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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도 눈이 내린다

허갑순 시인 | 입력 : 2021/04/13 [07:43] | 조회수 : 45

4월의 눈

 

허갑순

 

꽃들의 얼굴이 무거워서

멈추어 섰는데

거기서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4월에도 눈이 온다

 

꽃들은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부릅뜬 두 눈에서 푸-ㄹ풀 담배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세찬 바람과 함께 꽃을 비벼서 끄자

눈은 4월에도 내렸다

 

눈은 차창을 때리고 지나간다

한참이나 지난 봄이지만

다시 한번 발길을 돌리다가

분명, 4월은 눈이었다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꽃들이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눈은 한길을 가로질러 내게로 온다

4월에도 눈꽃이 핀다. 딱 한번

 

겨울이 도도하게 자리를 잡고 지나가고

 

 

 

바람의 유서

 

허갑순

 

고독하지 않기 위해

그곳을 떠나왔다

어지럽게 발자국이 찍히고

키 큰 나무들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

날개가 없어도 안녕하다

빗장을 여는 손도 단단하다

언젠가 마지막이란 말을

함부로 발설했을 때

나조차도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너를 만질 수 없어서 종이를 꺼낸다

편지를 쓸 수 없어서 그저 흘러

보내는 것으로 안부를 대신한다

나는 너의 틈새를 무수한 소리로만

기억한다

 

바람이 그쳤다

 

 

 

네잎클로버

 

허갑순

 

허공에서 손사래를 치다말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굳어진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시간들이 땅위를 기어 다닌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나무들이 마지막

숨을 고르고 살아있다는 것들의 미소가

잔인하다 웃을 수 있다는 잔인함, 주검들이

널부러진 나뭇가지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퀭한 시선과 잔인한 미소가 교차하고

네 잎, 심장이 네 개인 클로버가 거기, 있었다

삶은 아직 유예하다 내 몸도 아직 멀쩡하다

그런데도 내 영혼은 천금처럼 무거워 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를 앓고 있다

아침부터 뿌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린다

전기 톱날이 태풍 볼라벤을 베는 날에도 나는

멀쩡하게 책을 읽었다 창들이 휘었다

문이란 문은 모두 굳게 닫혔다 나도 나를 닫아걸었다

클로버 네 잎을 행운이라고 정말 믿고 싶다

무거운 시간들이 손끝에서 자유롭다

향기로운 영혼들이 어두운 세상을 마구 날게 하다

작은 몸들이 나를 들어 올린다 간지럽다

날개가 여러 개다

행복한 것일까

키 큰 아카시아 나무가 전기 톱날에 무너졌다

이미 지난밤에 삶이 끝나 있었다

 

 

 

 

<시인의 말>

4월에도 눈이 내린다

 

허갑순

 

 사람들과의 관계는 얼마나 허망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가. 어느 날 유리알처럼 투명하다고 생각했던 생각들이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내 앞에 버티고 서있다. 아무하고도 제대로 된 관계 형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요즘 부쩍 느끼고 있다. 제 자신과의 대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 내 자신의 속마음조차 제대로 조우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오늘따라 강렬하게 내 의식을 자극한다. 나는 누구일까 아니 누구일까 자체도 더 이상 묻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오랫동안 갇혀져 있는 알 수 있을 것도 같은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어떤 욕망의 실체를 의식하고 싶지 않은 것일 것이다.

 

 여우눈일까 여우비는 그림이 그려지지만 여우 눈은 어쩐지 어색하다. 4월의 눈이라니....아침에는 함박눈이 퍼붓다가 금새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지다가 다시 진눈개비로 바뀌어 바람과 함께 천지에 요동치고 있다. 4월의 눈은 이야기꾼이 아닌 것 같다.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가 서있는 계절은 4월이다. 4월에 내리는 눈은 무지하고 후안무치하다. 4월의 눈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아무 일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바람을 휘어잡고 있는 눈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제 스스로 자멸해버리고 그 흔적도 사양하고 있다. 욕심만 들어차 있을 뿐 무엇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도 허용하지 않았다. 7년이나 된 야자수 나무가 눈발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어버렸다.

 

 눈이 또 그쳤다. 작은 알갱이들이 부스스 허공에 날릴 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리 퍼붓던 눈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인지 자꾸 창밖을 내다본다. 오늘도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 생각만 우물 속에 갇혀있는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욕망과 똑같은 생활이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변하지 않는 적어도 표면에 드러난 겉모습은 차분하고 평온하고 안이한 일상, 즉 늘어지고 평화로운 일상을 원하고 있었고 그렇게 평화스러워지고 있다.

 내 안의 격정의 바다는 차츰 밋밋하고 잔잔한 물결로 탈바꿈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 중년의 한 풍경인 것일까. 온통 자신을 집어 삼킬 것 같았던 그 뜨거운 욕망들은 다 어디로 꼬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4월의 눈처럼 내가 주저 않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내렸던 내 자신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생각들은 어디로 행방을 감춘 것일까. 끝없이 요동치던 바람들이 드디어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바람이 그치면 그것은 바람의 허망한 죽음일 것이다. 그래서 바람은 죽지 않기 위해 실바람이라도 끄덕여 줘야한다,

 

 흔들리는 존재, 자꾸 벗어나려고 하는 존재, 어딘가 좋고 높은 곳으로 향하려는 존재, 따뜻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으로 향하려는 존재, 그리고 어둡고 황량한 한 곳에 적당히 다리를 내려놓고 있는 존재, 여자가 하얀 소복을 입고 하얀 버선발로 허공에 매달려 있다. 긴 손톱에는 하얀 메니큐어가 투명하게 반짝이고 하얀 입술에는 하얀 립스틱을 바르고 하얀 분칠에 하얀 이마를 들어 올린다. 하얀 눈동자가 하얗게 꿈틀거리고 하얗게 정지해 있다가 달려간다. 무대는 없었지만 여자는 자꾸 무대를 흉내낸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는데도 여자는 자꾸 누군가를 의식한다. 의식하는 여자가 의식하는 여자를 의식한다. 백치미가 돋보이는 여자가 그냥 허수아비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찬다. 나는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야기꾼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모호하고 불투명하며 겁쟁이고 확실하지 않다.

 다시 눈발이 약해졌다.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일까.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고 4월의 눈밭에서 네잎 클로버를 찾고 있다. 아직 얼지 않았다.

 

 

 

 

 

 

▶허갑순

전남 순천.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와 산문(1995)으로 문단에 올랐으며, 2회 서울시인상, 4회 국제한국본부광주펜문학상, 16회 광주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그저 꽃잎으로 번져나갔다7권과 현대시의 시간과 공간인식2권 평론집이 있다. 전 조선대학교 동신대학교 외래교수 현 한국연구재단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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