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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치 외9편 / 고영민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11/18 [10:05] | 조회수 : 513

 

  © 시인뉴스 포엠



봄의 정치

                               

                                     고영민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

얼음이 풀린다

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

떨지도 않고 걷는다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

따뜻한 눈송이들

지난겨울의 노인들은 살아남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단단히 감고 있던 꽃눈을

조금씩 떠 보는 나무들의 눈시울

찬 시냇물에 거듭 입을 맞추는 고라니

나의 딸들은

새 학기를 맞았다

 

 

 

 

 

 

 

 

 

 

 

 

 

 

 

 

 

 

 

앵두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버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공손한 손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 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식물

                                                            고영민

 

코에 호스를 꽂은 채 누워 있는 사내는 자신을 반쯤 화분에 묻어놓았다 자꾸 잔뿌리가 돋는다 노모는 안타까운 듯 사내의 몸을 굴린다 구근처럼 누워 있는 사내는 왜 식물을 선택했을까 코에 연결된 긴 물관으로 음식물이 들어간다 이 봄이 지나면 저를 그냥 깊이 묻어주세요 사내는 소리쳤으나 노모는 알아듣지 못한다 뉴스를 보니 어떤 씨앗이 700년 만에 깨어났다는구나 노모는 혼자 중얼거리며 길어진 사내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준다 전기면도기로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레 흔들어본다 몇날며칠 병실 안을 넘겨다보던 목련이 진다,

멀리 천변의 벚꽃도 진다 올봄 사내의 몸속으론 어떤 꽃이 와서 피었다 갔을까 병실 안으로 들어온 봄볕에 눈꺼풀이 무거워진 노모가 침상에 기댄 채 700년 된 씨앗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다

 

 

 

 

 

 

 

 

 

 

 

 

 

 

 

 

 

 

 

 

 

 

 

 

 

 

 

 

 

 

명랑

                              고영민

나는 내가 좋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좋습니까

 

낮에 당신은 당신에게 뭐라 말합니까

밤에 당신은 당신에게 뭐라 말합니까

 

 

오늘 당신에게 내 생각이 잠깐

다녀갔습니까

오늘 나에게 당신 생각이

잠깐 다녀갔습니까

 

북쪽보다 더 북쪽

남쪽보다 더 남쪽인 당신은

가볍게 오고 싶지 않습니다

가볍게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는 내가 좋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좋습니까

 

 

 

 

 

 

 

 

 

 

 

 

 

 

 

 

 

 

 

 

사슴공원에서

                               고영민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어디까지가 여름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을일까

누가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놓았다

오늘 나는 아주 먼 곳에 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은

침엽수처럼 무표정하다

젊은 어느 날의 책 속처럼 지금도

사슴공원 어딘가에선

사랑이 생기고, 비가 내리고

멀리 빈 들판엔 철새가 돌아온다

누가 구름을 사라지게 하고

비를 멈추게 할 수 있나

투명 비닐봉지에 금붕어를 담아 들고

한 소년이 급히 어딘가로 달려간다

공원에 잇닿아 있는 장례식장 마당에서

어느 가족이 늦은 상복을 갈아입고 있다

사슴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도 서둘러 당신에게 가야 한다

사랑이 식기 전에

밥이 식기 전에

 

 

 

 

 

 

 

 

 

 

 

 

 

 

 

 

 

 

일가(一家)  

                         고영민

 

 

아침나절 물가로 나갔던 거위들이

줄지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지

나는 조용히 그걸 바라보고 있지

어김없이 울타리를 돌아

풀이 우거진 돌배나무 곁을 지나

말뚝을 지나

저녁의 어두운 마당을 지나

왔던 길 그대로

인색하게, 아주 인색하게

바깥에서 안으로, 안으로

어디에도 한눈팔지 않고

고스란히

엉덩이를 흔들며

한 발 한 발 거위 속으로 들어가는

일가(一家)

 

 

 

 

 

 

 

 

 

 

 

 

 

 

 

 

 

 

 

 

 

 

 

사랑

                       고영민

 

늦은 저녁, 텅 빈 학교 운동장에 나가

철봉에 매달려본다

 

너는 너를

있는 힘껏 당겨본 적이 있는가

끌려오지 않는 너를 잡고

스스로의 힘으로

끌려가본 적이 있는가

 

당기면 당길수록 너는 가만히 있고

오늘도 힘이 부쳐

내가 너에게

부들부들 떨면서 가는 길

 

허공 중 디딜 계단도 없이

너에게 매달려 목을 걸고

핏발 선 너의 너머 힘들게 한번

넘겨다본 적이 있는가

 

 

 

 

 

 

 

 

 

 

 

 

 

 

 

 

 

 

 

 

 

중년(中年)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에서

아버지가 보였다

 

중년이라고

중얼거려보았다

 

어제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옛 친구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친구의 아버지, 어머니 들이 고스란히 불려나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내가 아닌,

아버지를 부축했다

잠결엔 아버지가 내 아내의 몸을 더듬었다

 

죽은 아버지가 내 집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신다

 

 

 

 

 

 

 

 

 

 

 

 

 

 

 

 

 

 

 

 

 

고영민 1968 서산 출신 2002 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악어, 공손한 손, 사슴공원에서, 구구, 봄의 정치

박재삼 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수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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