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어머니의 바위/ 최장호

이경애 기자 | 입력 : 2021/06/15 [10:11] | 조회수 : 45

 어머니의 바위

 

 최 장 호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우리 형제자매의 바위였다. 또한 우리 5남매는 어머니의 콩나물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거대한 바위처럼 변함없고 의연하시며 평온하고 미더우시었다. 그런 탓인지 나는 지금도 바위를 보면 어머니를 대하는 듯하고 아련한 향수를 느낀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아있고 국민 모두가 어렵고 굶주렸던 시절, 나는 충남 예산 어느 산자락 아래 외진 곳에서 자랐다. 그곳 피란지에서 입학한 초등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를 서둘러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을 나서면 바로 산과 밭을 마주했다. 마땅히 놀 것이 없어 종종 뒷동산 바위에 걸터앉아 혼자 놀았다. 산 비탈길 옆에 있는 바위는 크고 널찍하여 걸터앉기 좋았다. 그 위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진달래꽃잎이나 아카시아 꽃잎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그것을 따 먹기도 하였다. 때론 산 아래 동네를 굽어보며 칡뿌리를 씹어 먹기도 하고 가을이면 산 밤을 주어 까먹기도 하였다. 바위는 늘 내 곁에 있었고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나를 감싸주었다.

 

 어머니는 조부모님과 우리 여러 형제자매를 위한 살림을 꾸려나가시기에 항시 바쁘셨다. 어머니의 손이 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방안에서는 사철 떡 시루에 콩나물을 키웠다. 우리 가족들은 수시로 시루에 있는 콩나물 머리에 물을 부어주었다. 물을 줄 때마다 콩나물은 쑥쑥 자라는 듯하였다. 우리는 콩나물 국 한 사발과 김치 한 접시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휘딱 비웠다.

어머니는 우리를 키우시듯 콩나물을 키우셨다. 우리가 콩나물 자라듯 쑥쑥 자란다고 하시며 옷 걱정도 많이 하셨다. 당시 어머니는 동생들 차지여서 맏아들인 나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보다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바위와 함께 놀았다. 바위는 나의 어머니였다.

 어느 날 나는 나의 바위에 어머니가 계신 것을 보았다. 뜻밖이고 반가워 달려가려다 물끄러미 먼 산을 보고 계시는 어머니 표정이 밝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에도 가끔 어머니가 시름 가득한 얼굴로 바위에 계신 것을 보았다. 나의 바위에서 어머니가 조부모님과의 관계나 집안의 어려움이 있을 때 홀로 바위에서 마음을 달래셨다는 것을 50여 년이 흐른 후에 깨닫게 되었다. 조부모님은 가진 것 없어도 체면과 격식을 중시하는 유교 풍의 충청도 양반이셨다. 좁은 단칸방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고만고만한 여러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충이 어떠하셨을까 하는 것은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힘들다거나 어렵다고 말씀하시거나 남을 원망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또한 남을 비난하시거나 불평하시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모든 고충을 홀로 삭이시며 홀로 치유하셨다. 어머니는 고충이 있을 때마다 바위에 와서 위안을 얻고 어떠한 어려움도 바위처럼 변함없이 의연하게 견뎌 내셨던 것이다. 바위는 어머니의 위안처였고 나의 바위는 어머니의 바위이기도 하였다.

 피난 당시 우리 형제자매는 어머니의 희망이고 미래였다. 어머니는 우리가 성장하는 것을 보시면서 희망을 갖고 기대를 하며 온갖 시련을 극복하셨던 것이다.

 

 우리 가족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어 나는 서울의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대전에서 근무하시어 가끔 어머니와 그곳을 방문하였다. 돌아올 때는 아버지 고향 지인들이 집에서 농사지은 감자, 고구마, 참기름. 들기름, 쌀 등을 갖다주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것들을 보따리에 싸 갖고 대전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렸다. 내릴 때쯤이면 잠시 졸던 졸음을 깨워야 했다. 눈을 비비며 눈을 떠도 기차에서 내리기 싫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가자고 하시면 걷기 싫어 칭얼거리기도 하였다. 서울역을 나오면 택시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편하고 싶기도 하고 구질구질한 농산품보따리를 갖고 다니는 것이 창피하게 생각되어 택시를 타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택시 대신 버스를 타자고 하셨다. 서울역에서 우리가 사는 돈암동까지는 거리가 멀어 택시요금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툴툴거리며 들고 있던 보따리를 내팽개쳤다. 어머니는 야단을 치시지 않고 병 깨진다 하시며 그 보따리마저 집어 들고 버스에 오르셨다. 심술은 부렸지만 보따리속의 기름병이 깨졌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겁도 나고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어 나는 어머니를 따라 버스에 오르기도 하였다.

 예산 피란 생활을 끝내고 다시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아버지의 지방 근무와 조부모님을 모시고 5남매를 건사하시는 관계로 어머니의 고충은 여전하였다. 어머니가 마음 상할 때 찾던 바위는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바위처럼 변함없고 꿋꿋하게 생활하셨다. 어머니의 바위는 어머니에게 말없이 자신을 다스리고 의연하게 중심을 잡도록 하여 주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바위에서 교훈을 얻고 어머니는 바위를 닮으셨다. 나는 자라면서 은연중에 어머니의 행태를 배우고 바위를 닮은 어머니를 닮아 가는 듯하다.

 

 

 

 

 

 

최장호(시인, 수필가)

한국문학생활회회장, 한국문인협회 문학생활화위원.

고려대법대 졸(경영학박사). 전 단국대경상대학장율곡도서관장.

수필집:아버지의 교훈,시간의 밑그림,캠퍼스의 자화상』『시민과 환경, 시집:불안한 존재,아버지의 잔상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홍수연
김평엽
이화영
전형철
서대선
이서빈
심우기
허갑순
허갑순
마경덕
이영춘
백현국
이충재
권영옥
박일만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 집필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