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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시, 시나무와 놀자 / 송유미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09/27 [21:18] | 조회수 : 676

 

▲     ©시인뉴스 포엠

 

오후 세시, 시나무와 놀자

-동길산의<>김문수의<복숭아뼈…>홍일표의<제의>…중심으로                                      

 

                                               송유미

 

#1. ‘좋은 시’는 괴로워…시의 비만에 대해

  

  시는 시를 쓴 시인의 의도와 다르게, 독자에게 읽혀진다. 그리고 시를 쓰는 과정에서 이러한 독자의 공감대까지 깊이 생각하며, 시를 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실 시는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름이 아니고 보면, 시를 쓸 때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가 나 혼자의 독백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읽어도, 시의 화자가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아니 감동은 아니라도 상호의존, 상호연결의 창이 될 수 있을까…등등 말이다.

  한편의 시의 완성에의 길은 멀고멀다. 러시아 시인 ‘퓨쉬킨’는 ‘황금분할법’에 의해 시를 썼다고 하지만, 이렇듯 시는 감성의 세계이지만,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시의 생산과정은 매우 치밀하고 정교한 세공이 필요한 건축물과 같은 것이다. 구조가 단단해도 살을 잘 입히지 못하면 그만 그 뼈대가 드러나고, 너무 살을 많이 입히면 시의 비만이 되고 만다. 대체 한편의 시를 생산하는데 얼마나 많은 파지를 날리는가.

  그러다보면 시는 무얼까 절로 회의하게 된다. 시는 그리고 어디서 오는가 묻게 된다. 물론 일반적으로 시는 영감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시는 일상의 산물인 것이다.

  시인을 요즘도 이슬을 먹고 사는 사람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는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또 일을 하는 순간, 떠오르는 영감의 산물이기에, 시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며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 하겠다. 그리고 우리가 하루 종일 떠드는 말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 시가 될 정도로 시보다 생활은 더욱 시적일 때가 많은 것이다. 그 생활 속의 시를 두고, 먼 먼 곳으로 시를 찾아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시를 찾아 조용히 산사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본다. 물론 이런 이들은 내면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겠지만, 한데 어울린 세상 속에서 찾아지는 평범한 일상의 보편적인 형상화의 작업을 위해서는 아니라는 생각은 어쩔 수 없겠다.

  시는 필자의 졸견으로는 일상적인 경험에 의해 나오지만, 그대로 일상을 적으면 시가 되지 않는데서, 시는 매력적이며 매혹적이며 시는 젊은이처럼 방황하게 만든다. 시는 삶과 제 3차원의 세계의 상호 연결된 일상 속에서 있는 공()의 풍경은 아닐까. 너무 가득차서 비어있는 것을 모르다가, 어느 순간 바삐 돌아가는 일상의 휴지에서 우리는 이 공을 느끼고, 그 공속에서 깨달은 한순간의 영감에 의해, 자동 기술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물론 이에 따른 치열한 절차탁마가 있어야 할 것이다.

  

 

 

#2 동길산의 <> 그 비워서 가득한 詩空

 

   발표된 많은 시중에서 특정한 시를 찾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의의 있는 일일까, 하는 아이러니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시의 세계는 어떤 허명을 거부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언급하는 시가 ‘좋은 시’라는 위상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원하고, 그 원하는 만큼 강렬하게 다가오는 시의 눈빛에 의해 접근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와 같다고 해야 할지.

  우리의 삶 속에서 보편적인, 그러면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이 가장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달라이 라마의 이야기를 여기서 떠올리는 것은, 아마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이러한 상호관계의 연결이 되는 것 같아 우선 공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코자 한다.

  20011월초, 북인도 보드가야 티베트 사원 맨 꼭대기 층 달라이 라마가 거처하는 방에서, 우리나라 유명한 모() 철학자 외 대동한 몇몇이 달라이 라마와 대견했다. 그 자리에서 이 철학자가 "당신의 일상의 깨달음을 이야기해 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했을 때, 달라이 라마는 "존재의 무상함과 공의 진리는 매우 강력하게 깨닫고 있지요. 매우 유용하게 쓰이기도 하구요. 특히 공의 개념에 대해서는요"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때 함께 동행한 김용옥 선생도 작은 노트를 꺼내 받아 적기 시작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한국인 철학자에게 다시 말했다."니기르주나에 따르면 공이란 상호의존 또는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니기르주나는 2세기 경의 인도인 스승으로, 그의 가르침은 티베트 불교의 토대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말은 이어졌다.

