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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삶의 율동을 교직하는 시 김상률 / 오봉옥(시인)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4/13 [10:34] | 조회수 : 254

 

  © 시인뉴스 포엠



자연과 삶의 율동을 교직하는 시

                                                     오봉옥(시인)

 

 

 

  1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시단은 생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환경오염을 주목한 시들, 생태학적 상상력에 의해 쓰인 시들, 문명의 길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탐색한 시들이 넘쳐났다. 그런데 대다수의 경우 그건 목적의식의 결과일 뿐 자연스런 발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런 발산은 생래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몫이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김상률은 생래적으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굳이 생태를 앞세우지 않는다. 그저 삶 속에 생태가 녹아있을 뿐이다. 김상률의 생태에 대한 지식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동식물을 이야기하다 모르는 게 등장할 때 우린 자연스럽게 김상률을 바라보곤 했다. 그때면 그는 오래된 친구를 말하듯이 빙긋이 웃으며 그 이름과 특성을 꺼내기 시작한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김상률처럼 자연친화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적지 않다. 50세가 넘은 사람들 대다수는 농촌 출신이고, 도시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그 시대적 배경이 농경사회의 분위기였음을 감안한다면 생태가 낯선 것일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김상률처럼 일상과 자연이 일체화되어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를 살펴보도록 하자.

 

 

  2

  김상률 시의 무대는 환경 파괴와 생태학적 위기를 드러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찾아가는 공간이 아니다. 그가 그려낸 무대는 늘 일상이다.

 

 

  방아깨비가 내 등산복 바짓가랑이에 붙어 산을 오른다 암컷이 수컷을 태운 채 살을 섞으며 함께 간다 거센 바람이 바짓가랑이를 펄렁거리는데도 둘이 꼬옥 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사람들이 야호야호, 소리를 지르는데도 도무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잔디 잎만 베어 먹다가 나눈 구석진 사랑이기에 깊이깊이 빠진 것인가 보다 나는 기꺼이 사랑의 씨알받이가 된다 정상에 올라 방아깨비 한 쌍을 등산복에서 떼어 가만히 놓아준다 둘이서 온 산을 뛰어다니며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내년 여름엔 그 새끼들도 데불고 하나 둘 하나 둘, 소풍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방아깨비 사랑> 전문

 

 

 

  김상률이 잔잔하게 담아내고 있는 이 장소는 주말이면 찾게 되는 산이다. 이 장소는 결코 우리의 몸으로부터 분리된 추상의 공간이거나 우리의 감정이 불러낸 무정형의 공간이 아니다. 이 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방아깨비’ 역시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화자인 ‘나’와 일치된 대상, 그래서 이 시의 뼈대가 되는 대상이다. 화자는 등산 와 일치된 대상, 그래서 이 시의 뼈대가 되는 대상이다. 화자는 등산복 바짓가랑이에 붙어 살을 섞고 있는 방아깨비 한 쌍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방아깨비 한 쌍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데도 도무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직 사랑에 눈이 팔려 화자와 더불어 산을 오르고 있을 뿐이다. 화자는 여기서 그들의 곤궁한 삶을 떠올린다. 방아깨비가 살아온 곳은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들판이나 산이 아니라 어느 도시 한 구석의 ‘잔디’였다는 사실. 그곳에서 “잔디 잎만 베어 먹다가 나눈 구석진 사랑”이었다는 사실. 그 연민의 시선은 역으로 자연을 벗어나 문명의 한 복판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을 환기시킨다. 그러기에 화자는 산의 정상에 올라 “방아깨비 한 쌍을 등산복에서 떼어” 가만히 놓아주게 된다. 그와 더불어 상상력을 발동시켜 “내년 여름엔 그 새끼들도 데불고 하나 둘 하나 둘, 소풍을 떠나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러한 소박한 바람 역시 자연을 벗어나 도심 한 복판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화자의 삶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일 터이다. 이와 같이 김상률은 ‘생태’를 의식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레 끄집어내 그 속에서 깊은 이치를 발견하곤 한다. 다음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폭염 한 섬 짊어지고 수로 공사장을 간다

