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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공(客工) 외9편 / 한영미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4/27 [10:20] | 조회수 : 539

 

  © 시인뉴스 포엠



1.객공(客工)

 

 

 

재봉틀소리가창신동골목을누비고있었다

 

담장이막다른대문을맞춰다리면

원단묶음실은오토바이가주름을잡았다

스팀다리미수증기속으로

희망도샘플이되던겨울

 

어린객공은노루발을구르다손끝에

핏방울을틔우곤했다짧은비명이

짓무른패턴에스미면,

엉킨실은부풀어오른손가락감고

밤하늘의별자리를이었다

이제슬픔도완제품이다

 

붕대처럼동여맨구름

 

자수(刺繡)하늘은그녀의눈물을진열한쇼핑센터가아닐까

화려하게화려하게

너무나눈이부셔서

 

쪽가위처럼날카로운바람에

이따금실밥처럼잘려나가는유성을보았다

 

 

 

<2020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2.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라면으로 첫 끼니를 때운다

 

바닥엔 파지처럼 굴러다니는 쓰다만 이력서들

 

열정 하나로 통했던 시대는 갔다

 

모래 수렁을 떠도는 비문의 유령들,

 

오늘은 이 회사에서 내일은 저 회사에서

 

같은 얼굴을 만나고도 기억하지 못한다

 

모래 바람은 깊은 수렁을 덮기도 하고 만들어내기도 한다

 

빠져나오려는 안간힘은 처음 몇 번의 좌절이면 족했다

 

움직일수록 흘러내리는 모래의 깊이는

 

늪처럼 빠져들고, 바닥처럼 측량되지 않는다

 

입구가 사라지는가 하면 출구가 봉합되기도 한다

 

수렁이 무덤이 되는 것은 한순간,

 

어제도 국화 한 송이를 놓고 왔다

 

가수와 진수가 구별되지 않는 교묘함에도

 

구덩이를 채운 숫자는 갈수록 넘쳐난다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 쌓여가는 빈 소주병이

 

발굴된 유물의 전부가 될 것이다

 

전화 한 통이면 빠져나올 수 있는 꿈이면 좋겠다

 

남은 국물에 식은 밥 한 덩이 말아 시어 빠진 김치 쪼가리로

 

후르륵 위장을 채운다

 

내비게이션 토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낯선 얼굴들이 모래 수렁에서 길을 찾고 있다

 

 

 

 

<2019년 시산맥 봄호 / 울산 광역 메일 신문 7.24>

 

 

 

 

 

 

3. 말을 훔친 소녀

 

 

 

모래바람이 말발굽 소리를 일으키는 밤

새카맣게 그을린 작은 몸이 말 위에서

사정없이 들렸다 내려앉았지

고삐를 틀어쥔 통증과 앙다문 입술

그 사이로 탄성처럼 새어 나오는 숨

 

온 힘을 다해 채찍을 휘둘렀어

말 잔등의 근육이 차츰 악기처럼 조율되다가

속도 조절이 가능해졌을 때에야 소리를 내질렀지,

마침내 훔친 말이 나의 몸이 되었노라고

 

부족의 사내가 뒤를 쫓기 시작했어

끝없이 펼쳐진 벌판

더는 숨을 곳이 없었지 아,

몸이 없었다면,

구멍이 없었다면!

 

상처란 어디서든 솟아날 수 있는 거라고

위에서 아래로 익힌 몸의 언어는 당연했어

너무나 당연해서 눈앞의 눈물마저 이해하지 못했지

 

다시 온 힘을 다해 채찍을 휘둘렀어

근육이 잘 훈련된 말은 지칠 줄 모르고 내달려줬지

지루한 반복보다, 대륙의 바람보다

매서웠던 것은 완벽히 길들여져

스스로를 접게 만드는 것

 

바람이 양옆으로 찢어질 듯 거칠게 흐느껴

살갗에 반항이 느껴질 때마다 발끝을

더욱 세웠지 당연을 앞세운 요구는

도망갈 출구가 없었어 풀들이 쓰러지는 것은

바람 탓이 아니라고 그는 언제나 묵묵했지

달릴 거야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면

 

 

사방이 길이란 것을

가장 가파르게 올라선 길 밖에서야 보았어

방향을 타고 내달리는 말에겐

더 이상 채찍 따윈 필요 없다는 것을

사나운 바람 속을 헤집으며

우리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지

 

