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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밝은 시인 『술의 미학』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5/25 [09:28] | 조회수 : 309

 

  © 시인뉴스 포엠



 

김밝은 시인 『술의 미학』

             

 

연어 이야기   

                       

 

  살아있는 것들의 몸을 함부로 만지지 못했던 적 있었습니다 아무데나 앉아 징징거리기도 하고 땅따먹기를 하다가 친구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아내버리기도 했었지만요

 

  분홍분홍하며 피어나던 진달래나 붉디붉어진 저녁 해를 껴입고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 멀리 있는 엄마 생각에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토방 밑으로 흰 뱀이 들어가는 걸 본 뒤였을 거예요 작대기 하나를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빨랫줄에 새 한 마리가 날마다 찾아와 울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새끼가 잘못 태어나 아프다며 눈감은 네 애비가 찾아와 깃에 묻혀온 미안한 시간을 털어내는 거라고, 할머니는 바다냄새 찐득한 노랫가락을 굽이굽이 뽑아내곤 하셨지요  

 

  사다리를 몇 개쯤이나 이으면 하늘에 닿을 수 있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바다를 품은 수국이 그늘진 계절만을 데리고 오던 작은 마당도, 할머니의 고단한 옷고름을 풀어주던 육자배기도 다만 아득한 풍경으로 남아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희고 긴 손가락을 꿈꾸었던 나의 화양연화였다니요

 

허공을 만지작거리던 눈으로 붉어진 하늘이 와르르 쏟아져 내립니다

 
 
 

죽음에 관한 최초의 기억  

 

                               

 가난이 밥 냄새만큼 고소한 섬마을 친구였어 가슴이 봉긋한 분홍을 가진 때였을 거야 눈을 감지 않고도 햇빛을 배부르게 먹으며 살았지 우리들의 첫 굴욕은 아카시아 잎을 떼어내는 낭만의 가위바위보 대신 바다 건너 먼 나라의 글자 속으로 짜디짠 시간을 최대한 무겁게 구겨 넣는 일이었어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엄마는 지문이 닳아지도록 바빠서 할머니의 부르튼 목소리가 노을 속에서 붉어질 때까지 유챗대의 단맛 한 움큼, 사금파리 한 조각으로 어린 생을 허비하기도, 가끔 서로의 봉긋한 분홍에 눈길을 주며 키득거리기도 했었는데

 

 햇빛을 너무 많이 탐낸 탓이었는지 어느 날 깊고 어두운 시간을 몸속에 가득 넣은 듯 눈을 닫아버린 너를 보았어 꽃상여도 없는 죽음이 향기처럼 가볍다는 생각, 신은 사람이 되고 사람은 물고기가 되는* 시간이었을까

 

 그때부터였는지 가끔 어지러운 꿈을 꾸곤 해 유난히 많은 분홍이 매달린 살구나무 아래 낯선 얼굴의 네가 자꾸만 나를 바라다보는

 

 내가 기다리는 시간은 붉은 동백꽃 그늘과 금목서의 노란빛깔 자장매의 분홍 그리고 시베리아의 푸른 눈이 숨겨놓은 흰 자작나무인데,

 

 네가 자꾸 지상으로 던지는 것 같은 흰 눈송이들만 바람의 비문 속으로 촘촘하게 박히는 날이야

 

 

* 신은 사람이 되고, 사람은 물고기가 되는 ;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 중에서

 

 

 

 

 

 

술의 미학

 

 

가끔 심장이 시큰둥해지는 날

 

곱게 부순 달빛가루에 달콤한 유혹의 혀를 잘 섞은

목신 판의 술잔을 받는다

 

찰나의 눈빛에 취해 비밀의 말들을 너무 많이 마셨나

 

날을 세운 은빛 시선이 애꿎은 꽃잎만 잘라내고 있다

 

물구나무서던 시간들이

절룩거리는 기억을 붙잡고 일어서고

살 속에 섞인 위험한 말들 잠들지 못해

서로 흔들리고, 깨어지기도 하면

 

옆구리를 내어주며 쨍쨍 부딪치던 건배의 얼굴이

늑골 어딘가에 콕콕 박혀 가쁜 숨을 몰아쉰다

 

