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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방 외 9편 / 이문희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8/28 [10:38] | 조회수 : 326

 

  © 시인뉴스 포엠



붉은 방 외 9

 

이문희

 

                                           

       

  빨간 날인데도 아버진 오지 않았지 아버지 애인 입술이 빨갰었나? 엄마는 빨갛게 타들어 갔지 난 우산을 썼어 빨간 비가 내렸지 우울한 날 혼자 놀이동산에 갔어 마법사 지팡이가 날아다녔지 빨간 양탄자를 타고 집에 돌아왔어 난 밤새 빨간약을 가슴에 발랐지

 

 많이 울어본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나는 매일 살아나는 죽음 매일 태어나는 별자리 날아다니는 책 공원에 버려진 신발 치자 꽃향기를 길게 빠는 파이프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담장 매일 넘어지는 오늘 많이 울어본 얼굴로 웃는 저수지

 

 내일이 하루하루 침몰함, 낯선 삶만이 죽음으로부터 견딤, 너에게 쏠린 한쪽 우주가 텅 빔, 모든 문을 걸어 잠금, 영생을 버렸다 방주를 흘림, 후드득후드득 눈물을 바람에 흩뿌림, 끌고 다닌 연옥이 가벼웠음, 뺨을 후려치듯 잊는 일도 쉬웠음,

 

  백 년 전 일요일을 정류장에서 마냥 기다리는 너

 

 

 

 

 

 

 

 

 

 

 

 

 

 

 

 

 

 

라 라 라

                             이문희

 

                                 -(영원한 것은 영원히 없어 난 한때의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비가 걸어요

어깨에 멜 수 없는 우산일랑 버렸어요  

   

약속을 어긴 당신은 너무친절하군요

사랑 밀당 내겐 사치일 뿐

비처럼 쉬 그치질 않아요  

 

비는 자기가 비 인줄도 모르면서 비를 맞아요

우산이 없어서 비를 썼어요  

 

쏟아지는 생각에 흠뻑 젖은 날엔

받쳐 든 기억보다 버린 기억이 더 많아요

나는 우산을 버렸지만

당신은 유실물 보관함에서 우산을 찾는군요

 

우산을 버렸거나 찾았거나 당신의 대답은 언제나

녹슨 우산살 같아요  

나는 우산과 결별했고 당신은 극복하는 거라고 말해요

 

시간이 내게서 멀어질 때

어둠이 귓불을 타고 가까이 흘러요

 

침묵을 말하기엔 밤이 가벼울까요  

달 뒤로 숨길 것이 많은 나의 죄

 

양수에서 다시 태어날까요

비를 타고 날아 오를까요    

 

당신은 내게 비를 씌어주면서

내일은 맑음, 이라고 예보해요

 

마음의 해안에 간절히 닿기를 바라면서요

 

강변도로를 비가 걸어요

, ,

 

슬픔이 도착하는 시간

 

                                        이문희

 

 서두르세요 꽃들도 커튼을 치고 절벽을 마주 보는 시간 당신의 왼쪽 갈비뼈에서 내가 빠져나오는 시간 달리던 말을 동쪽으로 보내고 무화과나무 안으로 침잠하는 시간 초록 뱀이 허물을 벗고 나를 찢고 들어오는 시간 고요와 불온이 교차하는 아스피린이 필요한 시간 화요일 오후 630

 

  어서오세요 안전하게 숨을 곳이 필요한가요 당신을 위해 지하로 통하는 지도를 드릴게요 대신 당신의 지문이 필요해요 손가락을 잘라줄 수 있나요 구름 모자를 훔쳐 쓰고 노랑 루즈를 바르세요 순간 하늘에 밑줄 긋듯 번개가 피어날 거에요 새로 돋아난 당신의 아이라인이 최초의 비밀번호에요

 

  안심하세요 아빠는 선반 위에 누워 계세요 엄마가 피 묻은 심장을 빨랫줄에 널고 있고요 언니들이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불러요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간 오빠는 밤이 깊어도 내려오질 않아요 나는 가족들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했어요 서로 알아볼 수 없어 다행이에요 화병 속에 나를 꽂고 나를 피워요

 

  서두르세요 축축한 시간의 저녁이 오고 있어요 모든 그림자가 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가요 어스름이 묽은 풀대죽처럼 서서히 어려요 불안의 시간이 시작 되어요 검은 천막으로 걸어가요 바람이 키스를 불러와요 먼 우레처럼 눈동자를 가슴에 붙이고 모르는 행성으로 떠나요 알람은 우주에서 맞출게요 그럼 안녕.