< 2019년 시산맥 겨울호 >

  

 

  

4. 비둔한 겨울

 

 

 

임대아파트 통유리 밖으로 빗살이 내리꽂히고 있다

나는 불현듯 수평선이 보고 싶어졌다

바다 너머 대양을 넘어 다시 바다와 해변을

 

구불구불한 위트포드 비포장 고개를 넘고 넘어서야 이르는

마래타이 비치,

긴 나무다리가 바다 위로 뻗어 있는 곳

 

눈을 뜨면 또다시 낯선 이방인이지만

현지인들에겐 대형 코카콜라가 새겨진 편의점에서 온종일

피쉬앤칩을 기름에 튀겨가며 땡큐를 연발하는

키 작은 동양인 여자로 통한다

 

전조등을 켰다, 보닛 위를 여전히 짓누르는 허연 창살!

푹푹 빠져드는 질퍽한 언덕에서 마주한 살덩이들이

어둠 속에서 달려든다 날쌘 짐승처럼,

그러나 이내 바퀴에 감겨 축축한 충격음을 쏟아낸다

 

순간 무수히 널려 있던 죽은 새들이

도로에서 콸콸 흘러내린다 비둔하게 살찐 몸,

비릿한 피 냄새, 그 사이로 아직 펄떡거리는 심장,

끈질기게 따라붙는 검붉은 환영들

 

외진 고개에선 달리는 길 외엔 길이 없다

표정을 감춘 바퀴, 핸들을 쥔 떨리는 손

 

먹이를 구할 필요조차 없는 새들은

공포조차 비만하다, 온갖 무료한 절박만이 널려 있다

 

위트포드가 끝나야 마래타이 비치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자 그대로 물큰,

바닥에 짓뭉개지는 울음!

 

 
 
 
 

5. 목관(木棺)

 

 

 

 

 

끝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지

 

책장을 넘기듯 무심코 지나가는 하루하루

 

난 나의 변화무쌍한 책을 읽느라

 

어느 날 갑자기 너의 책이

 

찢길 수도, 찢겨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치 못했어

 

오늘 아르카디아에 살고 있다면

 

내일도 당연히 붉은 태양 아래 짙푸른 땅 밟으며

 

황금 같은 시계 종소리에 맞춰 눈을 뜨리라고 생각했어

 

날마다 안부를 묻는 건강한 목소리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도

 

인사도 생략한 채 보냈을까

 

꽃상여에 묻혀 떠나는 너 보지도 못하고

 

오래도록 빈 하늘 바라보며 바다만 그렸어

 

어디든 하나로 이어져 있으리라고

 

 

이제는 나란 책을 펼치면 매 페이지에

 

부록처럼 달라붙어 있는 목관과

 

짧은 한 줄의 글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니콜라스 푸생의 그림 작품에 쓰인 글 차용

 

 

 

<2019년 시산맥 봄호>

 

 

 

 

 

 

6. 불편한 침묵

 

 

마녀사냥이 필요해요

 

전염병이 돌아도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이어져도

 

 

제물을 찾아내야 들썩이는 세상 평온해져요

 

양들은 속출하지만 늑대들은 기억하지 못해요

 

기억하지 않아야 속이 편해요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눈치 채지 않는 것이 불문율,

 

그들은 무리 속 어디에나 있어요

 

횃불 높이 세우고 한 마리 양을 찾고 있어요

 

 

양의 탈을 같이 쓰고 있다가도

 

늑대로 갈아타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늑대의 탈을 쓰고 있다가도

 

양으로 지목되는 일도 어렵지 않아요

 

최면을 걸듯 마녀라 믿어요

 

제거해야 모두가 살 수 있어요

 

오늘도 매스컴이 소란스러워요

 

우르르 휩쓸리는 소리가

 

저물녘 빈 사과밭 어슬렁대는

 

바람 소리보다 더 스산하게 와닿아요

 

 

세상엔 모두가 늑대, 모두가 양

 

양 한 마리 제물로 사라지면

 

누군가 양이 되겠지요.

