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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짚고 가는 ‘푸자(pooja)’의 언어 / 최애란

바람이 짚고 가는 ‘푸자(pooja)’의 언어 전해수(문학평론가)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5/19 [13:59] | 조회수 : 216

 

▲     ©시인뉴스 포엠

 

바람이 짚고 가는 ‘푸자(pooja)’의 언어

 

전해수(문학평론가)

 

최애란 시인은 ‘허공’에 흩날리는 ‘바람’을 짚어내어 ‘시어(詩語)’로 삼고 있다. 때로는 네팔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마차푸차레’의 꼬리 봉우리 바람으로(「마차푸차레」), 때로는 허공 한 자락을 잡고 있는 ‘종()’의 소리를 찾아서(「종의 배후」), 가끔은 순하디 순한 말들(시어)의 ‘잎사귀’를 부비며(「가을배추」), 어디서부터 타올랐는지(「붓질하다」) 알길 없는, 헛것들의 소리인 ‘바람’을 시어(詩語)로 짚어낸다. 아울러 최애란의 시들은 두르가의 여신이 갠지스강과 아시강을 돌며,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강가’(갠지스강의 힌디어 이름)를 찾아 무심하나 헛헛한 생의 말미(末尾)를 어루만지듯이 종교적인 제의들이 곳곳에 스며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祈禱)’나 ‘의식(儀式)’과 같은 단어들이 넘쳐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의 시에는 신들의 곁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그저 들리고, 그 ‘바람’의 사이로 ‘강가’(갠지스강)의 물결이 흐르는 듯이 나지막한 소리가 머물고 있는데 이 소리들을 짚어내는 최애란의 시적 언어를 나는 ‘푸자(pooja)’의 언어라 칭해 보고 싶은 것이다.

알려진 대로 ‘푸자(pooja)’는 힌두교의 숭배의식을 말한다. ‘공양’을 뜻하며, 일상의 소소한 의식부터 사원의 엄숙한 제례까지를 모두 아우르면서, 죽은 자를 갠지스강에 띄워 보내는 독특한 죽음의식이다. 푸자는 마치 산 자와의 인연을 끊거나 죽은 자를 영원히 마음에 담아두려는 죽음 숭배의식 같은 것이다.

그런데 ‘푸자’는 죽은 자를 갠지스 강물에 띄워 보내는 물의 의식이지만 불의 의식이기도 하여서 주목된다. 더구나 목욕하는 장소(산 자의 경우)와 화장터(죽은 자)가 함께 어울려 있는 곳이기에 ‘푸자’는 죽은 자를 영원히 놓아주는 물의 의식 이전에 불의 신을 부르는 불의 의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점은 ‘푸자(pooja)’에게는 산 자를 위한 삶의 철학이 함께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푸자처럼 산 자와 죽은 자를 한 울타리로 잇는 죽음의식을 통해 드러나는 서남아시아의 오래된 죽음 숭배사상은 시인의 언어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이다. 우선, 시 「푸자」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강가의 신을 만나러

사이클릭샤를 타고 가트로 간다

해는 이미 떨어졌고

신을 부르는 불의 의식이 한창이다

푸자, 산 자를 위한 힌두 의식이라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무심히 흐르고 있는 강가에서

강가가 허락한 강가에서

신을 생각하다 신을 벗었다

홀가분한, 그거면 충분하다

그것, 참 좋다

 

제단 위로 꽃비가 내리고

죽은 자가 스치는 사이

꽃가지, 곱내를 드리우는데

타다 남은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 낸 아버지

 

살아남지 못한 나를 강물에 띄우고 있다

 

-「푸자」 전문

 