 

 

 

 

 

 

 

 

 

 

 

 

 

 

 

검은 악보의 시간

                                                이문희

                                     

 

여름에 태어났으니 여름처럼만 살면 좋겠는데

난 겨울에만 사는 것 같다

 

여름 저수지에 가서 알았다

 

물가를 걸을 때 종아리에 붉은 물방울들이 4분음표로 맺혔다

지난 계절 대화가 느리게 흐르고

오선지 위 긴 손가락 같은 나뭇잎들이 팔랑거렸다

울대에서 자꾸 가시가 걸린다고 피아노가 말했을 때

 

난 높은음자리 꼬리를 치켜세운 악보 속으로 숨었다

 

뒷목을 핥는 적막한 오후 햇살

빈병 신문지 명함 손수건 시계 오래 끈 신발을 놓쳐버렸다

젖은 피아노 위로 수의 같은 시간이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미끄러져갔다

미끄러져 난

검은 건반과 흰건반 사이에서 오백 년도 더 늙었다

 

악보를 떠난 음들은 어둡고 불길했다

(후회는 도돌이표로 돌아왔다

이번 생은 여름에 태어났으나

난 얼마나 추운 사람인지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였는지

아는 사람은 여름밖에 없었다)

 

늦은 산그늘이 태엽처럼 저수지를 감았다

누군가 버리고 간 의자에서 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내일의 산책

 

                                     이문희

 

세상에 고아같이 버려진 날에도 나는

세상을 고아로 만들어 줄까 생각해요

숨쉬기 힘든 사람에게 무슨 시를 써줄까 물어보다

요람 위에서 흔들리는 붉노랑 상사화를 읽어주었어요

 

버려진 날에도 나는 참아요

눈이 휑한 길고양이 새끼처럼

밥그릇을 핥는 강아지처럼

참을 만큼만 참기로 해요

 

오늘처럼 사는 게 아픈 날에도 또 생각해요

5분 후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에게 무슨 책을 읽어줄까

바퀴가 없는 자전거 위에서 푸른 고래수염 시를 써주었어요

 

사방으로 팔을 뻗고

헤엄쳐 다니는 놀이공원 바람인형인 나는

빈 깡통 같은 날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찌그려요  

 

생각 없이 노는 게 아니에요

이 지느러미를 보세요 얼마나 헤져있는지

 

그래, 나에게도, 그저 사느라 사는 나에게도 *

꿈이 있어 절뚝이는 거리에서 사색해요

 

나의 세계는 온통 밤뿐

끝까지 밀고 밀리는 게 생이라면

누가 나를 벼랑으로 밀어줬으면 하고 기다려요

 

바다처럼 디딜 곳이 없다 해도

다만, 디딜 곳을 찾는다 해도

난 다 걸을 거예요

 

이 슬픈 시간을

 

 

*페르난두 페소아

 

 

오늘의 날씨

-이별주의보

 

                               이문희

 

 나 오늘 활짝 펴도 되나요?

 

  매일 죽음을 입고 벗지만 정작 우리는 죽음을 모르죠 그래서 당신과 나 사이엔 기압골의 영향으로 편서풍이 분대요 눈물은 잘 마를 거예요 나는 너무 밝은 게 탈이지만 당신은 언제나 폭풍 같죠 그래서 세상은 폭풍전야예요 그래요 밤새 벼락을 맞거나 국지성 호우에 떠내려가기도 하겠지만 그깟 피지도 않은 꽃잎이 대수겠어요 우울의 강수량 70퍼센트 연애에 실패할 확률 99.99mm 붉은 칸나가 피었어요

 

  나 오늘 활짝 죽어도 되나요?

 

 

 

 

 

 

 

 

 

 

 

 

 

 

 

 

 

 

 

 

 

 

 

 

옮긴이의 말

                             

-지금 뭐해요, 고흐씨

                                             이문희

 

 

  중요한 것은 몇 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살았느냐다. “영혼에 깊이 새겨진 것은 영원히 살아 있어서 계속 그 대상을 찾아다닌다.”라고 고흐는 말한다. 난 인생의 숫자를 기입하느라 이른 새벽 강가 물안개를 보지 못했다. 서른일곱 개의 여름을 어떻게 오십 개의 여름이 이해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사라지기전까지 다시 볼 여름이 설렌다. 그리고 고백컨대 당신을 안 이후로 내 삶은 변한 것이다. 기억을 바꿔야 삶이 달라지는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그러나 결코 그리지 않은 그림인지도 모른다.”라고 고흐 당신은 말한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당신을 꿈꾸게 했다.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예술가의 광기에 감염된 우리의 영혼은 진화한다.