  "공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은 텅 빈 것이 아니라 가득하지요. 공의 진리를 깨닫는 것, 공에 대한 앎을 터득하는 것...나는 내 자신이 공에 대한 약간의 지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공은 상호 의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넓혀줍니다. 전체적인 시각을 갖는데 그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

 달라이 라마는 이어서 찻잔에 담긴 ''에 은유해 우리 생활 속에 있는 일반적인 진리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눈으로 보여주듯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물을 왜곡 없이 바라보기 위해 과학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는, 우리 일상의 진리를 흔히 마시는 '', 그 어려운 공의 깨달음을 너무나 쉽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바위가 바위를 받치고 있다.

넘어질 것 같은 바위가

넘어질 것 같은 바위를 받쳐서

바위는 넘어지지 않고 있다.

넘어질 것 같은 바위와

넘어질 것 같은 바위 사이에 틈이 있다.

틈 사이에 하늘이 보인다.

틈으로 보는 하늘은 좁지만

좁아서 더 들여다보고 싶다.

넘어질 것 같은 사람이

넘어질 것 같은 사람을 받치고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넘어질 것 같은 사람과

 

넘어질 것 같은 사람 사이에 좁은 틈이 있다.

틈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걸어가고 있다.

<>-‘동길산’

 

  생활 속에서 우리는 '틈이 없어' 말을 자주 한다. ''은 또 다른 ''으로 쓰이기도 한다. 동길산의 <>의 풍경은 틈과 틈 사이에 형성된 의 풍경. 절묘하게 바위가 바위를 받치고 있는 풍경의 틈을 형상화하고 있다.

  언뜻 언뜻  바위 틈으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틈으로 보는 하늘은 좁지만 좁아서 더 들여다보고 싶다.’ ‘넘어질 것 같은 사람과 넘어 질 것 같은 사람 사이에 좁은 틈이 있다.’ ‘그 틈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걸어가고 있다.’ 그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램프처럼 온화한 골목길이 이어지고, 그 아슴한 빛은 내시경처럼 삶의 내용을 들여다보게 한다. 

  내장이 다 드러난 투명 전화기처럼. 잔잔한 시의 어조는 한없이 온유하다. 모든 사물의 벽이 사라지고 경계가 허물어지고 만다. 우리의 삶의 엄명성에도 불구하고, 이 가을날의 쓸쓸한 낙엽이 지는 가로등이 졸고 있는 골목길의 풍경에서, 우리는 '가득히 비어 있는' 공의 매혹에 빠져들기도 한다.

  현대인의 삶은 ‘틈’이 없고, 그 틈이 그리운 틈이 되어 한없이 멀어지는 틈이 되고 만다. 틈이 없는 삶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끊임없이, 틈을 메우면서 살아간다. ''은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 삶을 변화하게 한다. 어떤 규정될 수 없는 가치관처럼. 

 

한쪽 돌담이 낮아 보입니다.
돌을 쌓아올립니다.
이번에는 다른 쪽 돌담이 낮아 보입니다.
낮아 보이는 돌담을 다시 쌓아올립니다.
맞춘다고 맞춰도 어느 한쪽은 아무래도 낮아 보입니다.
가만 둬도 될 걸 일머리 없어
건드려 몸이 고생입니다.
담만 높아집니다.
-'돌담-동길산' 전문.


  빈 의자처럼 텅 빈 공의 매혹이 일렁이는 '돌담' 곁에 앉아 있는 빈 의자처럼 이 시를 읽는데는, 어느 행도 어렵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나 어려운 말이 없다. 시가 풍경이 되어 있고, 풍경 속의 시가 언어의 그림을 통해 서정의 풍경을 만들고 있다.

자연처럼 좋은 시란 어쩜 설명이 필요치 않을 터. 그냥 가만히 곁에 있어도 좋은 사람처럼 풍경이 되어 읽히는 '돌담' 곁의 의자, 그 빈 의자에 햇살이 앉아 졸고 있다.

