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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외1편 / 이정희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10/13 [19:43] | 조회수 : 63

 

  © 시인뉴스 포엠



바나나

 

이정희

 

 

 

한 묶음 바나나를 사온 날

집안의 온도는 열대지방의 한낮처럼

노르스름하니 따뜻했다

잘 펴진 다섯 손가락 같은 바나나지만

꼭 쥔 주먹은 되지 못한다

금세 짓무르는 손가락들

식탁은 하나고 화장실도 하나인데

웬 방문은 이렇게 많을까

문은 열릴 때보다 닫힐 때 더

볼멘소리들이 나고

검은 반점들은 이미 늦었다는 표시

날파리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고

잘못 비틀면 짓무른 바나나들이

물컹, 터지고 만다

노랗던 껍질이 거뭇하게 변색된

껍질을 벗기면 흰 바나나의

속살들도 이미 상해 있다

그땐 아무리 귀를 끌어 조근대도

밀랍처럼 굳고 말끝은 모두

세모로 뾰족해져 있다

껍질은 얇아가고

시들어 캄캄한 순간에도

자신들이 바나나였다는 사실을

노랗게 따뜻했었다는 사실을

쾅쾅 닫고 말겠지

 

 

 

 

 

우체통

 

이정희

 

구름으로 지은 집에 기다림이 산다

감정은 속성으로 무디거나 부풀었다

흐릿한 눈동자와 안개의 말이

슬픔을 발효시키고

글자가 풀려 나와 두근거림을 낳는다

 

활활 타오르는 실핏줄

빈 주머니를 탈탈 터는

목마름이 고개를 내밀고

자음과 모음이 해체되었다

 

거미줄 같은 골목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

빛은 바람 등줄기에 매달려

햇살을 갉아 먹었다

 

담장 넘어 세상이 궁금하여

목을 길게 늘어뜨리는 역류

도려내야하는 두려움

빛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벽은 차다

 

어둠을 딛고 일어서는 맨발

허리를 비틀고 올라간 허공에서

붉은 꽃이 피었다

 

능소화 꽃잎은 날개를 접어

가슴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고

발소리를 잡던 손은 싱싱하게 굳어갔다

 

움직일 수 없는 바닥

멍울에 갇힌 집은

슬픈 꽃가루 문신을 새긴다

바람 끝에 매달려 어둠을 키우며

심한 건기를 버틴다

 

 

 

 

이정희 - 경북 고령 출생

       202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3회 해동공자 최충 문학상 시 부문 대상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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