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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라는 꽃 외1편 / 남상광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9/08 [09:30] | 조회수 : 64

 

  © 시인뉴스 포엠



안개라는 꽃

 

 

 

흐려지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안개는 꽃으로 피어나고자 애를 썼다

짙은 어둠에 빛의 색을 지속적으로 섞어

아침이 오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희뿌연 꽃잎들을 펼쳐 보였다

온 천지에 식은땀을 뿌리며

꽃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에 서늘한 희열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오래전부터

과거와 현실의 땅 속 찌꺼기들을

안개는 아무도 모르게 발효시켜 왔을 것이다

주변의 어둑한 냄새를 향기로 바꾸기 위해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기억 저편에

아스라한 시간들을 묻어 오래 숙성시켰을 것이다

안개꽃은 새로운 오후를 위해

세상을 지워버리고 다시 그리고 싶었지만

무리에서 새어나오는 엷은 회색의 수증기 뒤로

태양의 그림자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

굽은 줄기가 흔들거리며 시들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한낮으로 허물어지는 무채색의 존재는

얼어붙은 시기에 그어진 성냥불에 불과했다

개벽을 이루어낸 꽃들이 피날레로 흩날리는 동안

영혼이 되어버린 안개는

막 순산한 임산부처럼 안도감으로 허탈해졌다

계절은 더 큰 겨울을 계획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우윳빛 배경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안개는 단순히 쾌청한 날씨를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바닥에 꽃으로 뿌려진 거였다

 
 
 
 
 
 
 

유라시아 도시 2020

 

 

 

기형도를 읽는 중에 스마트폰 문자가 온다

고작 이 천년동안 지중해의 권위를 먹고 산

산 마리노 거리에 붉은 벚꽃들이 흩날린다고 한다

피의 로마와 르네상스 속 피렌체

맑은 한낮의 햇빛처럼 쏟아지던 때가 생각났다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므로

역사 한 쪽을 접어 책꽂이에 반듯이 꽂는다

KF94로 입을 막고 우한(武汉)의 구석을 훑어보고는

여름의 행성으로 귀화하고 싶어졌다

우주선 출입문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짐을 쌌을 것이다

목말라 본 적 없는 몇몇 도시의 부자들은

사랑하기에 경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철부지와 노숙자는 절대 같은 단어가 아니다

언제나 낭만적으로 보이길 원하는 파리의 뉴스는

태양이 꺼진 사막, 그 후에 대해 이야기 한다

뜨거운 사막을 만난 적이 없었거나

낙타 없이 횡단하던 때를 벌써 잊은 탓이다

모두가 과정이 아닌 결과만을 바라보는 날

단순히 목숨을 연장하는 것 이상의 욕심은

영영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도시는 이미 소멸되고도 남을 만큼 늙어버렸으므로

 

 

 

 

남상광 시인 약력:

《시문학》 등단(2014). 《호서문학》 주간. 대전문화재단 창작기금수혜.

시집 『빵인()을 위하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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