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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네 철근공장 외 9편 / 김 기 찬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9/16 [10:40] | 조회수 : 216

 

  © 시인뉴스 포엠



 

매미네철근공장9

 

                                         

 

 

철근공들이철근을나르고있다

 

쇳물쩔쩔끓는오후

요란하게아스팔트바닥을긁어대며근처야적장으로옮겨지는철근들

직선의쇳소리가끊임없이사방을찔러대며허공을헐어내고있다

 

 늙은은행나무가먼저철근을끌면젊은느티나무가이어받아끌고그걸다시어린감나무가이어받는다

나르는일에집중하다보면누가먼저랄없이,

 플라타너스가끌고단풍나무가끌고모과나무가끌고뒷짐지고산책이나다녀오려던오동나무도엉겁결에철야작업을거든다

 

 년에철만돌리는철근공장은지하막장에서끌어올린근의어둠과밑바닥을닥닥긁어모은7년의침묵과혀가말려오그라질때까지쥐어뜯는질긴울음의힘으로엔진은돌아간다.

 

 아스팔트가패도록철근이내지르는마찰음은생의방지턱을간신히넘는지끊겼다가이어지고다시끊겼다이어진다

 

여름날뙤약볕에그을릴대로그을린푸른나무철근공들은

목이탄다

 그래도세상에는곧추세울일이너무많아어깨에서어깨로낭창낭창휘는철근을휘청휘청날랐다  

 

허공의야적장에수천수만톤의철근이쌓고쌓여질때쯤

공장주인은한밑천챙겨온데간데없고폐쇄된공장만이나무둥치를끌어안고있다

 

 

 

 

 

 

 

 

 

 

                        선퇴蟬退

                                          김 기 찬

                                       

 

  누군가 7년 막장의 긴 터널을 뚫고 날아간 흔적, 눈물겹다

 

  아름드리 허공을 기어오르다 미루나무 둥치에 걸어 둔

  , 텅 빈 울음집

 

  말랑말랑한 속울음이 솟구칠 때마다 차곡차곡 쟁여 넣어 차돌처럼 단단해졌을,

 

  뭉툭한 새끼발가락 같다

 

  울지 않은 생은 없다고, 마침내 그가 운다

  -엄 띄-엄 반벙어리 첫 울음을 울다가, 갑자기 온몸에 쥐가 났는지 쥐어짜듯 막 악을 써댄다

 

  누가 이 삼복염천의 한낮에 저리 쇠사슬을 끄는가

  아스팔트길이 패이도록 쇠사슬을 끌며 저 깊디깊은 허공 속울음을 퍼내고 또 퍼내는가

 

  말도 마라, 그 울음소리가 나뭇가지를 잡아 흔들더니, 그 진동이 둥치를 타고 내려가 실뿌리까지 매치더니, 냄비 끓듯 천지사방이 들썩인다

 

  미루나무 열 평의 그늘에다 열 양동이 눈물을 자지러지게 쏟아 붓고서야 잠시 멈춘 그 쌩울음을, 나는 모를란다

 

  아무래도 저 질기디 질긴 울음 끝은 내 생의 밑바닥에 가 닿을 것이다 거기, 내 울음집인 어머니 지금도 거적떼기 몸으로 바싹 풍화되어 있을 것이다

 

  생의 울음바닥을 갈아엎느라, 숨찬 그가 또 운다

 

 

 

 

 

 

 

 

 

 

 

                           오월

                                         

                                             

                                         

 

 

머리에수건소만小滿팔다리걷어붙이고망종亡種일터로가는

 

못밥얻어먹으러칡덩굴이멈칫멈칫정지문앞을서성거리는동안

 

대밭쇠뿔죽순이몸피를늘려축축한멍석그늘넓히는동안

 

물오른연초록도눈곱씩눈곱씩허공에보태초록강을만들어흘려놓는동안

 

받으러뻐꾸기말술에빠져앞산뒷산에다슬픔의씨앗꾹꾹눌러심는동안

 

찔레꽃젖가슴열어젖히고생살찢어희디흰울음지천에흩뿌리는동안

 

알맹이없는나는꽃게발목이나쪽쪽빨러격포항에나가는

 

 

 

 

 

 

 

 

 

 

 

 

 

 

 

 