강물은 수장룡 등에 실려가 버렸나

물 한 방울 흔적도 없다

수도배관 수평을 잡고 물길을 열면

좔좔 물 달리는 소리

잠든 여우를 깨운다

굴삭기와 불도저는 서로 눈짓을 하며

사막의 모래를 물어 뜯는다

야행을 해체당한 여우가 기어 나온다

꽁꽁 감춰두었던 꼬리를

노출시키고야만 전갈도

전갈새끼도 줄줄히 기어나온다

여우는 그 틈에도 두 귀를 쫑긋 세워

전갈꼬리를 물기위해 이리저리 움직인다

전갈은 한사코 모래 틈으로 고개를 처박는다

여우는 한사코 꼬리를 물어 전갈을 꺼낸다

난 말없이 굴삭기 시동을 끈다

             -<산다는 것> 전문

 

 

 

  그는 한때 중동에서 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는 사막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삶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막의 존재들은 뜨거운 햇볕을 피해 모래 속으로 숨어든다. 모래를 뒤집어보면 수많은 생명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잠든 여우하며 전갈 등이 그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사막까지를 도시로 탈바꿈시키고자 한다. 카지노의 대

도시 라스베가스가 그러하고 사막에 세워진 기적의 도시 두바이가 그러하다. 이 시의 화자 역시 사막을 개발하기 위해 머나 먼 타국 땅에서 일하고 있는 존재로서 수로 공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굴삭기와 불도저로 모래를 파헤치다보면 수많은 생명체들과 마주하게 된다. 문제는 자신들을 노출시킨 그 사막의 존재들이 인간들에 의해 파헤쳐지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먹이활동을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에 의해 “야행을 해체당한 여우”가 그 틈에도 “두 귀를 쫑긋 세워 전갈꼬리를 물기위해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사실, 그때 전갈은 또 살기 위해 “한사코 모래 틈으로 고개를 처박는다”는 사실이다. 화자는 여기서 또 삶의 깊은 이치를 발견한다. 산다는 건 저렇게 처절하고 엄숙하다는 것. 아니 엄숙해야만하기에 화자는 “말없이 굴삭기 시동”을 끄게 된다. 이 시의 등장인물인 화자와 여우와 전갈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제목에서 상기시켜 주는 바와 같이 살고 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 머나 먼 타국의 사막에까지 가서 일하는 화자나 자신의 거처가 드러난 위기 상황 속에서도 먹고 살기위해 전갈꼬리를 낚아채려는 여우나 그리고 또 살기 위해 한사코 모래 틈으로 고개를 처박으려하는 전갈은 다를 바가 없다.

  김상률의 생명체에 대한 연민은 동식물을 가리지 않는다. 다음 시를 보자.

 

 

  어디서 날아왔을까 씨앗 하나 손톱달 뜰 때 저수지 앞 개간지에 싹을 앉힌다 구덩이가 수상하다 꿈틀꿈틀, 저 구덩이 누군가 고개 내밀고 있다 저수지 가장자리 꼬마물떼새 구덩이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 꽁무니를 위아래로 흔들어 댄다 두더지가 땅을 뒤진다 들쥐의 수염 안테나에 땅굴의 파장이 잡힌다 아버지는 구덩이 빙 둘러 흙을 파헤치더니 퇴비 한 소쿠리 던져주신다 퇴비 속이 꼼지락거린다 수박 줄기도 따라 푸슷푸슷 고개를 쳐든다 여름이다

                                               -<수상한 여름> 전문

 

 

  이 시에서 주목하는 생명체는 ‘싹’이다. 그 ‘싹’은 아버지의 정성과 뭇 짐승들의 관심 속에서 생명력을 키워간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이 되면 그 ‘싹’은 수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식탁에 오를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싹’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들의 면면이다. 꽁무니를 위아래로 흔들어대고 있는 ‘꼬마물떼새’의 행위, 수염 안테나에 땅굴의 파장이 잡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들쥐’의 행위, 마찬가지로 땅 속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땅을 뒤지고 있는 ‘두더지’의 행위, 그리고 그 ‘싹’ 위에 퇴비 한 소쿠리를 뿌려주시는 ‘아버지’의 행위, 이 모든 행위들은 그 ‘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관계 맺고, 공생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관계망 속에서 수박의 싹은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결국 열매를 맺게 된다. 재밌는 점은 그 여름의 전조를 화자가 땅 속 ‘수박 줄기’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이 시 역시 인간과 식물 사이의 섭식관계나 동식물 간의 공생관계를 의식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레 끄집어냈을 뿐.