끝내 토해내지 못해

상처 난 이름으로 가슴 울렁거리고

 

손가락만 흔들어도

열꽃처럼 번져가는 뜨거운 노래들로

바람 속 영혼들처럼 마음 흩날리는 날*

 

사랑이 사랑으로도 치유되지 않아

벌거벗은 혀들이

 

술잔 속에서 팔딱거리고 있다

 

*인디언 달력에서 1월을 뜻하는 말중  '바람 속 영혼들처럼 눈이 흩날리는 달'에서 따옴

 

 

 

 

 시,

                     

   

                     

다가오지 않는 마음을 부르는 소리로 두꺼워지는 벽

 

이름 없는 입술이 초승달 위에 묵음으로 얹히면

 

핏기 없는 어둠만이 달뜬 뺨을 비비고 가는 방

 

아침마다 정성껏 눈을 씻으며 바라봐도

 

여전히 초라한 일들이 일어나는 내일,

 

 

또 지나간다

 

멋진 글자들로 잘 차려 입은 누군가의 책 속에서는

 

짐작이 가지 않는 말 화려한 수식어들이 불어나기 시작한다

 

돌아가지도 않는 시계를 의무인 듯 차고

 

찐득한 땀에 절여져가는  ‘ㅅ’

 

간절한  l’ 하나 만나지 못해  

 

쓸쓸한 구석 어디쯤에서 쪼그라들어가고 있다

 

 

 

 

안녕하세요, 고갱 씨*

                       

                         

찰나가 낙원이라고

살짝 귀띔만 해주세요

저기 푸른 밀밭 사이로 거침없이 뛰어들어 보게요

 

우울한 몸짓은 잠깐,

이곳에서는 당신이 전설이잖아요

건조해진 눈 속에 무지개를 넣어주면,

 

그늘이 넓은 모자를 쓰고

우아한 향기로 멋을 낸 양산도 들고요

물뱀 한 마리 발가락사이에서 꼼지락거릴지도 몰라요

 

여기서는 시간이 너무 더디게 지나가서

어떻게 살고 있냐고, 자꾸 내가 나에게 물어요

 

꽃대를 꺾으면 내 살에서 핏물이 흐르고

당신을 바라보듯 그려지지 않는 그림을 자꾸만 만져요

 

 

어둠이 어슬렁거리는 시간이 오면

무지개를 품은 물보라로 사라질까요

 

시간은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라고

밀밭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일 때

 

당신은 또 멀리 가야 할 사람**

 

 

* 고갱의 그림 제목

**고흐는 고갱을 “멀리서 온 사람이고, 또 멀리 갈사람”이라고 했다

 

 

 

 

‘분홍’의 흔적과 ‘말’의 비밀

 전해수(문학평론가)

 

1. 사라진 시간과 분홍의 흔적들

 

시 「연어이야기」는 “연어”의 회귀성을 통해 나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에 걸쳐져 있는 삼대의 반복되는 여성적 삶을 다시 회람回覽하고 있다. 이른바 “연어”의 속성은 여성적 삶의 근원을 더듬어보는 쓸쓸한 회감에 젖어들게 할 만하지만, 시인은 특유의 (경쾌한) 동력으로 이를 극복해내고자 한다. 예컨대 “분홍분홍하며 피어나는 진달래”나, “사다리를 몇 개쯤이나 이으면 하늘에 닿을 수 있을까”의 표현처럼 아픈 상처의 기억 속에서도 순수한 동심세계가 그의 시에는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의 “육자배기” 가락과 “날아가는 새들처럼” 멀리 있는 엄마와 “수국의 그늘진 계절”을 통해 드러나는 어린 시절은 가족사의 상흔이 요동치면서도, 시인은 그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의 그리움(이는 ‘미학’으로도 연결되는 아름다운 그리움의 정서로 승화된다)을 재삼 꽃피워 이를 회복하려는 태도를 함께 보여주려 한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들의 몸을 함부로 만지지 못했던” 아스라한 시절에 대한 추억이, 이별과 죽음을 처음 맞닥뜨린 시절에 함부로 내던져진 일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져, 시인은 이를 단순한 슬픔의 정서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연어”의 힘찬 역동성을 떠올리면서 (매우 긍정적인 태도로) 다시 추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의 힘 찬 내성의 목소리는 “분홍분홍하며 피어나던 진달래”의 분홍 빛깔 속으로 혹은 잃어버린 과거 슬픔의 시간을 선명하게 (그 색채를 대비하여) 그려내어 이 시절을 가장 아름다운 시절 그러니까 “나의 화양연화”라 칭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상처를 기억하는 슬픔의 순간이라 해도 (이른바 ‘분홍’빛의) 경쾌한 색채를 놓치지 않으려는 시인의 순정한 시의식이 충분히 반영된 결과로 여겨진다.

