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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름의 놀이터1) 외9편 / 김광호

정유진기자 | 입력 : 2021/01/05 [00:12] | 조회수 : 368

 

  © 시인뉴스 포엠



페름의놀이터1)

김광호

 

 

발견되지않는화석과

작고여린미래가

숨바꼭질놀이를한다

 

가본없는이국의망가진놀이터와

이름이없는한낮의꼬마

 

기다림은

없고다만보일같은물질로

여기로쏟아지고가지고놀고

신발속으로들어가양말을더럽히지

 

낯선사람을보면달아나야한다고믿었던시절과

유괴라도기다리는시절의

불변함

하늘은유난히맑고유난히붉게물들고말고

 

혼자였던꼬마에게달려와손그릇을내미는친구들.친구의손그릇에담긴투명함.그들은작은투명꼬마의하얀병아리라고명명했다.삐약삐약세상에가장연약한소리로울다죽은꼬마의하얀병아리.신나서까르륵웃는아이들.하얀병아리하얀병아리친구들은죽은하얀병아리를작은손그릇에담아노을이지도록꼬마에게건내고.꼬마는죽은하얀병아리를너무담아찢어진밤을지새우지.하얀밤이줄줄새는놀이터에서

 

투명들은굵어지는뼈를갖고

 

놀이터에서자란꼬마와꼬마의투명한동물들.꼬마와꼬마의길고양이와꼬마의유기견과꼬마의어른과.

꼬마는투명하게기른동물들로놀이터를지킨다.아무도놀지않는놀이터는녹이슬고삐걱대니까.투명들아모여라.윤활의놀이를하자.시나브로돌아가는투명의톱니들.길고양이는차에치여숨지기.유기견은잡혀가서먹히기.숨은꼬마에게깊이숨으라고말하기.숨어서계속숨죽이기.영원히숨어있기.

 

 

 

투명들의굵직한뼈는어떻게숨겨야들킬까요,

 

주저앉은술래에게다가가물어보았는데그는꼬마를술래로만들어놓고아주깊이숨어버렸지

피가나면눈물을흘려야한다,믿었던시절

 

투명은흘리는피가보이지않아

눈물을참고있었고

 

그것은놀이터를허무는

 

숨은사람없는숨바꼭질의술래가되는

아무도타지않는시소가기우는

 

바람에흔들리는그네

궤적을얼굴에미소로박아넣은어른의

어른,어른거림

 

언제쯤일까,

 

여기오래된공터에

놀이터가건설되는날은

금발의꼬마가놀러와

우리의이름을불러주는날은

 

흔들거리다가

어른거리다가

 

주저앉아양말을터는술래와

술래의길고양이와술래의유기견과술래의어른과.

 

 

 

 

 

 

 

 

빛의 보존법

-하단 표기일까지                                           

                                     김 광 호

#1

 

한낮.

내가 지닌 빛이 자꾸 상한다. 내 빛을 살펴보기로 했다.

 

유리된 일상.

빛 한 줄기를 잘라 유리 도마에 올려두고 깨진 유리 칼로 한나절을 잘게 썰었다.

 

일몰.

잘게 썰어 둔 빛이 갈변하기 시작하면 냉장고에 넣는다.

 

노을.

바닥에 흘린 빛줄기를 손바닥으로 쓱 훔치고 나면 번지는 손바닥의 빛.

 

.

추운 빛이 가득한 냉장고 속.

 

 

#2

 

너는 잊고 있던 식재료가 생각난 얼굴을 하고 냉장고에 대한 기억을 꺼낸다.

 

있잖아, 내가 별사탕 한 개를 겨우 쥘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었을 때, 난생처음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불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거야. 마치 그곳에서 나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그게 신나서 계속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었는데, 문을 닫으면 빛은 혼자서 뭘 하는지 문을 살짝 열어보았거든. 그때 알았어. 빛도 혼자 두면 차갑고 어둡다는 걸.

 

그래서?

냉장고 문을 열어두었지.

그래서?

빛이 번지고 있었어. 녹으면서.

그래서?

엄마가 문을 닫아버렸어.

그래서?

여전히 그곳에 있을걸.

 

그래서 너는 몸이 차갑고.

