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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는 외 9편 / 하기정

이경애 기자 | 입력 : 2021/04/16 [15:49] | 조회수 : 177

 

 

 

 

 

 

접는 

 

 

접으면 나는, 날아가는 비행기

접으면 너는, 너라는 배

- 이 종이배를 밀고 바다로 나아가야 해

다리를 접으면 생기는 무릎

접으면서 주저앉는 의자

의지할 데라곤 여기밖에 없는데

- 이 통증을 베고 누워야해

재채기 한 번 했을 뿐인데

우산을 접으면 줄줄 새는 물

나에게 아름다운 상처를 준

고양이의 발톱을 그러니까 사랑하자

이 고요한 은신처 안에서 비밀의 상자를

접는 일밖에는 빈 상자 안에

빈 상자를 채워 넣는 일 밖에는

 

두 점의 폐곡선이 만날 가능성보다

당신과 나란한 평행선이 만날 수 있기를

접는

 

 

 

젠가의 모든 것

 

 

너의 빈틈을, 물이 새어나와 바닥이 흥건하게 젖는 것을

우리는 좋아하게 되었다

 

미끄러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안간힘으로 중심을 잡으려는

몸짓을 좋아하게 되었다

 

규칙은 정해져 있었지만 낯설고 위험한 세계를 더 좋아했다

 

우리들 중에 누군가 벽을 무너뜨리는

조심스러운 손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거짓말 같은 균열을, 물이 새는 걸

아무도 모르게 들춰내리라 믿고 있었다

 

상상은 상상 밖에서 실현되기를

쌓고 무너뜨리는 일이 다시 쌓아야 한다는 축복을 믿었다

상 밖의 일은 의외로 아름답게 몰락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머니 속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동전처럼 골똘하게

이 세계가 생각보다 빤하고 환한 구멍이어서 시원해보였다

처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우리들의 손은 많았으나 누군가 먼저 그것을 무너뜨렸을 때

문이 없는데도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구멍

 

 

맨홀 뚜껑은 위태로운 배꼽입니다

텅텅 울리는 빈 뱃속을 들어가 보는 일이란

숨을 불어 넣는 일이어서 식도에서 직장까지

세상의 모든 길을 뚫고 가겠다는 야망이 숨어있죠

담장 밑에 뚫린 뱀 구멍처럼 꿈틀거리며 말입니다

 

터널 속에서는 꿈이 반 토막 나기도 합니다만

구멍을 빠져나온 순간 나무 한 그루가 순식간에 뽑히기도 합니다

금지된 상상을 하면 풍선처럼 가벼워지죠

 

숲 밖으로 빠져나와도 나무들이 줄지어 따라옵니다

구멍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쥐가 더 큰 구멍으로 들어갑니다

고양이는 고양이를 빠져 나와도 야옹, 하고 웁니다만

도넛은 구멍 안에서만 도넛인 채 합니다

 

섣불리 구멍을 막아버릴 수 없는 까닭은

구멍들이 간혹 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어도 맷돌은 돌아가고

구멍도 단단해지면

꽃나무 한 그루 쯤은 피워 올릴 줄 아니까요

 

머리도 꼬리도 없이

앞뒤가 바뀐 변명 같습니다만

 

혀는 침의 맛을 모르고 식도에서 직장까지

나는 나를 빠져나와도

사람인 척 합니다

 

 

 

구름의 그늘

 

 

구름에 그늘이 있다는 거

혼잣말이 혼잣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꼭 땅콩버터를 바른 쪽에만 바닥에 떨어진다고 생각할 때

오래된 할머니방의 장판을 열었을 때 웅크리는 콩벌레에게

너도 나처럼 다리가 짧아서 굴러다니는구나

나도 모르게 크게 뱉어버린 혼잣말을

콩벌레에게 들킬 때

 