 

  라고

나는 여기까지 쓴다. 창밖으로 사이프러스가 보이는 밀밭이 출렁인다. 오후까진 서둘러 글을 마쳐야한다. 고흐의 또 다른 자화상을 보기 위해서다. 생레미 요양병원 지하실에서 발견될 그 그림은 테오가 그렸다면 따듯한 블루가 인상적일 것이다. 입가의 미소가 느리게 오는 슬픈 같은. 오늘 밀밭엔 유독 많은 까마귀 떼가 날아와 놀고 있다. 다리가 튼튼한 청람빛 까마귀에게 이 편지를 묶어 보내야 한다. 서쪽에서 유성이 밤 아홉시에 떨어진다고 했으니, 론 강까지 날아가는데 무리가 없으리라. 나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아를의 밤하늘엔 당신을 위한 키스로 가득 찬다. 죽음을 맞이하는 별처럼. 잘가요 빈센트.

 

 

 

 * “ ”는 『영혼의 편지』

 

     

 

 

 

 

 

 

이브의 마을

 

                           이문희

이젠 그곳에 갈래요

 

젖은 채 넘겨지는 한 권의 해안이 있고

파도 페이지 따라 심장이 펄럭이던 아홉구미 옛길

 

막차도 끊겨 별이 하나 떨어지고

어둠 속에서 바다가 너울거릴 때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던 곳

 

파도소리를 개고 개며 울음을 쟁여도

두려운 마음은 쉽게 지워지질 않아

차라리 해당화 밭에 주저앉고 싶었지요

 

슬픔을 그만 둘 수는 없었지만

날마다 태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무거웠지만

바다 쪽으로 자꾸만 돌아보고 돌아보고 싶은 걸 어떡해요

 

당신은 아직도 지중해 물빛을 닮은 눈동자를 가졌나요

그때 당신 닮은 아이와 물결무늬 소라처럼 살고 싶다던 약속은 지금도 잘 자랄 테지요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당신을 흘려보내고

완행열차 칸칸마다 사랑을 실어 멀리 놓아 버린 뒤

지금까지 사랑에 관한 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요

 

해가 뜨고 지는 것이 당신과 나만을 위한 거라고 믿었던 우리가

그토록 머물고 싶어 했던 곳

 

그곳에 가서

당신 손을 잡고 걸을래요

 

거닐다 거닐다 지치면

가난한 마을의 꽃밭노을을 보며 무릎 잠을 잘래요

 

멀리

헤어진 당신과

딱 하루만이라도

 

 

 

 

칸나가 저녁 문턱을 넘는 풍경

 

                                    이문희

 

칸나가 피었는데 우린 왜 쓸쓸하죠?

 

시골 간이역 근처

허름한 여인숙 마당엔 유독 칸나가 붉었어요

 

그날 우리의 신음 위로 기적은 안달이 나 덜컹거렸고

누군가는 어둠의 아가리를 기어코 찢어대는지

밤새 비명을 질러대곤 했었는데요

 

누가 내 안에 칸나를 심어놓았나요?

 

저녁이 칸나의 붉은 울음으로 오고

 

젖은 목소리로 내 몸을 기웃거릴 때

몰래몰래 늙어가는 저녁이 스스로 주저앉을 때

어둠속을 왕진하듯 다녀가는

칸나의 이빨자국

 

나는 어둠 한 장이 되어

정작 너에게로 건너가는 한 순간이 오고야만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나로부터 오래 돌아가기 위해 칸나가 저녁을 물고 오는

 

그 때

 

 

 

 

 

 

 

 

 

 

 

아득하다는 말

 

                                                    이문희                                    

 

그대와 나 사이

깊은 골짜기 하나 있어

이월에서 다시 이월로 이어지는  

긴 전쟁 같은 고비의 골목이 있어

길 잃고 해 넘어

목소리 메아리 되어 돌아올 때

아득하다는 말이 참으로 아득하여  

아득하다의 말속에는

동굴 같은 심연의 바다가 있기도 해서

가슴 저리는 마음들이

저리 술렁대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지도 모르겠다

뒤란 꽃잎 구르는 소리와

낙숫물에 멀어지는 하늘과

산책길에서 만난 도토리 한 알에

때로는 낮은 담장을 끼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중절모자처럼 희미해지는 것인지도

저녁불빛들을 불러들여 두 손 모으고

고요히 얼굴을 묻는 시간

 

 

 

 

 

 

 

 

 

 

 

 

 

 

-약력

 

이문희 2015년 계간 <시와경계> 등단. 동국대 주최 미당백일장, 전북여성백일장 장원. 샘터시조 의정부문학상 수상. 시선집『들어라, 전라북도 산천은 노래다』(전북문화관광재단. 2019)공저. 전북시인협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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