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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무언詞

이화영 시인 | 입력 : 2021/05/03 [09:56] | 조회수 : 80

 

 

 

 

라일락 무언

 

 

 꽃을 보면 코를 묻는 습관이 있다. 늘 그 꽃이거나 낯선 꽃을 만났을 때 그렇다.

 꽃들의 개화시기가 빨라졌다. 올해는 라일락꽃이 한 달 정도 빠르게 온 것 같다. 라일락 개화 시기는 빠르면 4월 말이나 5월이었는데, 올해는 일찍 피어 낙화분분하더니 5월 초에 모습을 감추었다.

 

 서둘러 온 탓일까. 라일락 향이 여느 해에 비해 진하지 않았다. 골목을 채우고 봄을 알리던 아주 작은 꽃이파리의 체액은 어디로 간 걸까. 저들의 의식이 향하는 대상이 사라진 걸까. 절절한 지향은 빛을 잃은 것인가.

 

 그저 바라볼 수 만 있어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리 없이 흔들리며 전하던 무언는 빗장 걸었나.

 

 며칠 앓은 핼쓱한 볼로 해시시 손 흔들던 표정을 잊을 수 없는데, 같이 따라오던 너의 모든 것들이 달빛에 남긴 기호를 잊을 수 없는데,

 

 너는 그대로인데 나만 틀린 것인가. 봄이면 나의 전부였고 하나였던 인연이 바람 따라 가버렸다.

 

 너는 갔지만 다음 봄에도 나는 너를 찾을 것임을 안다. 어쩌면 너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았으며, 가지도 오지도 않았는지 모른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눈부처가 되어 오가는 나를 무심히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젖은 캣츠 아이, 릴리의 안부가 궁금해

 

이화영

 

 

라일락 그늘 아래 내 고양이 보러간다

이 길은 서천(西天)에 드는 길

흰 빛이 감싸고 있는

태생부터 눈빛 선한 이들이

무릎을 맞대고 물푸레나무 이파리로 흔들리는 곳

사랑과 이별을 한 날에 치른 내 고양이 릴리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솟구치던 꽃들의 열기가 식고

목요일에 바람이 불면 라일락 나무에 수액이 차오를까

우연하게 꿈틀거리는 잔등이 눈부신

릴리의 흑요석 눈동자는 극약

텅빈 눈이 아파요

저 눈을 내 혀로 보드랍게 핥아주면

그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만나 따뜻한 숲이 될까

서걱거리는 몸짓들이 잎처럼 나부낄까

목을 쓰다듬어 주는데

낮은 음률이 손길을 타고 온다

타던 꽃잎들이 쏟아지던 날

날 두고

어둠 속으로 어둠 되어 떠난 길은 안녕한지……

젖은 캣츠 아이

릴리의 안부가 궁금해

 

 

-이화영 시집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한국문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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