인도 여행 중 ‘푸자(pooja)’를 직접 만난 경험은 그에게 매우 특별한 일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분명 ‘푸자’를 목도(目睹)한 것이 틀림없다. 진정성 있는 주체의 시선에서 확신이 든다. 시인은 “강가(갠지스강)의 신을 만나러” “사이클릭샤를 타고 가트로” 가고 있다. 해는 진 지 오래고 “신을 부르는 불의 의식(푸자)이 한창”인 그곳에서 시인이 본 것은 불타는 시신을 바라보는 “무심히 흐르고 있는 강가/ 강가가 허락한 강가”였던 것이다. 강들이 허락한 “강가”(갠지스강)는 살아남지 못한 자들이 살아남은 자들과 작별하는, 신성하나 일상적인 곳이기도 하다. 시인은 “신을 벗”으며 신처럼 옆으로 비껴 앉은 “신을 생각”한다. 신은 신고 있을 때와는 달리 벗으면 비껴있게 되는 것이었던가? 시인이 이내 “홀가분한” 마음을 느끼는 것은 푸자를 통해 ‘해탈(解脫) 그 너머의 시간’으로 조금 더 다가선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푸자(pooja)’를 함께하며 죽은 자가 스쳐가는 물과 불의 ‘사이’ 이른바 “산 자를 위한” 이 “힌두 의식”에서 ‘산 자인 자신’을 인식(認識)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때에 “제단 위로 꽃비가 내리고” “타다 남은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 내”는 죽은 자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어 산 자인 나를 살아남지 못한 자를 받들듯이 강보를 안은 손처럼 두 손을 모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착시에 빠져든다. 시인은 그 절정의 순간, 그것으로 “충분”한, “그것, 참 좋”은, 기묘한 감정의 교차를 느끼게 된 것이다. 시인은 잠시 자신이 “강물에 띄워”진 죽은 자와 동일시되어 “살아남지 못한 나”의 영혼을 마주하며 신성한 푸자(pooja)를 온전히 대면하고 있다. 이처럼 일상과 가까운 푸자의 죽음의식은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사이’가 멀지 않음을 일깨우고 있으며 그 촘촘한 간극의 꽃가지를 흩뿌리며 불()과 물()의 경계에서 무심히 흐르고 있는 “강가”(갠지스강)를 바라보는 시인의 투명한 마음을 이내 알아차리게 된다.  

 

머리를 튼다 꼬리 찾겠다고 지느러미는 손끝 저 너머 강물 닮은 지난날처럼 몇 번이고 물길을 틀다 그제야 받아들인다 늘 꼬리였던 널 맞아들인 뭍길 가까운 널 만나러 왔다고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고 비켜 앉은 여자는 우그러든 플라스틱 통에서 이름 모를 물고길 뜰채로 떠 옮기고 있었다 한 마리가 빈 하늘 쪽으로 부레의 중심을 옮기는 찰나 은빛 출렁이던 지느러미 먼 널 만나러 왔다고

 

 

밤길 따라나선 물고기가 하늘을 날아간다 물병자리 건너 고래자리 넘어 몇 번이고 물길을 틀다 가까운 듯 먼 널 올려다보면 머리 숨긴 마차푸차레 머리와 꼬리는 한 몸이라며 감춰 둔 내 꼬리 흔들어대고 있다

 

-「마차푸차레」 전문

 

「마차푸차레」도 여행지에서 만난 시편이다. 네팔에 있는 물고기 꼬리모양을 한 이 봉우리는 마치 꼬리로 태어나 처음부터 꼬리였던 것처럼 머리가 없는 것도 잊은 채, 어쩌면 “머리와 꼬리는 한 몸”이라는 듯이 신성함을 재연(再演)한다. 시인은 마차푸차레에게 “늘 꼬리였던” “널 만나러 왔다고” 인사부터 나눈다. 봉우리의 “지느러미와 꼬리”를 나눠서 비켜 앉은 후, 시인은 “빈 하늘 쪽으로 부레의 중심을 옮기”고 “뜰채”로 “머리를 숨긴 마차푸차레”의 봉우리를 “물길을 틀”듯 휘휘 “흔들어대고” 있다. 아마도 시인이 만난 것은 한낱 산봉우리가 아니라 “하늘”을 향하고 있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즉 하늘“길”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물길처럼 하늘길에 놓인 마차푸차레에서 “은빛 출렁이던” ‘은빛’의 꼬리를 닮은 “여자”(과거의 시인 자신)의 꼬리지느러미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활짝 핀 더위에

바그다드 카페가 문을 열었다

모하비 사막에서 불어온 바람은

한낮을 흔들고

한낮의 그늘을 흔들고

한밤의 그늘까지 흔들어놓았다

활짝 핀 더위와

정면으로 대치하던 나는

냅다 더위 먹은 문장을 풀어놓는다

놓쳐버린 모래의 문장은

불거진 바람이 짚고 지나가리라

더위에 절인 나를

기웃거리는 바람의 문장

서둘러 걸쇠를 건다

오늘도 빗줄기 한 자락 기다리며

구름 두어 자락 풀어놓았다

 

-「나를 쳐내다」 전문

 

