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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사랑 외9편 / 박노식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5/04 [14:57] | 조회수 : 405

 

  © 시인뉴스 포엠



 

고요한 사랑

 

 

  그늘이 들고 흰 꽃들은 더 밝아졌다

 

  초록의 잎과 빛나는 열매도 그늘이 배어야 성스러운 것

 

  내게 다가온 붉고 푸르고 노란 인연들이 여기까지 흘러왔을 때

  시린 별과 앓는 파도와 산정의 그림자가 함께 울었다

 

  한때 불같은 사랑도 그늘진 눈으로 보면 처연한 것

 

  꽃잎 한 장 들춰보면 거기, 고요한 사랑 하나 숨어 있다

 

 

 

 

  

  이른 봄, 강둑을 걷다가

 

 

  봄 강둑,

  텅 빈 길을 걷다보면

  아련하다 이,

  왔던 길은 굽었고

  갈 길은 휘었다

  어느 날 떠돌이 검정개가 달려와

  내 쓸쓸한 엉덩이를 물어뜯는 꿈처럼 황당하다 이,

  강가에 물오리 한 쌍은 어디서 날아왔나

  갈대 서걱이는 내 가슴을

  너의 물갈퀴로 할퀴지는 말고

  너의 뭉툭한 부리로 조곤조곤 조곤조곤조곤 조곤, 조곤  

  한 번 달래 주소

 

 

 

 

 

  가슴이 먼저 울어버릴 때

 

 

  눈 그친 후의 햇살은 마른 나뭇가지를 분질러 놓는다

 

  때로 눈부심은 상처를 남긴다

 

  산새는 그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거나 종종거린다

 

  시린 몸이 터져 절로 노래가 될 때까지 겨울나무는 견딘다

 

  그가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은 가슴이 먼저 울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로운 눈은 달빛보다 환하지

 

 

  어둔 방, 까칠한 수염이 더 자라서 양 볼이 야위었다

 

  한 사람을 추억하는 버릇과 그날의 눈자위와 어제 남긴 눈물도 부질없는 밤이다

 

  문득 가슴께가 가려운 것은 누군가 나를 두드리는 것인데 열 수가 없다

 

  고요가 숨어 있는 천장 귀퉁이를 오래 바라보는 눈은 달빛보다 환해서 외롭다

 

 

 

 

 

 

 

  뼈아픈  노래는 그늘을 만든다

 

 

  내 안의 나이테를 접시 물에 비추어 보는 날이 올 때

 

  나는 어느 한적한 호숫가에 앉아 물방개가 일으키는 파문을 볼 것이다

 

  온힘으로 나아간들 한 치의 동심원 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

  바람이 등을 떠밀어도 언제나 흐린 그물에 갇혀 떠돌고 있을 뿐,

 

  뼈아픈 나의 노래는 그늘을 만든다

 

  불현듯 마른 떡갈나무잎이 수면 위로 날아올 때

  그 위에 누워 무심한 하늘가로 난 미끄러져 갈 것이다

 

 

 

 

 

 

  팔려가는 동백나무

 

 

  늦은 출근 버스에 앉아 밖을 봅니다  

 

  가로수는 은자隱者의 눈빛처럼 색이 없습니다

 

  급정거한 버스 앞창엔 손수레에 실려 가는 어린 동백나무가 부르르 떨며 모로 누운 가지마다 쌓인 눈이 앓습니다

 

  인부는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가슴에 또 한 금이 그어집니다  

 

  오늘 밤은 악몽이 찾아와 나를 괴롭힐 것이므로 눈이 녹아 흐르는 창틀에 팔을 괸 채 눈을 껌벅입니다

 

  나도 마냥 실리어 가는 것인데,

 

  실은 저 어린 동백나무가 오늘의 우리처럼 팔려가는 중입니다

 

 

 

 

 

 

   재회

 

 

  한 남자는 첫사랑의 재회를 마치고 시린 암자에 들었고 한 여자는 첫사랑의 재회를 마치고 독한 골초가 되었다

 

 

 

 

 

 

   상실

 

 

  흰 꽃이 모두 져서 뜰이 어둡다

 

  꽃이 떠나는 건 하늘이 가까이 내려왔기 때문이지만 가시를 손에 쥔 아이처럼 발가락이 곱는다

 

  바람을 못 견딘 꽃들은 나를 어둔 방에 가둔다

 

 

 

 

 

 

  열이레 달

 

 

  열이레 달은 엉겁결에 마음을 빼앗기고 온 비구니처럼 조금은 당황스럽고 조금은 서운한 듯한 얼굴입니다. 그 얼굴은 나를 회한에 잠기게 하므로 굽은 길을 걸어가면서 힐끗 보아야만 본성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사람이 지구 어느 한편에 앉아서 불러대는 옛 노래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을 가라앉게 만드는 저 틀어진 거울은 금간 접시 안에 새겨진 앙금을 닮았습니다.

 

 

 

 

 

 

 굴절

 

 

  빛과 소리가 가닿은 곳에는 굴절이 있다

 

  굴절은 울림 같고 울림은 굴절 같고

 

  그대 몸에 가닿은 소리와 그대 마음에 가닿은 빛도 굴절이 없으면 울림이 없는 것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서릿발을 밟는 순간처럼 서툴다면 그대는 이미 굴절 속에 든 것

 

  굴절은 슬프지 않고 아프지 않고 두렵지 않고

 

  아름다운 이여!

  길에서 만난 굴절은 그대의 울림이고 그대의 사랑이다

 

 

 

 

 

 박 노 식

 

 -광주출생

 -2015년 《유심》신인상

 -시집 『고개 숙인 모든 것』『시인은 외톨이처럼』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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