 

 

#3

 

너는 처음으로 자정이 지난 밤거리를 배회한다. 너는 거리에 쓰러진 불빛들을 밟으며 나아간다. 너는 상해버린 불빛들의 잔해를 조용히 수습하는 중이다. 너는 부패된 불빛의 주검을 부검하는 중이다. 동시에 너의 차가운 몸이 부패되는 중이다. 동시에 너는 추움과 어둠 속을 찾아 급히 달아나는 중이다.

 

추움과 어둠으로 생의 기한을 연장하는 냉장고 속으로.

 

너는 너란 빛줄기에 새겨진 유통기한을 읽어 본 사람.

 

지운 흔적처럼 기록된 빛의 보존법에 따라 빛의 기한을 최대한 연장하는 중이다.

 

#4

 

너가 울면서 냉장고 문을 걸어 잠근 밤,

 

엄마는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린다.

 

엄마는 문고리를 향해 주먹을 편다. 일만 개의 별사탕이 우르르 쏟아지고. 엄마는 냉장고 안에 넣어둔 빛의 목록을 더듬는다. 하루치의 빛을 서둘러 꺼내야 했다. 엄마는 차가운 문고리가 따스해질 때까지 문고리를 쥐었다가 확, 열어젖힌다.

 

아이인 엄마이고, 엄마인 너가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는 나를 한 뭉치 꺼내 준거고.

 

#5

 

삶을 연장하려고 자는 추운 잠.

 

나는 나를 잠속에서 꺼낸 기억이 없는데

누가 나를 한 뭉치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둔 것일까.

 

식탁에 앉아 가만히 녹아가는 나를 바라보다

별사탕 생각이 났다.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나면 엄마가 선물로 하나씩 주던 별사탕.

식탁에 올려진 유리병에는 별사탕이 가득하고

 

 

나는 별사탕 하나를 꺼내

아직은 푸른 새벽 같은 입안에 넣는다.

 

차가운 빛도 어둠을 녹일 수 있다고 믿는다.

 

점점 환해지는 나의 낯빛.

 

저는 이 낯빛으로 실온의 하루를 견디겠습니다. 

 

(냉장고에 엄마와 너를 다시 한 뭉치로 넣어두고 집을 나선다.)

 

 

#6

 

0000.00.00. 실온에서 일몰 30분 전까지. .

 

 

 

 

 

 

 

 

 

 

 

 

 

 

 

 

 

 

 

 

 

 

 

 

 

 

머리칼이 무서워서

장발을 배신한 장발 장

                                            김 광 호

 

한 달에 한 번 몸통이 잘리는 머리칼은 복수를 꿈꾸고 있었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시간에 한눈을 팔다가

하마터면,

머리칼에 두 눈이 찔릴 뻔했다.

 

한 번도 다 자라본 적이 없는 슬픔

울어 젖은 머리를 말리고

 

머리카락아, 너도 얼굴이 있니?

 

지금은 어떤 목소리도 없고 어떤 시선도 없지만

혹시 길러본 적 없는 어딘가엔.

 

머리카락은 몰래 자라는 일로

밤을 지새운다.

 

너는 밤마다 잠든 사람의 얼굴을 보며 무슨 꿈을 꿀까

첫 얼굴을 갖는 꿈 첫잠을 자는 꿈 첫 노래를 부르는 꿈

그런 꿈이라면 내일 싹둑 잘라 버릴 거야

미용실에 가서.

 

늦은 밤이었고,

장발 장씨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오늘 가위를 훔쳤고. 오늘은 꼭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했는데. 머리카락이 울면서 그러더라. 다시 자라 저주하겠노라고. 무서워서 그러는데 네가 내일 잘라주면 안되겠냐.

 

못된 사람. 장발 장씨. 혼자 죽지도 못할. 장발 장씨. 경찰에 신고해서 19년을 감방에서 썩게하고 싶다. 장발 장씨. 나도 머리카락을 잘라본 적 없는데. 이 파렴치한 사람이 나를 되돌아보게 하네.

 

매일 머리카락을 자르는 끔찍한 일을 하는 미용사에게

친절을 강요한 적은 없었나.

그런 밤엔 어딘가에 달라붙은 머리칼이 살을 찌르기도 했지만

 

그럼 먼지처럼 털어버리면 되는

 

아프지만 사소한 일.

