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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문장 외9편 / 권상진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8/18 [10:13] | 조회수 : 208

 

  © 시인뉴스 포엠



 

 

 

틀린 문장

 

  

적막은 나에게 틀린 문장을 주었다

상형도 표의도 아닌 미완의 문자들이

한참을 생각처럼 고이다가

눈에서 턱 밑으로 써 내려가는 짧은 문장

 

눈물을 소리 내어 읽어 본 사람은 안다 

스타카토의 낯선 문법으로 변주된

단조풍 문장은 처음부터

주어도 술어도 없는 틀린 문장이란 것을

 

몰래 혼자서 쓰던 문장이었지만

들키듯 누군가에게 읽힐 때,

그때마다 오독되는 나는

흐르지 않는 단단한 문체로 다시 습작 되어야 한다

 

흘린 문장에 내가 씻긴다

나는 후련하고, 나는 정갈하고

나는 지금 인간적이다

 

 

 

 

 

 

 

 

 

 

 

 

 

홀로 반가사유상

       

  

얼굴과 손등에 보풀보풀 녹이 일었다

눈물은 날 때마다 눈가 주름에 모두 숨겼는데도

마음이 습한 날은 녹물이 꽃문양으로 번지기도 하였다

오래도록 손때가 타지 않은 저 불상의 응시는 일주문 밖

종일 방문턱을 넘어오지 않는 기척을 기다리느라

댓돌에 신발 한 켤레는 저물도록 가지런하다

 

낡은 얼레처럼 숭숭한 품에서는

시간이 연줄보다 빠르게 풀려나갔다

두어 자국 무릎걸음으로 닿을 거리에

아슬하게 세상이 매달려 있는 유선전화 한 대

간혹 수화기를 들어 팽팽하게 세상을 당겨 보지만

떠나간 것들은 쉬이 다시 감기지 않는다

 

몇 날 열린 녹슨 철 대문 틈으로

아침볕은 마당만 더듬다가 돌아서고

점심엔 바람이 한 번 궁금한 듯 다녀가고

달만 저 혼자 차고 기우는 밤은

꽃잎에 달빛 앉는 소리도 들리겠다

 

누워서 하는 참선은 하도 오래여서

반듯이 의자에 앉는다 

오늘은 강아지 보살 고양이 보살도 하나 찾지 않아서 

한쪽 다리는 저려서 들어 포개고

한 손은 눈물을 훔치러 가는 중이다

 

 

 

 

 

 

농담

   

 

죽음을, 이루다 라는 동사로 의역해 놓고서 그는 떠났다

슬픈 기색은 없었다

이태 전 문병을 간 자리, 웃음 띤 얼굴로

비스듬히 누운 채 땅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던 그의

드러난 한쪽 귀는 단풍잎처럼 붉었고 눈이 붉었다

죽음을 이루려는 안간힘이 겨운 웃음을 꽃대처럼 받치고 있었다 

가만 옆에 앉아 있어 주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해줄 게 없었으므로

한참 동안 단풍잎처럼 마음 벌겋게 그를 지키다가 돌아오는 길,

문밖을 따라나서는 희미한 소리

‘먼저 가 있을게’

 

바람이 손끝에 침을 발라 시간을 낱장처럼 넘기는 늦은 오후

겨울 앞에 선 단풍나무 한 그루

고통의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한 직면을 본다

꽃 한 다발을 내밀고 싶은 감동적인 결말 앞에

안간힘으로 죽음을 이루려던 그가 떠올라 나는

다시 나무 곁에 한동안 서 있어 주었다 그리고

말 대신 단풍만 간혹 던지는 나무에 답해 주었다

'니가 참 부럽다'

 

 

 

 

 

 

 

 

 

 

 

 

모놀로그  

 

 

한 번도 거울을 본 적 없는 이의 눈동자는

타인의 기억들로 가득하겠지

내가 찍은 단체 사진처럼 나는 없던 사람

 

