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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밥처럼 외1편 / 허갑순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9/10 [10:14] | 조회수 : 80

 

  © 시인뉴스 포엠



불안을 밥처럼

          허갑순

 

 

컴퓨터 전원을 켰다.

길들지 않아서였을까

급히 부름을 받고 길을 잃어버렸을까

한참을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다.

초조가 자꾸 자판을 찍어 누른다.

김 아무개,

손 아무개,

박 아무개,

손가락이 무력해지고 입술이 타들어 간다.

DAUM에서 NAVERNAVER에서 DAUM으로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저들의

무거운 음모가 잠깐씩 모니터 안에서 지글거린다.

OFF, OFF, OFF, OFF, OFF, OFF, OFF, OFF,

불통인 너와 나 사이에 어느새 어둠이 깔린다.

익숙해진 어둠이, 자막이 밤새 불안을 찍어낸다.

밥 같은 내 불안은 컴퓨터 안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ON...................................................................

불안을 그저 밥처럼 먹고 있다.

공기보다 맛이 가볍다.

 

 

 

 

 

 

 

 

 

 

 

 

 

 

 

손이 그렇게 미끄러져

 

           허갑순

 

 

안개에 덮인 도시를

빠져나갔다.

전화기 코드를 뽑는

손이 그렇게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도시는 부풀어 오른

입술을 말없이 다독거렸다.

K는 이미 형체를 잃은 말이었다.

안개는 도시의 목을 누르고

도시는 전화기 속에서 빽빽거렸다.

K의 부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수화기를 막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안개는 도시의 두려움과 고요한 새벽을

모자이크하면서 유유하게 언어를 난도질했다.

그것이 사는 한 방식이었다는 변명은 훨씬 뒤

K를 통해 알았다.

사랑한다는 말과 헤어지자는 말이

수화기 속에서 윙윙거렸다.

허물어져 가는 안개의 모서리 속에서

K도 나도 도시를 미끄러져 다녔다.

안개는 그렇게 견고한 시간들의 요새를 빠른 속도로

허물어뜨렸다.

 

 

 

 

허갑순

전남 순천.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와 산문』(1995)으로 문단에 올랐으며, 2회 서울시인상, 4회 국제한국본부광주펜문학상, 16회 광주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그저 꽃잎으로 번져나갔다」 등 7권과 「현대시의 시간과 공간인식」 등 2권 평론집이 있다. 전 조선대학교 동신대학교 외래교수 현 한국연구재단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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