 

‘그러니까 우리 털리지 않기 위해 가늘고 길게 살아야 한다.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놈은 찔러봤자 우리만 털리니까. 긴 머리카락처럼. 달라붙어도 따갑지 않게. 가늘고 길게.

 

(젊은 장발 장씨의 지론이었고,

우리가 중간에 싹둑 잘라버린 말이었으나.)

 

TV에서 삭발하는 여자를 보았다.

삭발하는 여자도, 머리카락을 깎아주는 사람도, 바닥에 힘없이 꿇어앉은 긴 머리카락 뭉치들도 전부 길고 긴 울음을 울고 있었는데. 짧은 뉴스였고. 멋진 광고가 나왔다. 은으로 만든 가위 광고가.

장발 장씨는 이 광고를 보고 은가위를 훔친 걸까.

 

결국, 머리칼에 눈을 찔리고.

 

털어내기 힘든

사소하지만 아픈 일.

 

내일은 중요한 일이 있는데. 미용실에 가서 단정해져야 하는데. 경찰서에 먼저 가야지. 살면서 잘게 잘라버린 가늘고 힘없는 피해자들에 대해 자백해야지. 너무 사소한 일이라 돌아가라는 말을 들으면. 머리칼을 들고 소리를 지르면서 사라진 은가위에 대해 자백해야지. 장 발장처럼 19년을 감옥에서 살다 나와야지.

 

그리고 장발 장씨의 머리카락을 깎아주는 사람이 돼야지.

 

짧은 뉴스가 끝난 뒤에도

그 일을 계속해야지.

 

다신 벌을 받지 않도록,

 

사소하지만

아픈 일들을.

 

 

 

 

 

공원의 백지화

 

                                  김 광 호

 

나의 어린 사촌을 데리고 근린공원에 놀러 갔던 날

 

‘형, 빈자리가 가득해.

 

사랑하는 어린 사촌을 달래주며

집에 갈까 집에 가서 우리 함께 빈자리를 채울까

 

오래된 문구점에는 흰 도화지와 예쁜 색깔 색연필이 가득하고

우리는 주머니의 동전을 모아 하얗고 예쁜 것들을 사고

 

집으로 간다.

 

흰 도화지와 12색의 색연필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신나게 흔들면서 달려가는

내 어린 사촌은,

 

언제 이렇게 훌쩍 커버린 걸까.

 

내가 오래전 놓친 손을 너는 이제야 놓으며

검은 양복 안에서 빛바랜 흰 도화지를 꺼내고

내게 보여주었지.

 

‘형, 집에도 빈자리가 가득해.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의 안부를 전하는

묘원의 풍경을

우리가 그날 그린 걸까.

 

공손히 모은 너의 손가락이

잃어버린 색 2

닳아버린 색 8

쓸모없는 색 2

 

12색 색연필 같고.

 

 

 

 

우리가 함께 그린 흰 도화지를

묘원 빈자리에 묻으면서

 

한 번도 같은 세대인 적 없는 우리는

같은 동요를 불렀지.

 

‘흰 도화지 줄게

새 도화지 다오.

 

구전 동요가 될 때까지

부르고 있었는데

 

너의 어린 사촌이 우리를 빈자리처럼 바라본다.

 

 

 

 

 

 

 

 

 

 

 

 

 

 

 

 

 

 

 

 

 

 

 

 

 

 

 

 

 

도장을 파는 일

                                      김 광 호

 

말하자면,

우리에게 걸음처럼 몸에 새겨진 계시 하나가 있다.

 

‘너는 너를 증명할 수 있는 도구를 구비하고 여기로 올 것.

 

 

여기에 찍으셔야 합니다. ()

저는 아직 지문도 도장도 없는 사람입니다만

 

컴컴한 창고에서 전등을 켜듯 문을 열었다가 섬광에 눈이 멀 것처럼 문을 닫았다가 희미하게 떠보는 눈처럼 다시 문을 열면,

찬란한 빛에 죄를 지은 기분입니다

 

빛의 날에 양각되는 기분입니다

자꾸 피를 흘리는 기분입니다

 

피 묻은 발자국으로. 아무도 걷지 않는 설원을 걸었습니다. 설원에 찍은 발자국이 겨울을 지속해도 괜찮다는 날인으로 간주 되었다면,

저는 그저 흰 눈에 속은 겁니다만

 

다만, 발자국을 훔쳐서 따듯한 계절로 달아난 흰 눈을 누가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흰 눈에 뒤덮인 나무와 흰 눈을 뒤쫓는 나는

누가 더 고된 삶입니까.