거울을 처음 본 순간부터 불행해졌다

어느 날 저 평면의 타인이 나를 정독한 후로

마침내 알게 된 일인칭의 세상

 

세상은 나와 배경만 존재하는 모놀로그 무대

네가 찍은 단체사진 속에는 나만 있고 

혼자 등장한 무대 위에서 나는

쓸모 잃은 말들을 폐품처럼 뒤적여 본다 

아직 사람 냄새가 가시지 않은 타인이란 단어가

빈 병과 함께 잡담 속에 뒤섞여 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세상을 막아서는 거울

서로 비켜서지 않으면 그대로 벽이 되는 우리

타협처럼 손을 내밀어 보지만

나는 오른손, 그는 왼손

결국 그도 온전한 나는 아니었다

 

 

 

 

 

 

 

 

 

 

 

 

 

슬몃 등을 돌려 마지막 인사를 대신한 사람이 있다

미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 생각들이 차곡한

등은, 그가 한 생애 동안 써온 유서

일생을 마주보고 건네던 가벼운 말들이

서로에게 가 닿거나 때론 우리의 간격 사이에서 흩어지는 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등이다

인연이 다한 뒤에야 당도하는 말들이 있다

 

바람이 불어 허연 억새의 가녀린 등이 굽는다

지난밤에는 어둠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새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고

나는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 못한 내 등이 궁금하다

 

이제사 돌아서는 것들의 등이 보인다

내게 오려던, 모든 수사가 지워진

간결한 주어, 목적어, 서술어

 

반가운 이를 만나고 헤어질 때

잠시 돌아서서 그의 등을 읽는 버릇이 생긴 것은

그날 이후다 

 

 

 

 

 

 

 

 

 

 

 

집밥

 

 

혼자 먹는 밥은 해결의 대상이다

 

두어 바퀴째 식당가를 돌다가 알게 된 사실은

돈보다 용기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

 

매일 드나들지만 언제나 마뜩잖은 맛집 골목을

막차처럼 빈속으로 돌아 나올 때

아이와 아내가 먹고 남은 밥과 김치 몇 조각에

나는 낯선 식구이지나 않을는지  

 

늦을 거면 밥은 해결하고 오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걱정인지 짜증인지

가로수 꽃점이라도 쳐보고 싶은 저녁

 

불편한 약속처럼 나를 기다리는 골목 분식집

연속극을 보다가 반갑게 일어서는 저이도

누군가의 아내이겠다 싶어

손쉬운 라면 한 그릇에

아내와 여주인을 해결하고 나면

어느새 든든해 오는 마음 한편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구내식당

저녁 내내 간절하던 집밥은

그래, 쉬는 날 먹으면 된다 

 

 

 

 

 

 

 

바닥이라는 말

  

 

눈을 떴을 때 나는 바닥에 닿아 있었다

흉물스러운 바닥의 상징들로 각인된 팔과 이마는

오늘, 또 하나의 슬픈 계급을 얻는다

 

삶의 바닥에 무릎 꿇어 본 적이 있다

하루의 인생을 허탕 치고 돌아와

단단하고 냉랭한 바닥에 무릎을 주고 손을 짚으면

이런 슬픔에 어울리는 습기와 냄새 그리고

허공의 무게가 뒷등에서 자라곤 했다

 

심해의 물고기들처럼 납작해질 용기가 없다면

중력을 향해 솟구쳐야 한다

마른 땅을 움켜쥐고도 몇 번을 다시 살아내는 나무처럼

시든 무릎을 세우면서

사람의 가장 슬픈 자세를 풀고 있는

나도 이제 바닥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나이

 

달력은 벽에서 전등은 천정에서 화분은 베란다에서

저마다의 자세로 각자의 바닥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절망은

단단한 계단의 다른 이름이 된다 

 

 

 

 

 

 

 

 

 

 

지게

 

 