 

그렇다. 김밝은 시인의 시는 경쾌한 음성으로, 모든 상처 입은 ‘과거’를 향해, 열려, 있다. 그의 시들은 회상의 시간(과거)과 무관하지 않지만 앞서「연어이야기」에서처럼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생명수를 찾는 ‘회귀성’을 본능적으로 작동케 하면서, 상흔의 과거야말로 현재를 되비춰보는 거울이 되어 시인의 시세계를 분명하게 열어 주는 것이다. 특히 ‘분홍’으로 규정할 수 있는 시간(과거)이 지루하게 흘러간 한낮이거나 어두운 표정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저녁의 노을이 아니라, “손가락 사이에서 싱싱한 물고기들이 튀어 오를 지도 모”른(「동지冬至)다는 희망이 깃든 미래의 전언을 내정한 것이어서 분명 여타 시인들의 과거 시간과는 다른 지점에 들고 있다.  

위 시에서 최초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는 시인의 음성이 슬픔에 가득 차 있지 않고, 오히려 경쾌한 언어 속에 마치 ‘빛’을 구하는 태도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역시 시인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과거시간이 ‘분홍’의 시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챗대의 단맛 한 움큼” 혹은 “사금파리 한 조각” 그리고 “가끔은 서로의 봉긋한 분홍에 눈길을 주며 키득거리던”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한다는 사실이 2연에서 드러난다. 바로 1연에 앞장 세워 기억하는 ‘가난’의 시절과 2연에서 등장하는 ‘죽음’을 목도한 순간에 대한 감정은 4연의 “유난히 많은 분홍이 매달린 살구나무”를 “바라다”본 사실로 이어지면서 (분홍이) 되풀이 제시되는 등 “죽음에 관한 최초의 기억” 속에 내밀하게 살아 숨 쉬는 비밀의 시간을 분홍빛과 연결하여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꽃상여도 없”이 가볍게 사라지던 한 죽음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지켜본 “어린 생”(시인)이 맞닥뜨린 최초의 죽음의 기억을 “바람의 비문 속으로” 아련하게 추억하며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밝은 시인에게는 “눈물도 한 때는 분홍”(「복숭아나무가 있던 풍경」)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 매우 특징적이다. 시인은 ‘죽음’이라는 것도 어쩌면,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환상의 빛』에서 그토록 사랑한 사람이 죽은 이유를 알고 싶어 한 유미코가 상상하는 죽음의 빛깔, 이른바 ‘환상의 빛’으로 아로새겨지는 ‘분홍빛’을 띠며, 우리의 곁에 머물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시인의 표현대로, “죽음에 관한 최초”의 빛깔은 ‘분홍’빛을 띤, 그래 ‘환상의 빛’일지도 모르겠다.

 

2. ‘말’의 비밀 속으로

 

김밝은 시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말”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시의 언어를 넘어서는 내면의 “문장”으로 여겨지는데, 때로 “비문의 흔적”(「겨울 생각 1)으로 새겨지기도 하며, “지문”을 남겨 “데자뷰된 풍경”(「새들은 밤이면 어디로 가는 걸까」)을 눈앞에 펼쳐 보이기도 한다.