 

 

 

 

 

 

                                       깨꽃

                                                  김 기 찬

 

 

 

 “야야 깻잎김치 담가 놨다, 니들 입맛에 맞을랑가 모르것다.”이른 아침 갑골이 다된 노인네한테서 쩌릉쩌릉 전화가 왔더란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매상마을에 아흔을 훌쩍 넘긴 홀몸 노인네가 살았더란다. 장마가 끝나기 전 어느날 마을회관 점 십의 민화투 판을 젊은 노인들한테 슬그머니 물러주더란다. 죽음을 코앞에 둔 꼬부랑 노인네, 무슨 생각에선지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마당 한가운데로 나서더란다. 30평 앞마당을 한 바퀴 삥 둘러보더니, 이 삶에서 얻은 기운 이 삶에 다 쓰듯 앉은걸음으로 땡볕뿐인 마당을 파 엎더란다. 하늘도 놀라고 마당도 기겁하여 저만치 달아났다 돌아오더란다. 하루아침에 마당을 잃은 집은 노발대발 삿대질을 해보았지만, 노인네는 콧등으로 받아치며 제일 무서워하던 잡초마저 마당 구석 밖으로 내몰더란다. 내친김에 마당을 넘어 골목 갓길까지 파고 또 파 엎더란다. 그러더니 어디서 구해왔는지 들깨 모가 마당 가득 들어찰 때까지 엉덩이가 온 땅바닥을 훑고 다니더란다. 금세 파란물이 벙벙히 들어찬 방죽이 되더란다. 방죽이 모자라 파랑파랑파랑파랑 깻잎파도가 넘실거리더란다. 넘실거린 파도가 골목까지 도랑을 이루며 흘러가더란다. 그때서야 신이 난 마당도 덩달아 대낮같이 환한 깨꽃덕석을 깔아놓더란다. 벌 나비들도 이때다 하고, 여러 날 째 잔치를 벌이다 깨꽃향기 따라 팔랑팔랑 여름을 노 저어 가더란다. 풀벌레 소리 깨알로 또록또록 여물어 갈 무렵, 깨벌레가 다된 노인네 신경통 앓던 다리 퉁퉁 부어오른 것도 모른 채 환한 마당에 밤새 달빛을 털더란다 다음 날 아침 부랴부랴 줄포 오일장에 다녀와 자식들한테 먼저 수화기를 들더란다.

 

 “야들아, 들깨지름이 사람 몸에 그리 좋단다.”이생에서 얻은 삼만 평 다랑밭 얼굴에 낯꽃이 벌어 온 동네가 꼬순내로 진동을 하더란다.

 

 

 

 

 

 

 

 

 

 

 

 

 

 

                          시골집은 안녕하시다

 

                                                  김 기 찬

                                                         

                                                       

 

 

오랜만에 아내와 홀로계신 시골집을 뵈로 갔다

꺼르막의 잡풀들은 새하얗게 기가 죽어 있었다

오래된 집을 오래토록 건사해온 살붙이들이 안쓰러웠다

한자리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허리가 아픈 도구통도

볼품없는 장독대도 장독대에 모여 앉은 민들레도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꽃이 한창이시다

수돗가 사기요강은 대소변을 잘 받아내시는지

헌 테레비는 명창들의 구성진 가락을 국숫발처럼 잘도 뽑으시는지

벽시계의 초침은 얼마나 힘이 남아도는지

수도 검침원처럼 일일이 확인하고 기록한다

아내는 쪽마루에 앉아 홍매실에게나 눈을 주다가

마당 밭에 나가 달롱개를 캐고 쪽파를 다듬고 있다

백열등은 점차 시력이 떨어져 침침해 하시고

골다공증으로 무릎 뼈가 시린 명아주 지팡이도

토방의 먹 고무신도 바깥 마실 길이 궁금해 뒤집혀있다

보일러실의 보일러도 웅얼거리며 구석구석 따뜻한 피를 잘 돌리시고  

정짓간의 부뚜막은 그대로 먹빛이시다

늙어간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애처롭고 쓸쓸하고 짠한 것이지만

나름대로 다들 간신간신 다복하시다

마를 새 없이 진물 흘리는 수도꼭지를 단단히 조이는 사이

험한 세월 만나 둔해진 몸 이끌고

1세기를 잘 건너시는 것을 느긋하게 바라보다가

먹먹해진 눈빛의 아내가 봉다리봉다리 봄을 챙겨 차에 싣는다

웃자란 걱정은 며칠 지나 다시 나를 잡아끌겠지만

말캉 구석에 빨깡 짜놓은 걸레를 보면 그나마 안심이 된다

 