 

흰 눈에 찍히는 발자국. 이 발자국은 다음 발자국에 대한 보증이 맞습니까. 이 걸음이 다음 계절로 가는 걸음이 맞습니까. 겨울은 혹시 둥근 모양 아닙니까. 둥근 모양을 감추는 것이 혹시 흰 종잇장 같은 설원은 아닙니까.

 

저는 지금 발도장이 되어가는 중입니까.

 

발자국이 파여갈수록

발자국 없는 나무가 자라날수록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겨나고

 

 

말하자면,

이제 거의 도착한 것 같습니다.

 

여기 도장 있어요.

이제 나는 증명되었습니까

 

‘잠시만요, 당신이 사람입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라면,

저 설원에 잘 심어두고 왔습니다.

 

‘당신만 들어오세요.

도장을 잃어버린 저 나무는

들어올 수 없을 겁니다.

 

어차피, 두고 온 겁니다.

 

 

 

 

 

 

 

 

 

 

 

 

 

 

 

 

 

 

 

 

 

 

 

 

 

 

달려라 꽃게

                                    김 광 호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갔다.

 

연골이 다 닳았습니까,

퇴행성 관절염입니까,

 

의사 선생님은 지금까지 사용하던 무릎은

진짜 무릎이 아니라고 했다

 

꽃게의 무릎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환자분의 무릎은 측면에 있으며 게걸음으로 걸어야 할 운명이었다고 했다. 환자분은 지금까지 부러진 정강이뼈로 걸어왔다고 말하고. 어떻게 지금까지 버티셨어요. 조연이 병에 걸려 죽는 드라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멘트를 날리고,

 

오늘부터 게걸음을 배우라 했다. 자신이 갯벌에서 꽃게를 잡아 보았는데,

갯벌에서는 꽃게가 생각보다 빠르다는 말도 덧붙였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정류장에서 가만히 옆으로 걸어보았다. 앞을 보고 걸었는데, 내가 보는 방향을 앞이라고 해야 하나, 옆이라고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나는 옆이라고 믿었다. 옆은 방향에 동등하니까 걸음의 방향이 모욕이 되는 시간을 지울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으로,

 

오랜만에 친구에게 문자를 했다. 졸업하고 한 번도 가지 않은 학교 운동장에서. 이따 밤 10시에 봐. 절대 안 나오겠다는 친구는. 너가 죽을까 봐. 나는 나오는 눈물을 참으면서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다. . 어릴 적 달리기만 하면 넘어지는 나를 매번 놀렸었잖아. 골대에서부터 골대까지. 준비. . 나는 게처럼 달려서 사람처럼 달리는 친구를 이겨버렸고, 무릎을 꿇은 친구에게 세상은 진흙탕이라는 허세 비슷한 말도 한 것 같았는데,

친구는 웃고 있었고,

 

무릎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습니까?

.

퇴행성입니다.

 

 

여기 전동 휠체어에 앉아보세요. 이제 전동 휠체어 타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모욕의 방향을 가르치려는 듯 전동 휠체어의 뒷걸음질을 가르치던 그에게,

 

 

전동 휠체어랑 꽃게 중에 무엇이 더 빠를까요,

갯벌에서.

그때 안경을 고쳐 쓰던 의사는,

 

이 도시의 x-ray를 바라보았던가

해 저문 풍경을 바라보았던가

 

간척지 위에 세운 도시가 무너지고 있었다.

 

솟아난 속도로 빌딩이 사라지고 있었고, 빌딩의 무릎이 사라지고 있었고, 뒤따라 그의 들숨이, 그의 안경이 사라지고 있었고, 끝으로 이 도시를 촬영한 최초의 x-ray 한 장이,

석유를 뒤집어쓴 가마우지 한 마리처럼 갯벌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잊고 있던 얼굴의 꽃게들이 갯벌에 가득하고,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고,

문자가 왔다.

 

'운동장이었던 곳. 이따 밤 10시에 봐'

 

자세와는 별개로,

 

출발선에 서면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매일 처방약을 먹고

재활을 멈추지 않는다.

