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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그림(竹圖)외9편 / 이인평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5/07 [11:27] | 조회수 : 245

 

  © 시인뉴스 포엠



대 그림(竹圖)

 

이인평

 

 

 

 

음력 시월의 정적이었습니다

새소리가 고요를 부드럽게 감아 내는 오후였습니다

대나무 그림자가 창호지에 어릴 때

과연 그것은 묵죽이었습니다

 

새가 앉았다 날아가며 일으키는 댓가지의 푸른 바람이

방 안으로 흩어졌습니다

햇빛에 휜 대 마디들이

가난한 선비의 뼈를 곧추세우고

삶의 허물을 대 바람으로 쓸어 내고 있었습니다

댓잎 그림자를 따라 오르내리는 숨결을 가다듬으며

푸르게 가고 오는 대를 보았습니다

 

한 폭 묵죽이 저렇게 살아서 청청한데

이제 먹을 갈아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흠도 티도 없는 가난이 저리도 맑은데

무엇을 더 바라서 마음에다 붓을 대겠습니까

 

햇살 배인 창호지에서

묵죽이 저 홀로 춤을 추며 한세상을 흘렀습니다

먹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창천의 푸른 기운을 쏟아 부은 묵죽이

눈빛 맑은 선비의 손을 잡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겨울 신화

 

이인평

 

 

 

폭설에, 세상이 덮이고 있었습니다

자다 깨어보니 세상이 하얗게 지워졌습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고, 넓은 들판 사이로

아득한 꿈속처럼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영혼의 먼 기억 속에서 본 듯한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태고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을 뿐,

강을 건너가는 자도 건너오는 자도 없었습니다

여명의 고요에 휩싸여 있을 뿐,

삶도 죽음도 지금은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발자국 하나 없이 지워진 저 길을

누군가 걸어갈 것도 같은데…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저 강을

어느 누가 건너갈 것도 같은데…

 

세상이 하얗게 덮인 새벽은

깨끗한 가난만을 아득히 펼쳐 두고

아직 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반지

 

이인평

 

 

 

당신이 축복한

약속의 땅입니다

 

빛을 출렁이게 하려고

당신은 바다를 만들었지요

 

가장 아름다운 이 보석을

영원히 빛나게 하려고

대륙의 산맥으로 물려 두었지요

 

당신의 반지에는

바다가 박혀 있습니다

 

 

 

 

 

 

     

  

망각의 상자

 

이인평

 

 

 

재활용 알루미늄 캔을 압축한 사각의 상자들이

대형 트럭에 실려 가고 있네요

입술에 닿았던 혀짤배기소리 같은 즐거운 기억들이

아직 캔에 물려 있지만요

몸 깊은 곳으로 흘러 들어간 숱한 기억들은

어디로 흩어져 갔을까요? 아무도 모르게

우리의 삶도 차곡차곡 압축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법의 상자처럼 압축이 끝나면

세상의 망각으로부터 새롭게 재생되는 것은 아닐까요?

오래된 벙어리수수께끼처럼

잘 열리지 않는 망각의 상자로 압축되어

우리는 지금 어디로 실려 가는 중일까요? 가는 중에

빛에 안겨 서로의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들,

도시의 거대한 상자들로

웃음과 울음을 서서히 압축해 내는 첨단의 세상에서

세월의 트럭에 실려 통째로 옮겨지는 중에도

우리들은 지금 추억을 만들고 있네요

사랑을 간절히 꿈꾸며 손을 잡아 주고 있네요

고통의 빚을 나누어 쓰는 동안 슬픔을 독촉하지 않는 우리들

찌그러지지 않을 행복을 모으고 있네요

몸 안으로 시원하게 흘러 들어가는 음료 같은

기쁨을 나누고 있네요. 빈 깡통처럼

세월에 차이지 않고, 우리들 서로를 잊지 않았네요

대형 트럭에 우리들이 망각했던 것들을 압축한 상자가 가볍게

실려 가고 있네요. 지친 사람들을 불러 억지로 웃겼던

지루하고 딱딱한 유행들도 아주 멀리 실려 가고 있네요

우리의 모든 것은 망각의 상자처럼

아주 멀리, 영영 사라지고 마는 걸까요?  