 

 

 

 

 

 

 

 

 

                              간지럼 타는 나무

                                           김 기 찬

 

 

 나는 그녀를 알고 있지

 

 여름 한낮 헌 난닝구에 반바지 차림으로 땡볕 더위를 피해 다니다 보면 눈에 확 띄는 여자저 혼자 웃고 있었지

 

 늘씬 날씬한 그녀가 속살 훤히 들여다보이는 분홍드레스를 입고

 괜히 쓸쓸한 척 비스듬히 담장에 기대 살살 꼬드기는,

 그렇다고 내 마음을 통째 뒤흔들지는 않는, 그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나는 마냥 좋았지

 

 격포에서 불어와 변산을 건너는 동안 혀가 길어질 대로 길어진 건들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핥고,

 빨고,

 간질간질 간질간질 몸속으로 자꾸 들어올 때

 

 그녀는 얼마나 온몸이 간지러웠을까나

 이빨 부러져라 웃음을 참아냈을까나

 

 아니지, 아닐지도 몰라,

 살구꽃보다 복사꽃보다 덜 되바라진 여자라 할지라도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웃음을 어찌 참아냈겠어

 

 조개처럼 입술이 얇은 얼굴엔 금세 화색이 돌았겠지

 아마 평생 철들지 않을 것처럼 깔깔거렸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녀의 웃음에서 내 젊음이 다시 되살아날 수 있었겠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백 일 동안을 해맑아져서 웃음의 주변을 이렇게 어정대고 싶었겠어

 

 나는 그 누구보다도

 부안이 고향이라는 그녀를 잘 알고 있지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외로울 때면

 이따금 손가락 휘슬이나 불어 젖히며 보란 듯 티켓 기생쯤 돼 보이는 그녀에게 달려갔을 거야

 

 

 

 한 손엔 새우깡 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엔 소주병 들고

 

 웃는 동안은 늘 새것 같은 그녀와 쭈그리고 앉아 소주잔을 홀짝이다 보면

 그녀에게도 어둠이 있을까 하고 궁금해져서 벌릉벌릉 가슴이 뛰기라도 한다면

 

 바람기 많은 잡놈인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화물선 짐칸에 올랐겠지

 

 우리가 찾은 고슴도치섬 옆구리 어디쯤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호들갑 떠는 그녀에게 최우선으로 초고추장 찍어 바다의 단맛을 보여준 뒤

 불구덩이 칠산 바다의 노을을 눈으로 되작거리다가 문득 가슴이 뜨거워진 언어로 밤하늘 별똥별에게 말을 걸겠지

 

 괜스레 내 가슴에도 너울성 파도가 일고

 그녀의 어둠도 철썩철썩 풀어져 썰물은 지고

 

 다행히도 자신의 상처에서 웃음을 꺼낼 줄 아는 여자라서

 마지막 갈라설 때도 뒤탈은 없을 것이라 나는 믿겠지

 

 파도가 파도를 불러들이듯 웃음이 웃음을 부르는 그녀의 세상은 눈부셨지

 기분 좋은 날에도 크게 웃어본 적이 없는 나를

 시도 때도 없이 실실거리게 했지

 온몸이 귀를 열고 쫑긋거리게 했지

 

 끝내는

 내 죽음도

 내 삶도

 

 저렇듯 철없이 웃음을 뒤집어쓰고 간지러워졌으면 싶지

 탄력적으로 간드러졌으면 싶지, 하고 한 철을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곤 했지

 

 귓속을 구르는 그녀의 웃음 참아내는 동안

 

 

 

 

 

 

 

 

                          조개들

                                   김 기 찬

 

 

  조개구이 집에 모인 조개들은 한통속이다 둥글넓적하다 쓰다듬어 주고 싶은 불두덩 같다

  대합 가리비 꼬막 돌조개 민들조개 키조개 새조개 하고, 호명하면 호명하는 족족 저요, 저요, 하고 대답해 줄까

 