 

 

 

 

 

 

 

 

 

 

 

 

투명한 방패

 

「성벽은 불투명하므로 허물어질 것이다.

적군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죽어가는 숨결을 모아  

투명한 방패를 만든다네」

 

                                  김 광 호

 

 

유리창에 서서 몰려오는 백만 빗방울을 바라본다.

 

백만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면 실금처럼 번져가는 물줄기들. 이 비에 유리창이 깨지면 나는 이제 죽게 될까. 눈을 감으면 두려움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어둠의 더께 앞에서 얼마나 많은 졸개들이 죽어갔나.

나는 깨트리기 쉬운 성벽 앞에 서 있다. 나를 향해 달려드는 나를 비춰보려고.

 

창밖의 개는 왜 비를 맞고 있나.

 

안경을 쓴 사람과 싸울 때. 주먹으로 눈알을 때리는 것보다 안경알을 때리는 것이 더 치명적이래. 유리 조각이 눈알을 파고들면 실명할 수 있거든. 어디선가 주먹이 날아든다. 잠시 후 안경이 깨지면 나는 이제 실명하겠구나. 그때 TV를 가까이서 보지 말 걸 그랬네.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음식을 먹을 걸 그랬어. 너보다 미운 건 안경을 쓴 내 모습이었는데. 네가 달아나지 않았다면 나는 네게 감사의 말이라도 전할 것도 같았는데,

 

창밖의 젖은 개는 왜 실명한 사람이 부르는 손짓에도 달아나나.

 

실명한 유리창이 실명한 사람을 지키는 동안에 창밖에서 실명한 참새는 실명한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다.

실명한 안내견이 실명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가능할까.

 

죽은 참새를 수습하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지금까지 바라보던 불투명한 풍경이

열리는 창문을 따라 사라지고 있었고,

 

창문 밖엔 눈이 밝은 동물들과  

눈부신 오후만이 남아있네.

 

방이 역설의 햇살에 깊이 찔린다.

 

 

정화식물이 살아나려고 한다.

숲과 불의 소년2)

 

 

# 포스터에 대한 단상

 

이런 건 어떻습니까.

 

웃고 있는 한 남자가 있고,

그가 불 지른 숲.

 

이런 배경과,

 

불과 함께

불길을 따라

마을로 돌아가는 중이다.

 

이런 문구는.

 

 

# 프롤로그

 

숲에서 나무가 자랐다.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은 묘연하고, 길 잃은 아이가 자랐다. 멀리서 보면 숲은 푸르고. 푸르른 숲이라. 푸른 숲은 슬픈 아이를 감출 수도 있고.

 

‘제발 살아있어 줘.

 

숲속에 퍼지는 마을의 기도 소리.

 

주일에는 예배를 드려야지.

길 잃은 아이 너도 기도를 올려야지.

 

구원과 구조는

지극히 사적인 일이란다.

 

 

 

# 삭제 장면1

 

 

이 아름다운 세상.

 

. . 불 질러 버릴까.

 

침을 뱉듯. 바닥에 뱉는 마음들이 있고. 길을 잃고도 길을 걸었다. 주위에는 푸르른 잎사귀 같은 얼굴. 얼굴들은 높고 울창하고. 저 빛은 바닥에 도달하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가장 진화한 식물은 분명 저 바닥에서 자라고 있는 양치식물일 거야.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을 중얼거리고. 저 커튼은 어떻게 하면 활짝 열 수 있는 걸까.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들을 모르게 되면 점점 불안해져. 점점. 방의 그늘이 쌓이고 난 매립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이 방에도 환한 빛이 들어올 테지만. 그건 누군가 거대한 드릴을 들고 나를 채굴하러 오는 기분이겠지.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나는 숲을 울창하게 만드는 연료로 쓰이게 될까.

 

(그때 요정을 생각했다. 숲의 요정은 숲을 숲답게 만드는 작은 연료라는 생각과 함께. 실은 요정도 하나의 벌레나 식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곁들이고. 땅속에 묻힌 요정도 까만 석탄이나 석유가 되는 건지 궁금해하면서. 숲의 요정을 처음 보았다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나에 대하여.)

