야 하며 시선은 더 깊고 넓게 교육 현실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그가 앞으로 창작해야 할 삶의 시들이,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교단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교육과 그와 시가 한 몸인 바람직한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태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교육 창작시에만 몸 기울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교육 창작은 의식의 발로일 수 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삶의 양상이 아니다. 이럴 때마다 그는 일상으로 내려와야 한다. 일상이라는 무의식적 행동들이 그의 곤두선 의식들을 무뎌지게 만들어줄 것이다. 나는 일상의 이 무뎌짐들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소중한 시공간이라 믿는다. 사람으로서의 나와 너의 기록들, 그 자잘한 세목들에서 우러나오는 동시대성이 다 여기에 깃들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정원의 이번 시집에는 이같은 소소한 일상들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그의 주요 캐릭터 중 하나인 소시민의 비중이 교사나 중년보다 흐릿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실화> 같은 에피소드들에 보다 더 시의 촉 넓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시의 문을 열고자 할 때 가장 알맞은 열쇠는 관심의 동감이다.

 

큰 일 났다

점심때 아내가 집에 없어

혼자 컵라면을 끓여먹으려고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아무 생각 없이 가스 불에 올렸다

베란다에 컵라면을 가지러 간 사이

커피포트 플라스틱이 홀라당 타버렸다

잽싸게 가스 밸브를 잠그고

 

질식할 듯 매캐한 냄새와 검은 연기를

부채로 몰아 부엌 밖으로 쫓아냈다

가슴이 벌렁거려서 쫄딱 굶고

실수로 불을 냈지만

아내에게 혼날 일만 남았다

으째야쓰까 으째야쓰까

증거를 죄다 없애기 위해

얼른 버리고 새 것으로 사다 놓을까

아니면, 말끔히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하고

대문에서 두 손 들고 기다리다가

생뚱맞게 사랑한다고 말할까

아니면, 손을 꼭 잡고

내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더라도

나를 버리지 않을 거지, 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자아내

자초지종을 말할까

아니면, 짓궂은 유언장을 남기고

며칠 집을 나갈까

외려 뻔뻔하게 큰소리치며 대들까

집을 고스란히 태우지 않은 일만도

얼마나 대견하고 고맙지 않느냐고

으째야쓰까 으째야쓰까

큰 일 났다

-<실화> 전문

 

이와 비슷한 경험 가진 사람들 적지 않을 것이다. ‘가스불에 커피포트를 올려놓아 태운 사건’은 조금 심각한 경우이지만, 어쨌거나 내 경험의 축을 자극하므로 읽다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난다.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가 비록 진술의 형태를 띈다고 하더라도 독자들 감성을 집적시키는 데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수’라는 포인트가 아주 중요한 시적 모티브이자 감성의 매개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의 디테일이 시를 견인하는 방식이다. 디테일이 의식을 통과하여 무의식의 어느 한켠에서 공감의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다.

<실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인 자신의 사소한 실수인 ‘실화’가 현대인의 심층심리를 흥미롭게 반영하고 있다. 가정에서의 남녀의 역관계가 실감나게 펼쳐지는가 하면, 위축된 남성상도 보이고 그들 사이의 다감한 정분도 언뜻 드러난다.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현재가 생생하다. 중장년의 남성이라면 무릎을 치며 동감하지 않을까. 실수로 불을 냈지만/ 아내에게 혼날 일만 남았다”며 “으째야쓰까 으째야쓰까” 절절 매는 시 속 화자를 보면서 자신의 들킨 속내에 실소를 터뜨릴 것 같다. 그가 일상을 좀더 넓게 펴서 이처럼 조화로운 시의 맘 도도록이 얹혀 놓길 기대한다.  

 

 

 

 

4.

 

최근 나는 삶이 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덧붙여, 무의식과의 스파크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중이다. 삶이 우리시대, 나의 일상이라면 무의식은 나와 인류의 공통적 일상이자 그 저변의 광대한 심연이다. 그러므로 이제 시는, 나의 삶이되 나와 우리를 포용하는 무의식의 섬광에 가닿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일상의 시화는, 다음의 시 <따뜻한 그늘>처럼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찬바람 부는 늦가을 저녁

검고 두툼한 롱패딩을 벗어

청계천 노숙자를 덮어주고

서울시청에서 제기동 쪽으로

물 따라 총총 사라지는 푸름이

-<따뜻한 그늘> 전문

 

시 속의 “푸름이”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가 사람인지, 자선단체인지 혹은 상상 속 어떤 기운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떤 지원의 손길이 잦아들어가는 생명인 “청계천 노숙자”에게 가 닿았다는 사실이다. 개념의 정리도 없이 시가 “푸름이”의 행위만을 보여주고 마치는 까닭에 이 시는 내게 여러 가지 상념을 끌어들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불쑥, 그 지점에서 어떤 상념 하나가 내 무의식의 한켠을 땅 때린다. 그것은 부끄러움이다. 추위에 떠는 그 수많은 노숙자에게 이제껏 나는 기꺼이 옷 벗어 덮어줄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던 것이다. 허술하게 드러난 내 생명관의 일단이 제 스스로 멋쩍었다.    

김정원의 시 <구조>로 이 글을 열었는데 그 작품에서 그가 대상화한 생명은 매미였다. 그런데 <따뜻한 그늘>에서 그가 마음 기울이는 건 “노숙자”라는 사람이다. 이로써 그의 시가 지향하는 방향이 더 뚜렷해진다. 그는 전방위적으로 이 땅위의 생명들에게 숨결 보태고 있는 것이다. 그가 교육에 관해 쓰든, 일상을 그리든, 혹은 모성을 떠올리든 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이 소중한 가치를 좀더 자기만의 발성으로 오래도록 외쳐주길 바란다. 생명과 생태 존중의 사유들을 드러내는 시인들은 적지 않지만 제대로 적어가는 시인은 드물다. 그러니 시인이여, 비린내나는 풍찬노숙을 견디고 생명과 생태의 시 널리 길게 퍼뜨리시라.

 

 

 

 

 

김정원 시인 약력

 

전남 담양 출생. 2006년 『애지』로 등단. 시집,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핀다』, 『줄탁』, 『거룩한 바보』, 『환대』, 『국수는 내가 살게』, 『마음에 새긴 비문』 등. 2016년 『어린이문학』으로 동시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빛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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