 

내 오른쪽 복숭뼈 속에는
동글동글한 물이 출렁거리는데
밤마다 무릎을 풀며
물 흘러들고 나가는 그 소리 듣는다
한 생을 관통하며 흘러내리는 물
가고자 하는 가파른 곳에 나보다 먼저 올라가는
복숭뼈 속의 물
딱딱하게 응고되어 졸아들지 않는
말랑말랑한 그 물소리 만져본다
언젠가 가뭇없이 흩날리어 가버리는 날
끝끝내 내 몸 속에 남아
내 영혼의 집을 물고 있을
<복숭아 뼈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 듣는다> -'김문수'

 

#3. 몸속의 풍경, 삶 속의 공의 매혹

 

  동길산 시인의 달처럼 품은 공()은 바깥 세계와 상호 연결된다면, 김 문수 시인의 시화의 공()은 몸속에 품은 내면의 풍경의 매혹이다. '복숭아 뼈'는 ‘내 영혼의 집’. 시인은 날마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복숭아 뼈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밤마다 무릎을 풀며 물 흘러들고 나가는 소리’는 몸속의 절 한 채를 상정하고, '복숭아 뼈'는 몸 속 산문(山門) 풍경의 역할을 한다.

 

  누구나 몸속에 절 한 채를 품고 살지만, 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틈이 없는 삶의 여울 탓이며, 시인은 ‘복숭아 뼈’를 만지면서,  ‘복숭아 뼈 속의 물/ 딱딱하게 응고되어 졸아들지 않는 말랑말랑한 그 물소리를 만져본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우리 몸속의 풍경이든, 바깥 세계의 풍경이든 시는 보이는 세계 내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상화하고, 이 형상화의 세계는, 또 우리 삶의 풍경으로 상호 연결된다.

 마치 몸속에 품은 목탁과 같은 복숭아뼈에 고인 아픔과 고뇌 그리고 슬픔 따위의 물소리들이 어디론가 졸졸졸 흐르지만, 그 흐르는 물이 어딘가 닿고자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은 ‘한 생을 관통하여 흘러내리는’ 시의 소리이기에, 이 가을날 읽는 이의 가슴에 공명을 울린다. ‘공명’이란 공활(空豁) 속의 내재한 공의 울림이며, 세계의 풍경들이란 가득 찬 공속의 공에 다름이 아니지 않을 터. 시 속의 공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내재하는 가의 문제는, 공에 대한 질문과 또 상호연결 된다하겠다. 그러나 시어로 가득채운 여백이 없는 시보다는, 시에 여운과 여백이 넉넉한 시의 메시지는 독자에게 명증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우리 생활에서 점점 없어지는 이러한 ‘여백’은 동 길산 시인의 <>에서 찾아진다. 삶의 여유 없는 모습은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여운이나 여백이 없는 시 또한 우리의 머릿속을 난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끊임없이 공은 움직이며 시의 세계로, 우리의 삶 속으로 틈처럼 파고든다. 가득하게 차 있으나, 또 비어있는 이 세계를 시인의 혜안은 공의 깨달음처럼, 우리의 몸속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절 한 채를 지어, 이 가을의 풍경의 매혹으로 손짓한다.

 

#4. 홍일표의 <제의><구름학개론>에 숨은 공()을 찾아서

 

톱날에 위아래가 잘린 전나무,

수족을 잃은 마음이 갈 곳 몰라 망설이다가

몸을 찢어 치밀어 오른다

용접기에서 튀어나온 새파란 불꽃처럼

겁 없이 세상 밖으로 얼굴 내미는 치어,

죽은 제 어미를 열심히 먹어치우고

지금 무덤 속 경전을 독파하는 중이다

다듬다듬, 

어미의 생애를 거덜 낸

연한 녹색의 물고기들이 제법 통통해졌다

<제의祭儀>-  홍일표

 

누군가 간절히 손짓하여 잡으려 했던

구름 한 잎 혹은

삶의 외진 골목에서 부푸는 과대망상

나는 거듭 하늘에 풀어놓은 휴지뭉치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지고,

솜사탕처럼 삶이 다가올 때도

끝내 나는 경계에 서 있다

양털구름 한 조각도

왜 나에겐 괴로움인가

가끔 검은 구름 저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역의 방언이

우르릉우르릉 생의 거친 자갈밭으로 굴러오고,

이미 반 토막 난 삶의 절반

휴지통 안에서 또 다른 바깥을 넘보며

부스스 부스스 기지개를 켠다. 그렇게 다시 살아

형형색색 목숨들이 피고 지는

수만 평 구름밭을 일구는 대지주

하늘의 넘치는 곳간에서

나는 다시 홑껍데기 구름 한 장 뽑아들고, 묻는다

삶은 왜 이렇게 가벼운가

삶은 왜 이렇게 무거운가

<구름학개론>-홍일표

 

  달라이 라마는 다시 말한다. ‘물’ 한잔을 놓고 들여다본다. 이제까지 본 물은 물이 아니라, 노란 쥬스다. 다음날 다시 들여다보니 검은 색,  그 사람은 색맹이고,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니 ‘검은 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본 물은 검은 물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진리가 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진리의 1차원의 세계. 달라이 라마는 다시 정리한다. 