 

이 방에서는 양치식물도 쉽게 죽고

다시 자란답니다.

 

 

# 삭제 장면2

 

야윈 사람은 성냥을 닮았어. 아스팔트에 머리를 그으면 불이 확 붙을까. 숲에서 뛰쳐나온 짐승이 차에 치여 죽는다. 난 머리를 숨기고 숲을 벗어나지 않는다. 여전히 마을에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기도 소리. 살아있어 줘. 제발 살아있어 줘. 난 여전히 숲에서 살고.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 성냥이 되어가는데. 구호 물품처럼. 간혹 숲에는 붉은 열매와 갓 죽은 짐승의 따뜻한 고기가.

 

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 숲의 연료를,

 

방바닥에 버렸더니

방바닥이 묘연하고

# 삭제 장면3

 

기도하는 밤에. 숲에 가본 적 있니? 사람이 가장 나약한 존재인 시간을 겪어본 적이 있어? 성냥갑 안에 남아있는 단 하나의 성냥보다 나약한 존재인. 그 시간의 우리는. 주위에 부러진 나뭇가지와 마른 낙엽을 모아 단 하나 남은 성냥을 던지지.

 

 

나는 불장난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싸지 않습니다.

 

 

조난자의 신호

발견되기 위한 몸부림.

 

불길이 거세질수록

구조는 어렵습니다.

 

 

# 에필로그(감독판)

 

 

커튼에서 시작된 불이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있다.

 

석탄 같은 몸으로 마을 어귀에서 울고 있던 나를

어디론가 싣고 가는 사람들.

 

드디어 그 외롭고 거대한 숲에서 벗어난 걸까.

 

길 잃은 아이가 마을로 되돌아왔는데

기도 소리는 왜 멈추질 않고

더 거세지나.

 

마을 사람들은 왜 숲을 위해 기도하고 있나.

 

길을 잃은 적 없는 저

마을의 사람들은

 

누굴 저주하나.

# 에필로그(극장판)

 

저는 오래도록 편지를 씁니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사과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지극히 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당신 말마따나

다시는 불장난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닫아준 커튼을

다시는 활짝 열지 않겠습니다.

 

 

(#쿠키 영상)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가장 먼저 자라나는

양치식물.

 

양지바른 곳으로 번지고 있다.

 

마을이란 게

정말 있기는 한 걸까.

 

 

 

 

 

 

 

 

 

 

 

 

 

 

 

 

 

 

 

 

 

 

 

젖는 종이

                             김 광 호

 

검정 잉크 몇 모금을 적시기 위해 마른 종이는 얼마나 기다렸던가 탁자위에서.

 

새까맣게 그리고 여백 없이 적히기를 그러나 나락은 여지없이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우기면서 몰려오고

떨어지는 종이는 삶의 여지를 붙들기 위해 바람을 따른다

 

메마르고 두꺼운 종잇장에 눌려 있던 시간들만 아니었어도.

 

가혹한 우연이구나 어쩔 수 없는 흔들림이구나.

바람이 공중에서 쓰는 비평들

 

메마르지 않으면 기록될 수 없다는 뾰족한 것들의 뾰족함 속에서

어차피 내일은 다시 흰 종이를 찾는 그들의 풍습 속에서

나는 가만히 순장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가.

 

비가 내린다

누군가 웅덩이로 미끄러지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인부들이 퍼 담는 한 삽의 흙처럼 내린다 투두둑 투두둑,

몇 번의 삽질에도 금새 빗물에 묻히는 종이의 얇기

     

젖은 종이는 종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종이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요? 젖은 저는.

 

밤새도록 흰 종이에 새까맣게 써 내려간 질문은 떨어지는 빗물에 해석할 수 없는 추상화가 되어버렸는데.

우연의 기법을 창시한 거장, 바람이 분다

매우 여리게 매우 세게 또는 매우 아무렇게

 

젖은 종이가 말라가고 있다

아무렇게 구겨지며 마르고 있다

 

오래 너부러져 있다 일어난 몸에는 구김이 많았다

 

별거 아니라는 듯 툭툭 털어낸다

 

타성에 젖어들고....

만다.