  저 생기발랄한 요조숙녀들,

 

  , 하고 저마다 한 입 가득 바다를 물었다 말하지 않겠다고 누구와 굳은 맹세라도 한 것처럼

  손끝이라도 닿을라치면 소스라쳐 제 몸부터 닫아건다 닫아걸고 속살까지 바짝 움츠린다

 

  사내는 제 품안에서 자꾸만 둥글어지던 사랑을 애써 기억해내고는 한참 열 오른 석쇠 위에 그녀들을 올려놓는다

둥근 입술에 갇힌 말의 무게는 물에서 막 건져낸 돌멩이 같다 묵직했다

 

  불길이 온몸을 뜨겁게 끌어안자 메마른 입술에 푸르르 거품을 물고는

  자기 고백처럼 꾸역꾸역 뿌연 분비물을 쏟아낸다

  일순 내 마음속에 웅크린 갯내가 물쿤 풍겨져 나왔다

 

  무르팍이 까지도록 뻘밭을 기며 입 닥치고 살아온 파랑 많은 삶을 떠올리는 사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혀를 깨물며 오므라진 제 몸을 제 스스로 여는가 싶더니

  딱따기처럼 제 내부 밑바닥까지 환히 열어 젖히는가 싶더니

  이런이런, 그 하얗고 쫄깃쫄깃한 순결을 그만 내 보이고 만다

 

   뜨겁게 달아오른 사내들이 도굴한 유물들을 탁자 위에 수북이 쌓아놓은 듯한

  저 빗살무늬 토기의 조개껍데기들

  순결을 감싼 안쪽이 접시 같다 밑천이 바닥난 지갑처럼

  , 하고 하얗게 열린 입은 다시는 어두워지지 않았다

 

 

 

 

 

 

 

 

                             구암리 고인돌 

                                   김 기 찬    

                    

         

          죽음이 한데 모여 살고 있다

          밤이고 낮이고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저 어둡고 습한 돌무덤에는

        내 안의 피가

          내 아버지의 문드러진 살이

          내 할아버지의 삭은 뼈가 기록되어 있다

          술 한 잔 따라 올리고 싶은

          죽음을 고인 돌

 

                   

 

          열한 마리 돌거북 가족들이

          천년도 더 넘게

          한 발짝도 떼지 않고

          먼 길 가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던 것일까 거북스럽게,

 

          평생 갈 곳도 없으면서

          시간이 지칠 때까지

          천 리를 가고 있다

 

                   

 

           나는 문득 생각해 본다 내가 들어와 갇힌 이곳엔 죽음의 시작에 가닿는 문이             있어서

 

          잿빛 상복 입은 구름이 늘어서 곡을 하고 밤새 비는 雨雨雨 눈물 흘리다 가            고 어쩌다 달이 조문객처럼 들렀다 가는 곳

 

          아득한 먼 곳으로부터 나이 많은 무덤이 시간의 간이역을 건너오고 건너오고 건          너오고 있다고

 

          다음 간이역에 도착할 때까지 바로 앞에서 쿵쿵쿵쿵, 쿵쿵쿵쿵 지나가는 지하철          처럼 번쩍번쩍 부싯돌 당기면서

 

 

                   

 

          벙벙히 고인 시간이 있다 저수지의 물처럼

 

          오래된 시간은 깊이를 잴 수 없어 맨 아래에서 시커멓게 늙고

 

          지금 시간은 넓이를 잴 수 없어 맨 위에서 퍼렇다

 

          흘러가지도 못하는 수천만 년의 고요를 휘휘 장대로 저어본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시간이 고여 썩어가는

 

          여기보다 깊은 바닥은 없으리라

     

 

 

                   

 

 

 

 

          ⁕전북 부안군 하서면 구암리에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남방식 고인돌군이 있다.

