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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매화 외9편 / 조길성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8/10 [09:53] | 조회수 : 195

 

  © 시인뉴스 포엠



물매화

 

조길성

 

 

 

녹은 쇠에서 나온 것인데

그 녹이 쇠를 먹어 치운다*

 

다리 저는 짐승들이 시방 집으로 들지 못하고 한 데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사하라

바람이 잠든 밤에는 지구가 스스로 도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독한 담배 불 하나 이승을 떠났다

 

네 눈빛이 내게로 오다가 얼어붙어 툭 부러져 내린 뒤에

 

이제는 술 먹지 않고도 울음이 네 발로 기어 나오는 나이

헛소리처럼 꽃이 피었습니다

죽은 친구가 귀신을 쓰다듬고 있는 골목 귀퉁이 누군가 쓰다버린 물감을 개어 바른 누런 창에 비치는 얼굴

 

네 눈에 숯불을 넣어주랴

 

 

 

 

*법구경에서

 

 

 

 

 

대숲에서

 

 

   여기는 간이역 잠간 내려 엿들은 풍경이 전부일까요 목 없는 숟가락으로 검은 밥을 떠 먹여준 얼굴 없는 그대를 생각합니다 쓸개집을 짜내어 내뱉는 나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녁이 창자를 흘리며 서있는 여기 귀신도 헤매다 갇혀버린 마디 속에는 얼음을 뿌드득 뿌드득 씹으며 세상을 건너온 쓸쓸한 소문들도 들어있겠지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아

 

  수제비를 뜯어 넣으며 하시던 푸르른 말씀들이 사람을 벗은 채 차갑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두엽에 새긴 도끼자국을 나누며 우리는 서로의 무덤을 깊이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셨지요 한 시간만 더 아궁이 재가 식지 않는다면 새벽이 가기 전에 한 줄 정도는 더 이 어둠을 적고 싶다고요

 

 

 

 

 

 

  

혼자 두는 바둑

 

 

돼지고기를 삶으면서 저녁 비 내립니다 하수는 겁이 없고 고수는 변명이 없다며 검은 돌을 쥐고서 어둠이 내립니다 끈 없는 구두에 질끈 끈을 동여매며 오시는 저녁입니다 흰 돌이 부족해서 어쩌나 걱정하시며 낙숫물 듣는 저녁입니다 살아 있는 유리창은 고요하지만 죽은 유리창은 동맥을 그을 수도 있다며 날카롭게 내리는 어둠입니다 그녀가 갈비뼈 사이에 살고 있는 툰드라에 서리꽃이 피었다며 웃는 차가운 저녁입니다 중원에 검은 돌 한 점 놓고는 고요만이 가득한 저녁입니다 평생 빈삼각만 두며 살아왔다고 거북등 같은 건 본 적도 없다며 내리는 어둠입니다 나뭇잎을 단체로 떨어뜨리며 겨울이 강제 행정대집행 들어오는 저녁입니다 나이를 먹으니 혼자 중얼거리는 일이 많아진다며 흰 눈썹 휘날리며 그 분이 오고 계시는 계가 불가능한 어둠입니다

 

 

 

 

 

 

 

꽃은 부드러운 칼입니다

 

 

당신이 칼을 들어 꽃을 베고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오늘 그 말씀이 내 혓바닥에서 다시 꽃피는 걸 봅니다 꽃 속에는 망막 너머 깊은 바다가 있어 내 목젖 가까이 깊은 골목에까지 들어와 찰랑거립니다

 

한때 당신이 우물이었을 적에 나는 보름달이 지나가다 떨구고 간 고등어 비늘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고등어를 마당에 꽃 피우고야 말겠습니다 다시 말씀을 주세요 칼처럼 부드러운 꽃을 내 검은 혓바닥에 피는 꽃은 말고 의주나 블라디보스톡이나 봉천이나 길림이나 목단강이나 그런 이름들로 불러주세요 그런 이름들은 자리끼 얼어붙는 저승 윗목쯤에 있어서 죽어서도 이 으드드득 부딪는 턱으로 남아있어서 씹어도 씹어도 다 씹지 못하는 되새김질이겠지요만 아직도 고막에 맺힌 그 말씀으로 주세요

 

다시 칼을 주세요 아니 꽃을 길을 버린 이름들에게 말씀을 물푸레나무 몽둥이나 소 좆 몽둥이로 맞아 흩어진 살점 닮은 꽃을 주세요 연은 끊어져 날아가고 실타래는 엉켜버린 이미 죽은 바람들이 날짜 지난 신문을 서로 읽으려 싸우다가 당신 뼈로 피리를 부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바람이 분다

 

 

 

늙은 창문으로 세상을 본다

상처 없이 보내는 시간이 두렵다고

가시가 망막을 찢으며 어둠을 데려 온다

등 굽은 할머니가 다리 저는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지나가는 저녁이다

눈꼽처럼 별이 뜨고

개 짖는 저녁이 절룩이며 깊어간다  

 

나는 어릴 때 새들이 배가고파 우는 줄 알았어

지나가는 저 이쁜 아가씨에게 우표를 붙여주면

내게로 올까

 

친구는 공사장에 삽을 꽂으며 웃었다

그 친구는 죽어서도 주소가 없다

내 주소는 어디쯤에서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을까

 

오래전 골목으로부터 벚꽃 불어오는 밤이다

 

붉은 피가 검어지고

그 피가 푸르게 번쩍이는 밤이다

외투에 묻어들어 온 찬바람이 아직 방안에 가득한데

 