 

정거장에 간 사람

                           김 광 호

 

정처 없이 걷는,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처럼 저에게도 목적지가 있습니다

부모님께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하고 지도도 챙기고 물병도 두 개나 챙겨서 집을 나섰습니다

 

저는 매일 정거장에 갑니다

 

목적지에 가려고 버스를 타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게

이웃집 사람을 욕하면서도 매일 이웃집 사람을 만나러 가는 우리 할머니의 마음과는 어딘가 비슷하게,

 

저는 서성일 목적으로 정거장에 갑니다

 

여러분도 한번 와보셔요

정거장은 서성대는 사람들의 회관입니다

 

정거장에는 도달하려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로 붐비고

그 곳에서 저는 유일하게 도달한 사람이 되어봅니다

 

정거장에 가면 초조한 표정이 이상하지 않고 멈춰선 것이 이상하지 않고

더 먼 곳을 가기 위한 사람 같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남자 같고 내일도 마주칠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눈앞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도로가 있고.

 

사람이 살지 못하는 도로는 강물 같습니다

두 발로 서 있을 수 없는 그런 강물 같습니다

 

챙겨온 지도와 물병 하나를 꺼내 지도에 그려진 도로를 물로 칠해봅니다

그럴수록 강물은 늘어나고 이재민이 늘어만 가고

이재민이 불어난 강물을 보듯 저는 도로를 바라보았습니다

 

 

환자를 싣지 않은 구급차가 정거장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급차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남은 물병 하나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칠일입니까?

 

저는 여태껏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못 했는데

이렇게 며칠을 지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정거장을 지나치는 행인에게도 저는 발견되지 않을 겁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 정거장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처 없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정처는 인적이 드믄 종점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둠이 자궁 속이라면 좋겠네

                                  김 광호

 

소년은 몇 년 째 기지개를 켜지 않는다

 

빛을 막아서는 커튼은 주름이 접힌 채 절벽처럼 서 있다 출입을 막아서는 방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시계는 벽에 목을 매달고 죽어있다 소년은 시계의 건전지를 거꾸로 쑤셔 넣고 죽은 시간을 거슬러가는 중이다 소년은 숫돌에 갈린 듯한 날선 눈으로 어둠을 베어내며,

깊숙한 소년의 창세기를 향해 가는 중이다

 

어둠 속을 막 빠져나온 태아의 탯줄이 끊긴다 태아는 썩은 동아줄을 잡고 떨어지는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다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을 거꾸로 세워 때린다 푸른 멍이 은밀한 부위에 새겨진다 태초의 말을 지우려는 듯 울음과 괴성을 철자로 하는 말을 잠재운다

풍만한 젖가슴으로, 혼동의 젖꼭지로, 돌지 않는 초유로, 침묵의 순간으로.

소년은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벌어진 어둠 속으로 끊어진 탯줄을 타고 기어들어간다 쉽게 허락되지 않는 어둠 속으로, 감출수록 깨끗해지는 어둠의 상징으로, 성모의 그 곳으로. 소년은 최대한 깊숙이 밀어넣는다 하얀 밤을 사정하던 자정에, 자정의 언어로 쓴 짧막한 쪽지를.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자궁을 주세요

어둠이 순수의 상징이라 믿을 수 있는

고통이 창조의 생리라 믿을 수 있는

소녀들이 살아가는 밑천 같은 자궁을.

 

밋밋한 가슴이 부풀고 방안에는 태초의 빛이, 막막한 커튼을 뚫고 들어온 한 줄기 빛이.

침대를 벗어나 축 늘어진 손에 와 닿는다

 

손을 둥글게 말아 둥근 어둠을 만든다 둥근 어둠 속으로 빛이 들어서자

남자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자작나무 가지 피듯,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어둔 숲의 자작나무*

백야의 수피를 두르고

 

 

오월을 기다린다.

 

 

1984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 경인교육대학교 졸업. 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받음. 2020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현재 초등학교 교사, 글발시인축구단 회원.

 

 

 

 

 

 

 

 

 

 

 

 

 

 

 

 

 

 

 

 

 


1)  페름 – 러시아 페름주의 주도. 고생대 마지막 기()이자 대절멸의 시기인 ‘페름기’의 화석이 처음 발견된 도시. ‘페름기’는 이 도시의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2)  나의 첫 독립영화 시나리오. 제작자를 구하는 중입니다. 미발표작이라는 뜻.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편집할 의향 다분히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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