 

 

 

 

 

 

 

 

 

 

 

 

 

 

 

 

 

 

 

 

                               찻잔에 매화가 오면

                                                김 기 찬

                                                 

 

 

  마음을 다치고 맘조리 하느라

  몇 년째 눈 시리게 매화를 들여다보지 못했다

  한 사흘만 딱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일어나려 했으나

  서너 알의 이빨이 사리처럼 쏟아졌다

  그러는 사이 많은 것들이 안팎으로 나를 다녀갔다

  뼈아픈 절망이 갔고,

  치욕이 왔고,

  증오가 갔고,

  다시 악에 받친 분노가 치밀어 왔고,

  손가락이 길어질 대로 길어진 세상은 나를 죽일 놈으로 내몰았으므로

  해변에 밀려온 통나무처럼 마르거나 젖은 채로 한 시절을 견뎌야 했다

  한번 상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란

  한 주먹의 모래알을 씹기보다 한 말의 소금물을 마시기보다 어려웠으므로

  여러 해가 지나갔고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의 말도 아프게 잊혀졌다

  내 안의 침묵에 또 하나의 침묵을 더하는 동안에도

  번쩍하고 등짝에 드릴이 지나갔고 전신에 마비가 찾아왔던가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늙기만을 바랬다

  그때마다 삶과 죽음 사이를 겉돌 듯 찻잔에 매화가 오면

  정말이지, 내 안의 야성의 피가 뜨거워져 자주 짐승이 되곤 했다

  시시때때로 핏발선 눈을 수평선에 헹구는 동안에도

  몇 번의 봄날이 조개껍데기로 해안가를 뒹굴며 지나갔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눈 뜨고 죽어 살기로 마음을 고쳐먹던 날들이었다

  봄은 피었다 지는 일이 계속되었지만

  바다를 건너는 나비처럼 봄날의 깊이를 다 건너기 위해서는

  더 이상 비열해지지 말자고,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나는 나에게 주먹가슴질을 해대며 쌍시옷의 욕을 내뱉어야만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루머에 멱살 잡혀 정말이지,

  아물지 않은 상처에 썰물밀물 철썩거리는 봄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픔이 더 아플 때까지

 

 

 

 

 

 

 

                              채탄부

                                                  김 기 찬

 

       나는 억만년 어둠 속 침묵을 캐는 탄부다

       지하 수천 미터 낮과 밤이 가늠되지 않는 첩첩함 어둠

       숨 쉬는 중생대 그 혼미 속에

       안전모와 가스등, 검은 장화 마스크 쓰고 깊이 빠져있다

 

       광기 번뜩이는 한 생애의 막장

       받침목 사이 죽음의 올가미가 도사리고 있는 폐 속에

       티끌로 잠복한 탄분은 적이다

       나는 곡괭이를 치켜 올려 불꽃 튀는 심장

       힘껏 내리찍어 일으켜 세운다

 

       푸른 하늘이 그리워 미친 흙도 돌도 아닌

       시간이 굳어 타버린 지구의 검은 피를 채굴한다

       오직 하루분의 기름땀을 제물로 바쳐

       하루분의 탄량을 희망의 절댓값으로 배당받는다

       그리고 고고학자처럼 나는 지층을 뚫는다

 

       나는 화생방전에 출전한 흑인 병사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받침목을 등허리에 짊어지고

       끈적끈적한 파충류가 되어

       사닥다리를 기어오른다

       전생의 업을 무릎 꿇고 야망의 삽으로 퍼 올리면서

       시작을 꿈꾸는 이승의 끝이

       차라리 무덤처럼 아늑하고 편안하구나

 

       나는 가장 뜨거운 기도를 올린다

       만 근의 어둠과 산소와 물로 식탁을 준비해 놓고

       매몰돼 숨진 영혼을 위하여

       가슴 쥐어뜯으며 진폐증에 쓰러진 너를 위하여 혹은

       지상을 향해 출갱하는 마지막 지친 너를 위하여

 

       이제 나는 또 가장 추운 곳으로 실려 가는 석탄이다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의 가슴에 타는 불꽃이다

       그 화려한 절망으로 나는 또 쓰러지고 싶은 석탄이다

 

       지하에 버려진 천형의 짐승

       나는 지상을 버릴 수 없는 빈곤과 희망의 노예다

       지상과 지하를 넘나드는 21세기 자유인이다

 

 

 

 

 

 

김기찬 약력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채탄부 865-185』란 시집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바닷책』,『피조개, 달을 물다』,『채탄부 865-185』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신석정촛불문학상과 전북시인상, 한국미래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현재『바다문학상』운영위원회 사무처장과 전북시인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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