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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여관에 가고 싶다 외1편 / 박완호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6/30 [10:46] | 조회수 : 103

 

  © 시인뉴스 포엠



 

 

들꽃 여관에 가고 싶다

 

                                          박완호

 

 

 

들꽃 여관에 가 묵고 싶다

 

언젠가 너와 함께 들른 적 있는, 바람의 입술을 가진 사내와 붉은 꽃의 혀를 지닌 여자가 말 한마디 없이도 서로의 속을 읽어내던 그 방이 아직 있을지 몰라, 달빛이 문을 두드리는 창가에 앉아 너는 시집의 책장을 넘기리, 삼월의 은행잎 같은 손으로 내 중심을 만지리, 그 곁에서 나는 너의 숨결 위에 달콤하게 바람의 음표를 얹으리, 거기서 두 영혼의 안팎을 넘나드는 언어의 향연을 펼치리, 네가 넘기는 책갈피 사이에서 작고 하얀 나비들이 날아오르면 그들의 날개에 시를 새겨 하늘로 날려 보내리, 아침에 눈 뜨면 그대 보이지 않아도 결코 서럽지 않으리

 

소멸의 하루를 위하여, 천천히 신발의 끈을 매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의 전부를 남겨 두고 떠나온 그 방, 나 오늘 들꽃 여관에 가 다시 그 방에 들고 싶다

 
 
 
 
 
 
 
 

아내의 문신

 

                                          박완호

 

 

 

                     1

 

아내의 몸속엔 내가 지나온 길들이 들어 있다

 

얼마 전부터 아내는

제 속에 감추고 있던 길들을 꺼내

한번 들어가 보라며

내게 입구를 보여준다

 

함께 산 지 십수 년 동안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길들, 어느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낯설지 않은 길들의

벌어진 아가리가 꼬리를 물고 달려든다

 

주춤거리는 내게 아내는

그 위에 발을 얹으라며, 그 길들을 따라가면

내 그리움의 뿌리를 만질 수도 있을 거라며

자꾸 나를 몰아세운다

 

 

                     2

 

 여자는, 몸속에 지나온 날들의 내력을 숨기고 있다 사랑을 나눌 때 그녀의 몸에는 남자가 걸어온 길들이 문신처럼 새겨진다 아내의 몸속, 길들 위에는 기억나지 않는 내 삶의 이력이 적힌 문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 길들을 따라 걸으며 나는 문장들을 주워 읽는다 한 번도 들키지 않았으리라 여겼던 비밀들이 주워 담을 수 없는 고백처럼 수런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걸 본다

 

 그녀는 언제 이 많은 문장들을 써 온 걸까? 아내와 나누었던 그 많은 사랑의 순간들이 결국 내 속의 문장들을 그녀에게 옮겨 적는 작업이었다니, 아무도 몰래, 그녀가 내 은밀한 속을 들여다보는 동안, 내 몸에도 어느새 그녀의 상처가 새겨지고 있었다니

 

박완호∥ 충북 진천 출생.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너무 많은 당신』,『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아내의 문신』,『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내 안의 흔들림』 등.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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