짐이 되기 싫어서

혼자 산다는 노인의 등, 그 불거진 뼈마디는

지게의 발을 닮았다

 

이사 간 집 마당에 버려진

쓸모 잃은 물건처럼

덩그러니 세상에 남겨진 낡은 지게

 

얼마나 많은 고단과 희망을 져 날랐을까

닳고 패인 자리에

매몰찬 시간이 넘나든 흔적 숭숭하다

 

깜박 잊고 간 물건인 양

여기 쓸쓸한 마당을 다시 돌아와

저 지게를 지고 일어설 누군가는 여태 오지 않는다

 

이럴 줄 모르고 칠십을 살았다는

늙은 지게의 희미한 독백이

눈으로도 들리는데

없다, 빈 마당 가득한 적막에는 귀가 있을 리 없다 

 

간혹 집배원이 빈손으로 문을 열어

쓰러진 지게를 고쳐 세우고

지겟작대기처럼 잠시 기대어 주었다가

떠난 자리에는

끝나지 않은 대화가 아직도

혼자 중얼대고 앉아 있다   

 

 

 

 

외발

 

 

학 같다

주저거리며 한 발을 들고 선 사람들

한소끔 왁자한 잡념들 가라앉으면

학은, 아니 학 같은 저 사람은

어느 곳으로 한 생각을 디뎌 놓을까

 

허방 허방 허방 허방

걸어온 길마다 찍혀 있는 헛디딘 발자국들이

팽팽하게 허리춤을 잡아당겨서

길은 허공 한 뼘 밀어내지 못하고

새순 같은 고민만 부풀리고 있다

 

잡초들의 한 생을 다 살아 보고서야

비로소 한 가지를 세상에 디디는

나무 한 그루의 길에는

뿌리가 걸어온 생각들 무성하다

언제나 한 발로 생각을 가누는 자세는

흔들릴지라도 넘어지는 일이 없다

 

멈춰 있는 모든 것들은 외발이다

저 학, 저 사자, 저 나무, 턱을 괸 저 사람

가만히 외발로 세상의 균형을 잡아 보다가

간신히 한 생각을 디디고 나면

다시 한 발을 슬그머니 들어 올리는 

 

 

 

 

 

 

 

유품정리사 K

 

 

K의 무리들은 방바닥을 도마라고 부른다

가끔씩 엇박을 치던 삶의 박자를 온전히 놓쳤을 때 

여기 누워 꾸었을 서슬 퍼런 칼날의 악몽

이 죽음의 가해자는 악몽입니다

과학수사 직원의 비과학적 결론이

악취처럼 온방에 떠돈다

 

K는 죽음을 분리하는 사람

너저분한 도마 위 물건들을

삶의 경계에서 도려내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빈방의 구석까지 스며있는 기억을

삶과 그로부터 분리해낼 때는 자주 한숨을 토한다

 

책상 서랍을 열자, 미처 견적하지 못한 가족사진 한 장

주검보다 더 오래전부터 부패했을 슬픔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슬럼 같은 방으로 걸어 나온다

성체가 되었을 사진 속 사람들은

가난으로 오염된 생태계를 버리고

어디선가 변이를 완성하고 있겠지 

 

그의 전생을 몇 개의 종량제 봉투에 나눠 담으며

K는 진화를 막 끝낸 새로운 개체의 인간을 발견한다

숙주인간

기생하던 모든 것들은 이미 떠나버린 후였다

  

오존 살균기의 전원을 끄자

고독의 냄새까지 말끔히 지워진 빈방이 완성된다

 

 

 

 

 

 

 

 

 

 

 

 

 

 

 

[ 권상진 시인 ]

 

1972년 경북 경주 출생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2015년 복숭아문학상 대상 수상

2018년 경주문학상 수상

저서 『사람의 얼굴』(사회평론사, 2013, 공저)

     시집 『눈물 이후』(시산맥사, 2018, 아르코 문학나눔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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