 

 

 

  3

  김상률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미덕은 리듬이다. 위에서 언급한 <방아깨비 사랑>이나 <수상한 여름> 같은 산문시 역시 운문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리드미컬하게 읽혀지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말 흐름의 특징을 잘 살렸기 때문이다. 3~5음절을 반복시키면서 때로는 당기고 때로는 또 풀리게 하여 그 유려함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알싸한 밤꽃 향기를

꾀꼬리가 울어 나르는데

홀딱새도 홀딱 벗고

홀딱홀딱 뛰는데 마는데

간드러지게 울던 뻐꾹새

뻐꾹!

한마디 하고

!

울음 그치는데

산골짜기 메아리도

따라 숨죽이는데

풍년초 머리채 잡고

김매던 우리 엄니도

뻐꾸기 노래에 장단 맞춰

허기를 달랬는데

면양말 팔러 간 아버지는

발뒤꿈치 드러나게 떠돌다가

양말 가방 던져놓고

술동이에 빠지셨나

홀딱새 따라가셨나

 

꾀꼬리야 꾀꼬리야

 

너도 홀딱 벗고 울어나 보렴

홀딱 호올딱

        -<홀딱새> 전문

 

이 시는 각운 ‘~ㄴ데’의 반복이 노랫말 같은 느낌을 안겨주고 있다. ~ㄴ데’는 어떤 일을 설명하거나 묻거나 시키거나 제안하기 위하여 그 대상과 상관되는 상황을 미리 말할 때에 쓰는 연결 어미이다. 설명하기 위해 이 ‘~ㄴ데’의 어미를 쓰는 경우 부정적 내용이 뒤따르기 쉽다.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 이 ‘~ㄴ데’는 노랫말 같은 리듬감을 안겨주면서도 그 어떤 부정적 내용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긴장감을 형성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 ‘~ㄴ데’를 뒤따르는 것은 면양말 팔러 간 아버지의 걱정이다. ‘홀딱새’가 홀딱 벗고 노닐 듯이 ‘면양말 팔러 간 아버지’가 술에 취해 ‘홀딱새(술집의 아낙을 상징하는 듯한)’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이 ‘~ㄴ데’의 각운이 안겨주는 주술적 효과이다. 부정적 내용이 뒤따를 것임을 예감한 독자는 이 각운 ‘~ㄴ데’가 반복되면 될수록 고양된 화자의 정서를 느낄 수밖에 없어서 저절로 긴장감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시의 재미는 리듬감과 함께 쓰인 ‘홀딱새’라는 말놀이에 있다. ‘홀딱새’ 또는 ‘홀딱벗고새’는 검은등뻐꾸기(Indian Cuckoo)의 별명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홀딱새’를 술집 아낙을 떠올리게 하는 관능적 비유로 사용해 흥미를 유발한다. 리드미컬하면서도 시인의 정신 지향을 잘 보여주는 시는 <맛있는 정년퇴직>이다.

 

 

마당 옆에 발 디딜 만큼

조붓한 길을 내야지

 

마당 한 켠에 삐비 심어

콩중이 불러와 춤추게 해야지

 

논일 밭일 하러 오가는 사람들에게

키 큰 접시꽃 심어 인사시켜야지

 

천장에 유리창문 달아놓고

이층 다락방에 누워 한숨 자야지

 

소쿠리 바지게 잘 짜는 명대 아저씨 불러서

싸리발 대발 엮어 주라 해야지

 

흙벽을 타고 오른 물외 따다가

 

막된장에 푹 찍어서 먹어야지

           -<맛있는 정년퇴직> 전문

 