삽자루에 꽃핀다

 

우리는 삶을 마감한 뒤에 빛으로 돌아갈 것인가

어둠으로 돌아갈 것인가

 

세상 모든 창문들은 질문으로 빛나는데

마차는 하늘 위에 있고 말들은 준비가 덜 되었다

 

 

 

 

 

 

 

 드문드문 꽃

 

  어느 봄날이었지 중얼거리자 꽃이 불어왔다 어스름이 내리면 솜털 닮은 풀들이 깨어나는 시간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모든 바람이 집으로 몰려가는 시간 흰 종이가 물러가고 검은 종이가 책상위에 펼쳐지는 시간 빼곡하게 적어놓은 일기는 여백을 찾을 수 없고 세상 모든 창문들이 의문으로 빛나는 시간 어린 어둠 속을 늙은 매화향기가 할퀴고 간 시간 묵은지를 꺼내던 손등에 얼비치던 노을이 뺨 위에서 어두워지는 시간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지 않으리라 으드득 이를 갈며 넘어지며 또 일어서는 눈사람의 시간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한 마리 겨울새가 휘익 날아간 뒤에 국수는 새롭게 끓고 동치미는 아직 얼음 쪽으로 기울어지는 시간 드문드문 가시가 망막을 찢고 나오는 어두운 꽃들의 시간

 

 

 

 

 

 

 

 혼자일 때 혼자가 풍부해진다

 

 

 

  날씨가 완장을 찼는지 제멋대로입니다 한나절에 사계절이 두루 다녀가십니다 주서식지를 떠나 사람으로부터는 퇴근하지 마시길

 

 줄거리 보다 양념이 더 많은 이야기를 지닌 몽땅 실패한 사랑의 작대기가 눈에서 고름을 짜내며 갑니다 피가 농약인 여자 누구에게도 쏟아질 수 없고 누구에게도 수혈할 수 없는 여자가 뜨거운 피에 겨워 깊은 밤 손칼국수를 썰고 있습니다

 

 몹쓸 놈이 듣지도 않는 약을 때마다 팔아먹는 계절입니다 푸른 것들이 수묵화를 부욱 찢으며 돋아나더니 어느새 서리 묻은 옷을 걸치고 오는 계절입니다 지팡이로 툭 치니 꽃들이 깨어난 엊그제가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사라진 뒤에 아무리 뻐꾸기 날려도 대답이 없으니

 

 물 밑에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체 관람 가 극장에서 만날 수는 없었을까요 여기는 심야영화관 홀로 영화를 봅니다 산비둘기 울음에 피가 맺혔어도 그 피에 젖는 이 아무도 없는 영화관 자막에 내리는 빗금 속에서 용비어천가를 듣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나니 얼음 밑으로 뜨거운 것이 흐르는 물속입니다

 

 

 

 

 

 

 

 

성님 성님 하면서 눈이 내릴

 

 

 

입춘 추위가 매섭던 새벽 차비도 없이 눈 속에 갇혀버린 광명하고도 사거리에서 헤메다 찾은 조모 시인의 고시원

성님 시원한 물 쪼까 드셔 이방 저 방 다니며 담배도 얻어 와서 성님 담배 잠 피워 보드라고잉 앗따 차비라도 구해얄 텡게 또 이방으로 저 방으로 돌아친다 성님 전철비가 천 오 백 원잉께 버스비가 팔백 오십 원 이제 이천 사백 원이면 갈 수 있제 성님 꼬깃 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에 백동전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손에 쥐어준다 성님 참말로 미안하요 라면이라도 한 봉지 끼려 드려야는디 주머니 먼지밖에 가진 게 없어라 맨발로 따라나서며 우린 입춘의 눈발을 맞는다 성님 봄 되면 나가야지라 일거리도 많을테고라 방도 얻어야지라 성님 도다리 좋은 놈 잡아 회도 쳐 묵고 찌게도 끼려 감서리 소주도 한잔 찌끄리고잉

새봄엔 광명한 햇살이 내리실라나 광명사거리에 눈 내린다
성님성님하면서

 

 

 

 

 

 

 

고요에 대하여

 

 

 

어릴 때 나는 푸른 하늘을 보고 고요를 배웠습니다 무더운 여름 이었지요 아무도 없는 마당에서 나 혼자 고요가 소리치는 걸 보았습니다 깊어서 너무나 깊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깊이까지 가 보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편안했습니다 고추잠자리가 나를 깨울 때까지 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깊고 거대한 고요는 정말 무엇이었을까요

 

 

 

 

 

 

 

 

 아무데나

 

 조길성

 

 

 

 술국이 맛나게 끓고 있는 해장국집을 들어설 때나 질척거리는 진창길 지나 불빛 흐린 여인숙 현관문을 들어설 때 지나는 고운여자 뜻 모를 웃음에 홀려 길을 잃는 오후에도 내 집은 바람 속에 있다 어델 가랴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위에서 고향은 언제나 변두리 버스 정류장이고 시외버스 터미널이고 간이역 햇살 환한 기차정거장 출발 오 분 전 처마 끝 배추시래기에도 뿌리의 기억이 새롭게 눈뜨는 저녁 낯익은 골목 밥 짓는 냄새에 살을 데이며 길 떠나야지 어느 생이 다시 온다 해도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 모르는 누구의 마당을 향하는데

 

 

 

 

 

 

약력

 

조길성

 

 

과천출생

2006 계간 창작21 시부문 신인상

2010 시집<징검다리 건너/문학의 전당> <나는 보리밭으로 갈 것이다./도서출판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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