우리들 아직 희망을 잃지 않고 삼월의 햇살을 걸치고 있네요

겨울의 망각을 열고, 지금은 나무처럼 잎을 틔우고 있네요

 

 

 

 

 

 

 

뒤로 걷기

 

이인평

 

 

 

아는 길도 뒤로 걸으면

새로운 길이 됩니다. 아직 걸어보지 않은

미지의 길이 됩니다

 

사람들이 걸어간 세상의 길도

내가 아직 뒤로 걸어보지 않은

새로운 길입니다

 

앞으로만 걷기에 바쁜 세상의 길

자신을 앞세우고 물러설 줄 몰랐던 길도

내가 아직 겸손하게 뒤로 걸어보지 않은

새로운 길입니다

 

사람들이 이미 걸어갔던 길

지금도 수많은 발걸음이 옮겨 가고 있는 길도

내가 뒤에서 조용히 기다려보지 않은

새로운 길입니다

 

바른 길을 믿지 않고는 뒤로 걸을 수 없고

뒤로 걸어보지 않고는

자신만을 내세운 이기심을 밟아볼 수 없습니다

 

앞으로 가던 길도 뒤로 걸어 보면

나를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겸손이 보입니다

앞으로만 달려가다 지쳤던 길도

조용히 뒤로 걸어 보면 새로운 행복이 보입니다

 

 

 

 

 

 

 

눈 내리는 시인의 나라

 

이인평

 

 

 

아름다운 시인들을 만났습니다

세상은 고통 중이었습니다

주여, 시대는 늘 가난의 고삐를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짊어지고 시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시인들의 마음으로 눈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시인들은 거리를 바라보며

지상에 서 있는 자신들의 언어를 통하여

사랑을 느낄지도 모를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오후의 찬바람을 안고 시인들이 길을 걸을 때

시의 옷자락 같은 눈송이들이 가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눈 내리는 시인의 나라에서

주여, 겨울보다 맑은 시인들의 발걸음을 함께 따라 걷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시인들의 가슴에서 눈처럼 녹아내리는 꿈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시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듯

눈구름 사이로 노을을 이끌고 가는 해가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시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주여, 아픔이 흘러도 시인들의 영혼은 따뜻했습니다

당신의 언어가 시의 혈관을 흐르듯, 어느새

시인들의 자유는 깨어 있는 당신의 봄을 걷고 있었습니다

고통의 노래가 꽃잎처럼 안겨 오는

아름다운 봄의 나라를 쓰고 있었습니다

 

 

 

 

 

 관계

 

이인평

 

 

                                                               

새벽은 몇 사람의

부지런한 농부에게 발견된다

그것도 우연히

새로운 것은 항상 순수할 뿐

대화하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었을 뿐

기뻐 놀라거나 반색하지 않는다

 

새벽을 만나고 온 농부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새벽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단풍

 

이인평

 

 

 

마지막 가는 길이

저토록 화려하단 말인가!

 

빛을 머금고

사랑이 타오르네

 

그러나 이별은

연습할 시간조차 없네

 

한 생애를 떠나는 모습이

저리도 뜨겁단 말인가!

 

온몸으로 불길이 번지고 있을 뿐

사랑은 두려움도 없네

 

 

 

 

 

 

천사의 꿈

이인평

 

 

 

  오월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천사가 있었던 곳은 영원한 아름다움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 그 황홀한 빛 가운데 자리 잡은 궁궐이었네. 천사는 눈부신 빛을 두르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네.

 

  신비한 빛 가운데 계신 하느님께서 천사에게 말했네. “애야, 너는 이 저울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거라” 하시며 천사에게 매우 간단한 저울 하나를 건네주고 나서 다시 말했네. “무엇을 다는 저울인지 알겠느냐?… 너는 그 저울로 세상 사람들 마음을 달아 보거라. 그 저울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과 미움의 무게를 네게 알려 줄 것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천사를 보며, 하느님께서 또 말했네. “네가 직접 달아 보면 알겠지만, 그 저울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사랑과 미움의 무게에 따라 바늘이 좌우로 기울게 될 것이다. 사랑이 담긴 사람의 마음은 오른쪽으로, 미움이 담겨 있는 사람은 바늘이 왼쪽으로 기울 것이다. , 이제 너는 세상으로 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달아 보거라. 마음의 무게가 미움으로 기울어진 자들은 지옥으로 보내고, 좌우로 전혀 기울지 않는 자들은 연옥으로, 그리고 마음이 사랑으로 차오른 이들은 천국으로 데려오도록 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다 들은 천사는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린 다음 빛나는 날개를 저어 지상으로 내려갔네.