바람을 짚고 가는 푸자(pooja)의 언어는 그렇게 사막처럼 메마르고 거친 “모래의 문장”을 선뜻 걷는다. “모래의 문장”은 “한낮을 흔들고/ 한낮의 그늘을 흔들고/ 한밤의 그늘까지도 흔들어” “모하비 사막”의 “불거진 바람”을 따라 활짝 만개한 “더위”를 대리(代理)하고 있다. “더위에 절인 나를/ 기웃거리는 바람의 문장”이 서둘러 “지나가”고, 시인은 “모하비 사막에서 불어온 바람”을 따라 “빗줄기 한 자락”없는 “모래 문장”의 걸쇠를 “쳐”내어, “더위에 절인” 자신의 문장마저 한량없이 “쳐”내고 “쳐”낸다. 더위를 맞서려 하나 “더위”는 이내 “활짝 핀 더위”로 생동감을 가득 안은 것이어서, 시인의 시어(詩語)는 만개한 열정과 기다림의 시간이 점철되어 드러난다.

 

 

담장이 화상을 입었습니다 불씨 하나 몰래 던져 불시에 번져나간 불길 불똥앉은 골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나는 어디서부터 타올랐는지

 

동쪽으로 든 담장 따라 골목 안쪽을 열어 봅니다 담장이 만든 골목은 꽃무늬 수를 놓고도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물집 터져버린  

 

꽃을 내게 뿌려 보시렵니까 아홉, , 열아홉… 바람이 읽다만 나는 어디서부터 사레들었는지

 

동쪽으로 든 바람 따라 담장에 기댄 꽃을 열어 봅니다 꽃보다 먼저 꽃물 터져버린 끝물의 여자 담장 몰래 열아홉 소녀 옮겨다 놓고는  

 

재가 된 꽃, 붓질하고 있었습니다

 

-「붓질하다」 전문

 

글의 서두에서 소개한 푸자의 불의 의식은 위 시에서 “담장”의 불꽃으로도 연결되고 있다. “담장”은 “끝물의 여자”가 “열아홉의 소녀”와 재회하는 공간이면서도 이별의 의식을 치러야 하는 제식(祭式)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불”(불씨 혹은 불길)은 “담장이 만든 골목”으로 번져가며 붉은 꽃무늬였다가 “진물”로 달아오르고 다시 “물집”으로 터진다. 불꽃 이전의 “꽃”을 기억하며 “동쪽으로 난 담장”을 따라 “골목 안쪽”을 열면 “아홉, , 열아홉” 꽃다운 그러나 “재”가 된 꽃이 “끝물의 여자”를 넘겨보고 있는 것이다. 의식의 전이(轉移)가 “담장”의 불꽃을 경계로 하여 과거 시간을 현재로 번져가게 한다. “재가 된 꽃”이 다시 타오르길 바라는 시인의 “붓질”이 거기에 있다.  

 

허공 한 자락을 잡고 있는

종을 바라다보면

왠지 블랙홀의 기운이 돈다

다른 종이지만

같은 종일 수도 있겠다 싶어

몸을 구부려

종의 내부로 들어가 본다

보이지 않는 소리로 메워진

종의 출구는 늘 열려 있다

 

다물지 못함은 할 말이 있다는 것

빠져나갈 수 없는 블랙홀처럼

동헌 뜰에 납작 엎드린 종

할 말이 남은 듯

죽어서도 종으로 태어나

헛것을 빨아들이는 적요한 울림

 

제 몸 다 비워내라고 몸소 들려주는 말씀이었다

 

-「종의 배후」 전문

 

시집의 표제 시이기도 한 「종의 배후」는 “종의 출구는 늘 열려 있다”는 시인의 아포리즘을 드러내며 종()이 지닌 “헛것을 빨아들이는 적요한 울림”에 귀 기울인다. 이른바 “허공 한 자락을 잡고 있는 종”은 시인의 시선을 통해 “종의 내부로 들어가 보”는 첫발자국을 떼며, 다시 “종의 출구”를 찾아나서는 ‘소리의 길’을 트고 있다. 그러나 이 소리는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하는 “블랙홀의 기운”을 지녔기에 “할 말이 남은 듯” “동헌 뜰에 납작 엎드린 (또 다른) 종”의 “보이지 않는 소리로 메워진” 열린 출구를 찾고자 한다. 허공과 바닥은 분명 다른데, 허공 한 자락을 잡고 있는 종()과 동헌에 납작 엎드린 또 다른 저 종()의 다른 듯 같은 모습은 ‘소리’ 그러니까 “제 몸 다 비워내라”는 무언(無言)의 소리를 지닌 공통점이 있다. 허공과 바닥에 놓인 종의 소리가 다르듯이 “종의 내부”와 “종의 출구” 역시도 이처럼 “종의 소리”로 메워지거나 “종의 소리”로 열리는 행태는 제각각 다르다. 특히 위 시의 “헛것”은 소리 이후의 공허한 묵언(默言)을 담고 있어서 소리의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절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망치(忘置)’나 ‘망치(罔治)’가 아닌 그저 망치(望峙)바닷가의 망치에서 들리는 혹은 들은 소리를 따라 나선 시인의 자세와도 교차된다.      

