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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이데아 외 1편/ 박희연

이경애 기자 | 입력 : 2021/03/02 [11:05] | 조회수 : 59

 

 

 

 

 

꽃의 이데아

 

 

 

인상 깊은 철학 사조가 있다면?”

얼떨결에 플라톤의 이데아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얼핏 웃으며 책상 위 꽃병을 눈짓했다.

가령 꽃에는 꽃의 이데아가 있고

삼각형에는 삼각형의 이데아가 있지요.

그럼 본인이 다닌 고등학교 이데아는 뭘까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난

몇 마디 떠듬거리다가 얼버무렸다.

 

건널목에 줄지어 점멸하는 신호등

어김없이 울리는 라디오 시보

차도로 갑자기 뛰어든 고라니

!

난 곧잘 넘어졌다가 일어났지만

꽃의 이데아와 삼각형의 이데아는

여전히 내가 춤출 수 없는 언덕

무엇을 안다고 말하려는 혀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를 아득한 이데아에 던져버린다.

- 난 매일 모른다고 자복하는,

버리고 찾고 버리고 찾다

끝내 버려지는 무녀

그 일생은 세 개의 꼭짓점을 잇고 이어

그 사이 꽃밭 하나 가꾸는 것

한 꼭짓점에서 다른 꼭짓점으로 가는 길은

산처럼 너무 높고 강처럼 너무 깊어

삶의 가장자리만 더듬고 엿보다가

정작 발밑에 떨어진 씨앗 하나 보지 못한다.

 

건널목에 줄지어 점멸하는 신호등

어김없이 울리는 라디오 시보

다시 봄에서 봄으로 가는 길에 아, 꽃이 없다.

 

 

 

 

밥물

 

 

 

 

불리지 않은 쌀로 밥을 지을 때는

손등이 잠길 만큼 밥물을 부어야 한다.

그것을 모르던 때에 난

쌀을 불리든 불리지 않든

늘 손등이 잠기지 않게 물을 부었다.

밥물은 종종 끓어 넘쳤고

밥은 설익거나 까맣게 탔다.

 

불린 쌀 위에 외딴섬처럼 손을 얹는다.

그 섬이 잠기지 않도록 물을 붓는다.

가끔 홀로 날아드는 갈매기처럼

넌 내게 와 한참을 누웠다 간다.

교복을 입고 찾아온 넌 하품하며 말한다.

카네이션 샀는데 줄 수 없었네.

가스불이 켜지고 밥물이 끓어오른다.

장난감을 사들고 너에게 건넬 날을 기다린 적 있었어.

거품을 문 밥물이 솥뚜껑을 들썩거린다.

입학식 전날 네 교복을 반듯하게 다려주고 싶었지.

지난날 밥물은 수없이 흘러넘쳤으므로

더는 넘치지 않게 불을 줄인다.

 

들끓는 슬픔이 가라앉으면 밥 짓는 냄새가 난다.

자작자작 뜸 들이는 소리에 맞춰 넌 얕은 코를 곤다.

이제는 나보다 키가 커버린

너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어본다.

너는 푸우- 큰 숨을 내쉰다.

불을 끄고 위아래 밥을 섞는다.

밥알을 풀어주듯 네 어깨를 살살 흔든다.

밥 먹자.

구겨진 옷자락을 펴주며 너에게 숟가락을 건넨다.

 

 

 

 

 

 

박희연

2017<35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시 부문 장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국제융합예술대상> 작가상 부문 수상 (국제융합예술협회)

2014년 세월호 단편영화 <다녀오겠습니다> 기획제작

2019년 천안춤영화제 개막작 <탱고다이어리> 각본

2020년 사북항쟁 40주년 기념 뮤지컬 <사북, 화절령 너머> 대본

2021년 현재 다큐멘터리 <백제의 마지막 밤> (가제) 대본 집필 중

2021<상상인>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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