구름에도 그늘은 있는 거

네가 거기에 있어서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온전하게 짙어질 때

우연히 닿은 자작나무의 어깨에 슬픔이 밀려올 때

슬픔과 결핍과 분노의 화해들이 망초 꽃처럼 흔해질 때

불안이 슬픔과 화합하지 못하고 구름다리처럼 흔들릴 때

 

내가 첫사랑이었다고 우겨대던 그에게

시트에 핀 붉은 꽃은 생리혈이었다고 말할 뻔한 순간에 대해

너와 내가 마셨던 뜨뜻미지근한 토마토주스에 대해

 

구름에는 그늘만 있다는 거

애도의 유통기한이 발각될 때

잠수함에 돌덩이 하나를 집어넣고

수압이 이토록 무겁게 나를 지탱해주는 거라고 믿을 때

 

열기구의 모래주머니를 지상으로 떨어뜨릴 때

가벼워진 몸이 까마귀와 눈높이를 맞출 때

시신을 운구하는 검은 행렬 뒤로 무지개가 뜰 때

오래 전과 멀리는 同語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

 

 

 

가로등

 

 

체념이라는 말에 우레가 들어앉아 있다

밤의 귀를 막으면

달팽이가 귓바퀴를 갈고 지나가는 소란들

 

고백이라는 말에 오늘 저녁 먹다 흘린

그릇들이 포개져있다

목줄을 끌고 주인보다 먼저 집에 도착한 개처럼

끝내기 위해 시작하는 연인들의 단단한 새끼손가락처럼

 

발밑의 불빛은 세로로 서 있는 사람들이 납작해질 때까지

그림자를 물고 늘어진다

가로수와 가로등이 조응하는 것에 대해

발밑의 시선에 대해

너도 그렇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고

 

매일 저녁 길을 지우며

길 안에 길을 도사리고 있는 돌멩이

용수철처럼 경쾌한 탄력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떨어지는 유성우를 함께 목격했다는 이유로

우리는 사랑하기에 충분했다

 

불빛들이 뒷목을 상상하는 일에 대해

검은 눈들이 쏟아져 내려

발밑에 길들이 명백하게 지워졌다

 

그림자의 체념에 대해 간격을 재면서

어쩔 수 없이 쏟아진 길의 목덜미를 힘껏 껴안으며

적당한 거리에 서서 지치도록 서로를 비추고 있다

 

 

 

유리창

 

 

너는 다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팔을 뻗는 대신 눈을 다 주겠다고

바깥의 불행을 모두 쳐다보겠다고 말한다

 

이쪽 풍경이 저쪽 풍경을 보고 말한다

보고 싶었어,

몰랐구나, 오랫동안

보고 있었어

그곳은 안전하니?

네 그림자를 데리고 나온다면

괜찮을 거야

거기 비가 오는 게 보여?

거기 손을 뻗는 게 보여!

벌레들의 등이 젖는 게 보여?

등이 굽어서 우산이 되어주는 게 보여!

다닥다닥 매달려 있는 것들이

이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들이

 

너는 바라는 것을 다 보겠다고 말한다

바라는 것은 멈출 수 없고

창밖의 일처럼 보이고

너머를 다 보아도

깨지기 전에는 만질 수 없는 것이고

 

만질 수 없는 것은 건너편에 있고

깨지면 풍경들이 모두 찔리겠지

너는 찔려서 바깥의 모서리를 만져보겠지

그러면 너는,

다 가져가겠지

 

 

 

그 여름의 감정

 

 

풀무치와 방울벌레가

모두 다 와서 울고 갔다

그건 여름의 일이니까

 

꽃범의꼬리꽃 속으로

박각시나방은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유로

마당에 구름을 잔뜩 흘려놓고 갔다

 

이 풍경의 꽃다발에 물을 줘야 한다니

무럭무럭 피어서 마당을 다 덮겠지

구름은 울어서 떨어지겠지

 

구름을 웅크리는 일은 무릎의 자세를 반성하는 일

그건 여름의 일이니까

 