  “공이 가진 ‘자비가 가진 긍정적인 면과 이기심을 가진 파괴성을 알아가면서 차츰 이해되고, 불교에서의 이런 전통 방식으로 공의 혜택을 나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말씀인데, 이러한 일반적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 할 수 있을까,의 질문에 다시, “이 물은 존재하고 나는 이것을 물이라고 보고 느끼는 것이다.” 이 물을 모두 물이라면 인정하는 사실 세계의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공의 깨달음이라는, 진리는, 처음에는 쉬운듯하지만 자꾸 파고들면 어렵다. 단순한 1차원의 진리지만, 이 진리를 깨달음으로 대천대계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은  역시 성자의 몫인 것 같다. 

  문학 역시 이러한 화두의 연장선장이 아닐까. 시인은 이러한 진리의 화두를 언어 예술로 그 형이상학의 1 차원의 세계를 형상화 하는 이들이 아닐까. 누군가 문학은 종교 위에 있다고 했다면, 이러한 개념에서 정의한 것은 아닐까.

   홍일표 시인은 ‘톱날에 위아래가 잘린 전나무’를 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시인은 ‘수족을 잃은 마음이 갈 곳 몰라 망설이다가/몸을 찢어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다. 마치 ‘ 용접기에서 튀어나온 새파란 불꽃처럼/겁 없이 세상 밖으로 얼굴 내미는 치어,’처럼 ‘죽은 제 어미를 열심히 먹어치우고/ 지금 무덤 속 경전을 독파하는’ 중이다. 그 찰나 사이 ‘다듬다듬,/ 어미의 생애를 거덜 낸 연한 녹색의 물고기들이 제법 통통해’ 진다. 

 

  현세의 전 나무는 톱날 위아래가 잘린 채 서 있으나, 시인이 형상화한 <제의>에는 해가 바뀌고 또 구름이 흘러, 전나무의 찢어진 몸을 뜯어 먹고 산 ‘연한 녹색의 물고기’ 퍼덕이는 신생에 닿아 있다. 무릇 <제의>는 신생의 상생을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의 인생은 고승일지라도 떠도는 구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인생을 떠도는 구름이라 이른다. 떠도는 구름처럼 정처 없이 흘러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더욱 느끼는 이 가을이다. ‘누군가 간절히 손짓하여 잡으려 했던/구름 한 잎 혹은/삶의 외진 골목에서 부푸는 과대망상’을 누구나 또 겪는다. 뜬 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서민의 발걸음은 삶의 외진 회랑을 돌때면, 누구나 뜬 구름 같은 ‘로또’의 행운을 꿈꾸듯이 말이다.

  ‘나는 거듭 하늘에 풀어놓은 휴지뭉치를 구겨/쓰레기통에 던지고,’ 수많은 뜬 구름을 쫓다가 자신도 모르게 휴지뭉치처럼 던져지는 이 꿈이 없는 일상 속에서, ‘솜사탕처럼 삶이 다가올 때도/끝내 나는 경계에 서 있다 /양털구름 한 조각도/ 왜 나에겐 괴로움인가’ 존재의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구름 한 잎 잡으려 했던 꿈은 ‘ 검은 구름 저편에서/알아들을 수 없는 이역의 방언이 /우르릉우르릉 생의 거친 자갈밭으로 굴러오고,’ 이미 반 토막 난 삶의 절반 난 채, ‘삶은 왜 이렇게 가벼운가, 삶은 왜 이리 무거운 가’의, 도반의 과정을 깨닫게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장한 삶은, 한 장의 구름일 수도 또 한 장의 구들장일 수 있는 공의 앎이, 구름장처럼 둥둥 가볍게 혹은 무거운 먹장구름처럼 흐른다. 이렇듯 시는 설명이 아닌 느낌이기에, 읽는 이 마음대로 해석하는 재미가 시인에게는 오독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언제나 오독은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고 감히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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