 

 

내 몸에서 나오는 말들은 왜 상처뿐이냐고

                                                    -back hug를 꿈꾸다」 부분

오래된 들이 등을 보이며 떠나갑니다/ 풍화되어가는 약속의 전언

                                                   -「자작나무숲에 내리는」 부분

따뜻한  한마디도 내겐 비밀의 기록 같아서

                                                     -「애월涯月을 그리다1」부분

울음을 삼키고 있는 말〔들을 들여다보는/ 너와 나의 어디쯤

                                                                  -「문득2」부분

 

위의 구절 외에도 상당히 많은 시편에서 “말”을 시어로 자주 사용하고 있는 시인은 ‘말’에 대한 인식이 ‘시어’ 이상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이를테면, 시인에게 “말”은 시어라기보다는 ‘이야기’의 구조를 지닌 ‘내력’이며, 사연을 포함한 ‘약속’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시인에게 때로 이 “말”은 “내 몸에서 나오는 말들() 상처”로 표명되고 있고, “오래된 말들”이 떠나가는 이별을 목도하는 것으로도, 혹은 그 날의 “말 한마디”가 비밀의 기록으로 새겨지거나, 너와 나의 어디쯤 “울음을 삼키는 말”이 지금 여기 떠도는 것을 느끼게도 하는데, 이 역시 시인이 즐겨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이른바 ‘내력’으로 ‘약속’으로 ‘비밀’의 전언으로 사용되면서 시인의 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말’은 그러므로 시인에게는 내면에 닿는 언어 그 이상의 ‘문장’의 기능을 하며, 과거의 ‘흔적’이고, ‘데자뷰(Deja vu)’이기에 이미 지나갔으나 여전히 되풀이 되는 시인의 개인적 역사와 순순히 만나고자 한다.

등단시절부터 “말”의 속성과 기능에 관심을 가진 시인은 「술의 미학」(이 시는 김밝은 시인의 등단 시이다)에서 “발가벗은 혀”, “뜨거운 노래” 등과 부딪히는 “비밀의 말”과 “위험한 말”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말”이란 무릇 “술”을 한잔한 연후에는 거침이 없는 법인데, 술을 통한 혹은 “술잔 속”에서 팔딱거리는 말의 향연을 시인은 “바람 속 영혼”들의 “마음() 흩날”린다는 의미를 지닌 ‘인디언의 1월’(1월은 매 해의 첫 달이며, 인디언들은 이를 ‘바람 속 영혼처럼 눈이 흩날리는 달’로 여긴다)을 대신 빌려오면서, 시간을 통한 말의 의미를 상승시키고 있다. 매 해의 첫 달이자 겨울의 한가운데인 1월의 ‘대화()’는 술 잔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찰나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 부딪히고 깨어지는” 순간을 “흩날리”고 있는 것이다.

 

김밝은 시인에게 ‘말’은 그러므로 ‘시’가 되기 이전의 아니 오히려 ‘시’가 될 수 없기도 한,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시가 ‘ㅅ’(자음)과 ‘ㅣ’(모음)로 깨어지고 부딪힐 때 발생하는 그 어떤 흔들리는 마음이라면, 시인은 그 어떤 ‘말’로도 이를 표현할 길이 없을 터이다.「시」는 시인이 시를 짓는 이유 혹은 시를 지향하는 바와 같이, 아니 오히려 시어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지향점을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시’란 단순히 ‘시어’로서가 아닌 ‘말’의 사용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함을 위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보다. “찰나가 낙원”이라 느낄 수 있는 사람 혹은 그러길 바라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 아닌가. “우울한 몸짓”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간”의 “몸”을 기억하려는 사람, “또 멀리 가야 할 사람”은 ‘고흐’도 ‘고갱’도 아니고 ‘고흐’와 ‘고갱’을 시 속에서 다시 심폐소생술로 되살려내는 ‘시인’들 아닌가. 그렇다. 김밝은 시인처럼 상처를 ‘분홍’의 흔적으로 읽어내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기꺼이 ‘말’의 비밀 속으로 들어서는 시인이 있기 때문에 “찰나() 낙원”도 가능한 것 아닌가.

 

 

 

 

 

김밝은 시인 약력

-한국방송대학교 교육과 졸업

-2013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술의 미학』

-3회 시예술아카데미상 수상

-현재 한국문인협회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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