아무리 꾸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악몽

모두가 웃어야하므로

내가 너 때문에 웃어줄게

 

뾰족하게 연필을 깎아 쓰면

네 이름마다 구멍이 뚫리겠다

이름은 구멍 속으로 사라지겠다

 

처음부터 여기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

풀밭에서 양을 세는 동안

누가 와서 다 가져갔다

 

모두 다 울어야하므로

검정색 물감을 다 쏟아놓고 갔다

 

 

 

내 몸이 책갈피에 끼어들어갔다

 

 

이 무슨 절망도 희망도 없이

 

다행히 나에게도 몸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빌려온 책 속에서 책갈피로 딸려 나온

머리카락이 누군가의 간절한

몸으로 읽혀질 때

 

그 몸이 나에게 결핍되어 있기라도 한 듯

내게 온 흰 빛처럼

거기 있으므로 오직

검은 셔츠에 붙은 실오라기의 흰 표정으로

발각되기를 기다리듯

 

누군가의 간절한 몸으로도 의탁할 수 없을 때

배꼽의 어디쯤

겨드랑이의 어디쯤

잠깐 다녀간 사람의 앉았던 자리 같은

마음이 나갔다가 되돌아온 곳에

표지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이 무슨 패배도 없이 폐허도 없이

 

읽다만 페이지에

푸른 금 같은 밑줄로

나는 잠깐 끼어들어갔던 것이다

 

 

 

마트료시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네 속에도 네가 너무나도 많아

우린 열 개의 손가락으로도 모자라

 

발가락까지 동원해가며 점을 쳤지

고만고만한 얼굴의 미래에 대해

겨우 지탱하거나 헛짚거나

미끄러지는 연습을 하면서

 

밤 속에도 밤이 너무도 많아

회색부터 시작되는 검정의 농도들

 

빗줄기 속에는 빗줄기가

눈물 속에도 눈물이

내리는 비만 비가 아니어서

울음은 흐르는 물로도 모자라

 

얼굴에 넘치고 흘러내리는 것이

당신만이 아니어서

겹겹이 젖은 얼굴로

 

말 속에는 말들이 너무도 많아

벗기고 벗겨도 넘치거나 모자라

더 이상 끓지 않는 100의 물에 대해

냄비뚜껑을 들썩이면서

 

점점 작아지는 얼굴들

 

기름기는 끼리끼리 띠를 두르며

마블링을 그리면서

 

점점 멀어지는 얼굴들

 

내 속엔 내 얼굴이

네 속엔 네 얼굴들이

 

 

*가요 한 구절

  

 

 

모로 누운 사람

 

 

너는 산처럼 모로 누워 내가 잠깐 동안 빌려 간

당신의 어깨가 결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심장과 가까운 왼쪽을 바닥에 대고

그 겨울 찬 강물이 폐에 차오르는 걸 생각했다

당신은 오른쪽 어깨를 바닥에 대고

 

한 번은 너무 아래까지 내려온 별의 모서리가 찌른다고도 했다

쏟아진 별과 비스듬히 흘려보낸 말들로부터

균형을 잡느라 비집고 들어온 마음자리가 떨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 그늘의 깊이를 헤아려보는 것이었다

 

감정은 손가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처럼 털어내기를 좋아해서

당신의 오른발로 나의 왼발을 지탱하는 습관이 버릇처럼 생겼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꼭 옛날사람 같지만

 

꽃은 절대 지지 않을 것처럼 피고

당신은 절대 가지 않을 것처럼 온다

 

아주 오래 전 방울 소리를 내며 문밖을 서성이며

당신의 절반을 다 내어줄 것처럼

끝내 돌아눕지 않을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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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정(河基正) 시인

영남일보 신춘문예 등단

5.18문학작품상

작가의 눈 작품상

불꽃문학상

시집밤의 귀 낮의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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