 

돌을 보면 마음이 먼저 간다 차이며 살아와서일까 망치望峙바닷가에서 내리칠수록 단단해지는 못을 생각하다

 

망치고개, 망치삼거리, 망치맛집, 망치상어, 망치뼈, 뿅망치… ‘이곳은 제한 구역이오니 망치관계자 외 출입을 금합니다’ 줄줄이 엮인 망치관계자 중에서 만만한 망치望峙, 하나씩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걸었다, , 땅… 꽂힐 때마다 돌 맞은 나는

 

보석보다 빛나는 고행의 시간 함께해서일까 빛나지 않아 내게 안긴 돌 같지 않은 돌처럼 부딪칠수록 둥글어지는 생을 생각하다

 

망치望峙, 하나씩 밤바다에 돌려주고는 들입다 뛰었다, 돌 맞은 파도는 게거품을 물며 바짝 뒤따라왔고, 그녀는 뒤통수 맞았다며 참아 낸 울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망치에서 듣다」 전문

 

망치(望峙)바닷가에서 떠올린 수많은 ‘망치’들은 “내리칠수록 단단해지는” 것들의 주변에서 “둥글어지는 생”을 위해 “차이며 살아”온 시간을 위무하고자 한다. 특히 시인에게 망치(望峙)바닷가의 망치는 “망치고개, 망치삼거리, 망치맛집, 망치상어, 망치뼈, 뿅망치”의 흥미로운 지명이거나 우스꽝스러운 물건의 이름으로 다시 희화화(戲畫化)되다가도 “망치관계자 외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푯말에서 우두커니 시선을 멈춘다. 그러나 역시 모든 만만한 것들(?)은 “망치돌”을 맞은 나의 빛나지 않는 생의 이면()처럼 고행으로 떠오르고, 시인은 밤바다에서 들려오는 망치소리에 “파도”소리보다 높은 “울음”소리를 토해낸다. 그것은 “돌 맞은 파도”소리인지 “돌처럼 부딪칠수록” 마음이 먼저 가는 ‘소리’들의 울음인지 모를 거친 소리를 쏟아낸다. 마치 망치에 의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그녀의 (울음)소리는 “마음이 먼저” 다가가려는 “돌”의 망치에 의해 쪼개어지고 부서진다.  

 

어머니 염천 대낮에 나를 낳으셨고

 

나는 사철 한밤중에도 나를 낳았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나를

 

만날 때마다

 

내가 아니라는 믿음 나를

 

펼치기 전에

 

그림자라도 밀어 넣어야겠다

 

-「다시, 시작詩作」전문

 

최애란 시인에게 시는 무엇일까. ‘시작(詩作)’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시인은 결국 근원적인 질문에 부딪힌다. 시인은 “아이도 어른도 아닌 나”를 만나는 “그림자”부터 밀어 넣는 나의 돌출된 “믿음”이 바로 시이며, 내 그림자처럼 이유 불문하고 나를 그저 따르는 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시인의 ‘시작(詩作)’임을 말한다. 사시사철,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시는 내게로 펼쳐지는 “그림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따라붙는 것이다. 마음의 소리를 찾아, 제사장(祭司長)처럼 시원(始原)의 소리를 따라나선,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를 대동한 시인의 시는 언제나 새로운 “다시, 시작(詩作)”을 꿈꾼다. 꿈처럼, 시가 환하게 다가오고, 꿈결처럼, 다시 시가, 스르르 모습을 감추어도 그 소리의 발생지를 찾아 나서는, 대상을 붙들고 집요하게 늘어지는 시인의 시작(詩作), 다른 소리의 출구를 만나 그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같은 종()과 다른 종()의 소리를 모아, 울려 퍼지려는 몸짓임을 극명히 보여준 시인의 첫 시집, 장장한 울림을 만나는 마음이 몹시 반갑고 기쁘다. 아직껏 종소리의 여음에 머물러 있는 듯 시인의 또 다른 시의 몸짓을 기다려 본다

 
 
 
 
 

  *최애란 약력

 

   2006<심상>등단.

   시집<종의 출구는 늘 열려 있다>.

   인터넷문학상 대상 수상.

   대구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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