 

기꺼이

 

<2019년 시인광장 5월 신작시>

 
 
 
 

7. 숨통

 

 

단단한 벽에 구멍 하나 새겨졌다

빠져나간 못 하나가 만들어낸

작은 틈,

조금의 여유 없던 공간으로

바람, 햇살, 빗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날아든 여린 풀씨에선 이제껏 가져보지 못했던

고향집 토담의 무너진 흙 내음이 번졌다

단단함만이 삶의 지탱이라고 생각해왔던

시간의 축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습기는 순식간에

벽의 견고함을 뒤흔들었다

이른 새벽이면 풀꽃에 어리는 이슬

눈물도 작은 구멍이 만들어낸 균열이다

구멍이 아니면,

관계를 잇는 입맞춤이나

송곳처럼 뚫고 들어왔다 빠져나간

못에 대한 기억은 없었을 것이다

모래탑 쌓듯 건조한 나날들,

풀싹처럼 하늘 올려다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8. 달팽이 한 마리 기어간다

 

 

 

사시 폐지로 입사했다는 그는

오랜 습관을 떼지 못해 새벽 6시면 출근한다

함께 공부하던 이가

고층 건물에서 자살소동을 벌이던 날도

촉수를 곤두세운 채

혼밥을 먹고, 혼술을 마시고,

이고 있던 혼집 속에서 잠을 잤다

늘 점액질 위를 기듯

소리도 없이 오고가는 그는

잊어지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한다

간혹 긴 침묵을 깨기 위해 입을 열어도

두서없는 말들의 향연일 뿐,

세상에 익숙치 않은

그만의 보석 같은 언어는

세상의 언어만 좇는 동료들에게

소통불가 판정을 받거나 값없이 버려진다

이미 그에게 둘레 밥상은

정 나눔이 아닌 곤욕의 자리다

갈수록 짙어지는 패각(貝殼)의 무늬

 

달팽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기어 나온다

비 다녀간 끝

화단엔 달팽이 천지다

 

 

 

 

 

 

  

9. 안녕, 시빌라*  

 

 

말들이 날아다니네

 

영원보다 중요한 것은 젊고 건강한 육신이나

 

후략의 말로 천형을 사네

 

스크린 도어가 열리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유령들

 

몸을 얻지 못한 말들이 날아가

 

여린 꽃 옆에 쪼그리고 앉아 빈손 내미네

 

허공에 눈물 뿌리네

 

알 수 없는 꽃들은 돌아볼 사이 없이 툭툭 지고

 

몸 빌려볼까

 

그들 곁을 오래 어른거리네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들

 

끝내 아프거나 아픈 척하거나

 

아픈 것들은 파고들기 전에 소리도 없이

 

허물어지거나 닫히고,

 

상처 준 것들은 오히려 피해자 행세로

 

오래도록 살아남지

 

갈 곳을 잃었네

 

수천 년 바람에 실려 시공을 헤맸어도

 

사막처럼 내려앉을 곳 없이 황량해

 

몸을 얻지 못한 말들로 육신을 얻고자

 

오늘도 아픈 것들을 찾아 헤매네

 

 

 

죽여줘! 죽여줘!

 

바람에 실려 다니는 말들이

 

허공에 떠 있네

 

 

* Sibylla - 신화 속 무녀

 

< 2019 시현실 여름호 >

 

 

 

 

10. 천일홍 습작

 

 

 

뿌려놓고 아득히 잊었다

베란다 구석의 화분이 몇 계절을 ​내려놓았다

잎사귀만 무성할 뿐

 

처음 메모에 휘갈긴 글자들이

저 스스로 뿌리를 내고 가지를 밀어올리는 동안

나는 그저 방관자처럼 바라만 보았다

 

꽃이 피기로 마음먹은 뒤론

겨울도 단지 첨삭일 뿐

송이를 툭 터트린 이 상징

 

시들지 않는다 행간을 무시로 이어가는

펜 끝처럼 붉다

 

이미 몇 차례 꽃잎 진 자리가

서둘지 말라는 듯

흙내음 꾹꾹 눌러가며 말을 번져냈다

 

이젠 유리창 너머엔 보랏빛 시어가 만발하다

천 일 동안 피고 지는,

그곳에서 근사한 수사가 되고 싶어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도록

 

창 하나 사이에 두고 서서

나도 가 되어보는 것이다

 
 
 
 
 

약력

 

한영미 / 서울 출생 / 2019년 『시산맥 등단』 / 2020년〈 영주 일보 〉신춘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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