이 시 역시 종결어미 ‘~지’의 반복이 각운의 효과를 내고 있다. ~지’는 ‘~ㄴ데’와 달리 어떤 사실을 긍정적으로 서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로써 글쓴이의 바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인공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화자로서 자연회귀의 바람을 나타내는 이 시는 지극히 평화로운 농촌의 풍경을 퇴직 이후의 삶으로 그려낸다. 화자가 꿈꾸는 풍경은 별게 아니다. 그저 소박한 수준에서의 자연친화적인 삶을 바랄 뿐이다. 마당이 있고, ‘마당 한 켠에 삐비를 심어 콩중이’를 오게 하고, ‘논일 밭일 하러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키 큰 접시꽃’을 심어놓고 ‘이층 다락방에 누워 한숨’ 늘어지게 자는 꿈. 옆집 아저씨를 불러 ‘싸리발 대발 엮어 주라’하고, ‘흙벽을 타고 오른 물외를 따다가 막된장’에 찍어먹는 소박한 꿈. 화자는 지금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사는 그런 소박한 꿈을 꾸며 인공적인 세상에서의 삶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미덕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제목이 안겨주는 재미이다. 다소 무거운 ‘정년퇴직’이라는 말에 의외의 말이라 할 수 있는 ‘맛있다’라는 형용사를 덧붙임으로써 그 무거움을 상쇄하고, 거기에 긍정적으로 서술할 때 쓰는 종결어미 ‘~지’의 반복으로 화자의 바람을 노랫말처럼 가볍게 전달하고 있는 점이 이 시의 장점이다.

 

화평선

 

갯벌은 갯지렁이 써레질 하는 몸짓으로 가득하다

갯벌 속에서 혀로 농을 치던 청둥오리

갯지렁이 등지고 황급히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쓰레기차가 갯벌에 육중한 체중을 내려놓는다

불도저 빳빳한 발자국이 그 패잔병 머리를 다시 누른다

거기에서도 코스모스 씨앗들은 촉수를 내린다

채로 걸러놓은 듯 고슬한 흙살이 코스모스의

여린 뿌리를 받쳐준다

 

쓰레기장이 된 뻘밭 일백만평 화평선을 이룬다

꽃대궁이 따로 없다

허허,

꽃벌판이 따로 없다

난 쓰레기 매립지가 된 갯벌도 잠시 잊고

꽃멀미를 일으키며 팡팡 사진을 찍어댄다

 

 

모과꽃

 

수박밭 일구어 사이사이에 감나무 심었어요

감나무밭 경계에 모과나무도 심었어요

아버지는 수박 순 뻗어 가는 바른길 잡아주시다가

일벌들이 마음 놓고 드나들게

촘촘히 핀 감꽃도 똑똑 따 주시다가

저 세상으로 훌쩍 건너가셨어요

 

다리 밑에 수박을 키우던 감나무는

주인을 떠나보내고 시름시름 앓더니

감꽃 피우는 법도 잊어버렸나 봐요

들과 산은 온통 꽃바람 천국이네요

거름 한 줌 없는 흙 속에 뿌리 묻고서도 쑥쑥 자라나

주인 떠난 밭두렁 절벽에서 빨간 볼 내밀어요

못자리 마친 논두렁 너머로

연분홍 꽃잎 방울방울 나부끼네요

모난 돌배꽃도 놀다 가고

감꽃도 어우러져 노랑 꽃술 불 밝히다가

스을쩍 자리를 뜨기도 하네요

 

 김상률의 시집 <콩중이 콩콩, 팥중이 팥팥>은 생태시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생태시를 지향하는 시들이 목적의식이 앞선 나머지 인위적인 경우가 많았다면 그의 생태시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읽혀지는 장점이 있다. 그는 자신과 일체화된 자연 속에서 삶의 이치를 깨닫고, 그 깨달음을 자신만의 호흡으로 자연스레 들려준다. 늦깎이 시인인 김상률은 이 시집 한 권으로 자신의 잠재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증명해냈다. 앞으로 그가 환경 파괴라는 시대적 아픔의 뿌리에까지 가 닿는 시들을 많이 생산해 우리 생태시의 지평을 더욱 더 넓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건투를 빈다.

 

 

 

 

 

*약력

김상률

2015년 계간 “문학의 오늘로” 작품 활동

시집: 콩중이 콩콩, 팥중이 팥팥

합동시집: 천개의 귀, 꽃의 박동, 참 좋은 시간이 있음

시산맥 특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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