 

  지상은 아직 밤이었고 별빛들은 천사의 날개처럼 반짝이고 있었네. 천사는 고통에 지쳐 잠든 사람들을 바라보았네. 사람들은 사랑과 미움의 갈등 속에서 살고 있었네. 천사는 하느님께서 주신 저울을 가슴에 안고 가만히 사람들을 살펴보았네. 어떤 자들은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마구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온 마음을 쏟아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기도 하였네. 풀잎보다 먼저 시드는 명예에 눈먼 자들도 있었고, 고집스런 짐승처럼 탐욕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자들도 있었네. 그러나 세상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네. 그들은 모든 일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이루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고난을 기쁘게 인내하고 있었네. 그들은 또 은총과 깨달음의 경지, 즉 하느님의 뜻을 따름과 동시에 항상 모든 걸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과 언제나 자신의 모든 걸 거리낌 없이 내주는 사랑으로 행복을 누리고 있었네. 어디에서 사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네.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던 천사는 드디어 한 사내의 마음을 저울에 달아보기로 했네. 천사가 처음으로 저울에 달아보려는 사내는 아내와 세 자녀를 거느리고 사는 불혹의 시인이었네. 사내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시인이었지만, 항상 하느님을 공경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었네.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 같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가족과 함께 세상의 길을 힘겹게 걷고 있는 사람이었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천사가 혼잣말을 하였네. “사실 인간의 마음에 담겨 있는 사랑과 미움을 달아본다는 것은 얼마나 진지하고 중대한 일인가! 그러나 인간의 비참을 보는 것은 또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인간의 삶은 때로 흥겹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인간의 여정은 고통 속을 흐르고 있었구나!” 하고 탄식하였네.

 

 

  그런 다음 천사는 그 사내의 마음을 저울에 달기 시작했네. 그 순간이었네, 천사가 그의 마음을 막 저울에 달려고 하는 순간, 천사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네. 천사가 저울에 달려고 했던 그 사내는 바로, 천사의 꿈 밖에서 살고 있었던 자기 자신이었네. 천사가 그 사내의 마음을 저울에 다는 순간, 동시에 천사 자신의 마음이 저울에 달리는 것 아닌가! 천사 역시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잊고 있었네. 자신을 먼저 달아야 하는 꿈속에서 놀란 천사가 “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지상의 어둠 위로 아침 해가 떠올랐네. 맑은 햇살에 영혼이 깨이는 아침이었네. 꿈속의 천사가 떠나간 끝없이 푸른 오월의 길로 장미꽃 향기가 흐르고 있었네.

 

  어느 날… 꿈속에서… 나는 천사였네.      

 

 

 

 

 

 

 

 

고요의 사원

 

이인평                              

 

 

 

나는 고요의 사원에서

시를 쓰네

 

내 시혼이 살아 있기에, 오래 전 언어들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놓았지

 

시가 한 걸음씩 내게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두근거려

 

끝내 내 존재를 들켜 버리고 말 것 같은

긴장에 사로잡히곤 하지

 

나는 시혼을 감추려고 향기를 내뿜지

내 언어들이

때때로 나를 따돌려 갈만 한 거리에서

나는 고개를 돌리지

 

내 시들은 거기에서 살아

사원을 지나는 사람들을 멈추게 하고

나도 그들도 돌아설 수 없을 만큼의 향기를 뿜어

생을 위로하지

 

 

 

 

 

 

 

 

 

 

■ 약력

 

   이인평 시인은 1993년 월간 <조선문학> 신인상과, 2000<평화신문> 신춘문예에 시 「소금의 말」이 당선되었다.

  시집 『길에 쌓이는 시간들』 『가난한 사랑』 『명인별곡』 『후안 디에고의 노래』1, 2집 『소금의 말』과 번역시집 『Yo Soy Juan Diego Coreano』를 간행하였다.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협회 숲문화위원,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한국가톨릭문인회 부이사장, 한국인물전기학회 이사, 한국산림문학회 이사, 공간시낭독회 회장 역임, 녹색문학상 운영위원, 시사랑문화인협의회 감사, 박희진시인기념사업회 이사, 계간 <산림문학>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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